#116
“대표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닙니다.”
프레져가 건넨 서류를 본 로겐은 적잖이 놀랐다. 그건 휴고 역시 마찬가지였다. 프레져가 준 서류는 사실상 유언장에 가까운 것이었으니.
“어디까지나 내가 잘못됐을 경우를 말하는 거다.”
“그러니까 애초에 그런 무모한 짓을 안 하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로겐이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서류에는 프레져가 사망 시 로겐을 헌티드하우스의 대표로, 휴고를 부대표로 임명한다는 문장이 쓰여 있었다.
그 외에도 백작가의 사업을 여러 갈래로 나눠 놓은 조항이 존재했다. 프레져가 갑자기 사망할 시 작위 계승과 사업체 분할을 두고 일어날 분쟁을 대비한 것이었다.
“너도 알겠지만 겨울 내내 극단의 체제 대부분을 바꿨다. 내가 없다고 불응할 이는 없을 테니 안심해도 좋아.”
프레져는 대표를 중심으로 이뤄지던 업무 체계를 손봤다. 부서별로 업무를 확실히 분담하고 신분이 낮은 이들이라도 업무 성과에 따라 승진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줬다. 평민 단원들과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어차피 왕립 극단 일로 인해 직원들 대부분이 솎아졌으니 이전처럼 분란이 일어날 일은 없을 터였다.
“로겐, 네가 헌티드하우스를 무척 아낀다는 것을 안다. 네가 극단을 그만두려는 건 순전히 나 때문이라는 것도.”
프레져가 캐롤라인의 일로 정신이 없었을 때, 헌티드하우스를 위해 가장 고군분투한 사람은 로겐이었다. 프레져는 단순히 가문의 후계자라 대표가 된 자신보다 로겐이 이 자리에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죽지 않고 돌아온다면 다른 곳으로 가도 좋다. 하지만…… 내가 죽으면 부디 헌티드하우스에 남아 줘라. 부탁한다.”
“…….”
“내가 사라지면 네가 헌티드하우스를 그만두려는 이유도 없어지는 거니까.”
“대표님!”
농담조로 던진 말에 로겐은 덜컥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픈 아내를 대신해 멀쩡한 심장을 가르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정신 좀 차리셨다 싶더니, 이젠 아주 죽고 싶어서 환장을 하신 겁니까?”
“안 죽는다. 캐롤라인이 낫기 전까진 절대 죽지 않아.”
프레져는 캐롤라인을 위해 대신 죽어 줄 수 있었다. 캐롤라인이 자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 완벽히 사라져 줄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살아야 했다. 이 뒤에 닥칠 폭탄과도 같은 일 속에서 그녀를 지켜 내려면.
“왕실에서 마광석을 노리고 있다. 게다가 아직 교단 역시 확실히 정리하지 못했어.”
시간이 없으니 일단은 비밀리에 먼저 수술을 진행할 생각이었다. 캐롤라인만 살면 됐다. 그 뒷일은 프레져가 전부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 빌어먹을 왕실과 교단을.
캐롤라인이 눈을 떴을 때 이 세상은 살 만해져 있어야 했다.
“그러니 이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
프레져는 검사와 함께 심장 수술에 대한 설명을 해 주던 클리브를 떠올렸다. 실패보단 성공할 확률이 높지만 수술 이후 예상치 못한 후유증이 올 가능성이 있다고. 그 후유증엔 당연히 죽음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서류를 빙자한 유언장을 남긴 것이었다. 자신의 재산은 전부 캐롤라인에게, 그리고 그중 일부는 마리아 병원을 위한 발전 기금으로, 또 보육원의 기부금으로 쓰이기로 했다.
“아쉽다고 했으니까.”
혼수상태에 빠지기 직전에 한 말이 아쉽다라니. 그녀의 아쉬움을 채워 주기 전까지 프레져는 죽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이날을 위해 아껴 두었던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2왕자 밑에 있던 자들에게서 받은 장부다.”
프레져의 말에 휴고와 로겐의 눈이 동시에 커다래졌다.
“이걸 대체 어떻게 받아 내셨습니까?”
“그동안의 일을 눈감아 주는 조건으로.”
“예?”
왕립 극단이 무산되며 일자리를 잃게 된 이들이 여럿이었다. 물론이들 모두가 귀족이니 먹고 사는 데 지장은 없겠지만 입장이 난처해진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예술 산업을 쥐고 있는 이들은 전부 권력자들이었고, 변절자들을 선뜻 받아 줄 단체는 없었으니.
“장부를 넘겨주는 대가로 그들을 다시 받아 주기로 했다. 예전만큼 좋은 자리는 아니지만 다시 헌티드하우스에서 일할 수 있게 해 주는 걸로.”
“어떻게 그런 결정을!”
그들은 단순히 일자리를 바꾼 것이 아니었다. 왕립 극단에서 고위직을 맡는 대가로 헌티드하우스의 내부 정보를 팔아먹는 악행을 저질렀으니 휴고와 로겐이 분노하는 건 당연했다.
“진심이십니까?”
“그럴 리가.”
프레져는 걱정 말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내가 그렇게 너그러운 사람처럼 보이나?”
“아니요!”
흥분을 이기지 못해 무의식적으로 대답한 로겐은 아차 싶었는지 프레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정작 프레져에게선 불쾌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나를 배신했던 사람들이다. 나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
받은 것의 이상을 돌려주겠다는 것은 비단 제럴드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자신과 캐롤라인에게 조금의 위해라도 가한 사람이라면 모두 자비 없이 갚아 줄 생각이었다.
“제발 그만두게 해 달라고 빌 때까지 혹독히 굴려 줘야지.”
굳이 프레져가 나서지 않아도 다른 직원들이 눈치를 줄 터였다. 얼굴 가죽이 두꺼운 자가 아니라면 오래 버티지 못하고 나갈 게 분명했다.
“국왕도 참 멍청하지. 나였다면 제럴드에게서 등 돌린 이들을 먼저 포섭하려 했을 텐데.”
남이 듣는다면 기함할 말이었으나 그들 중 누구도 프레져를 저지하지 않았다.
로겐과 휴고는 그런 프레져를 질린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다 장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장부에는 얼핏 봐도 어마어마해 보이는 액수가 적혀 있었다.
“왕립 극단이 무산되며 손해 본 금액이다. 전부 제럴드 개인 재산이 아닌 국고에서 빠져 나간 거고.”
“아니, 별로 한 것도 없으면서 뭘 이렇게 많이…….”
“횡령이 아니고서야 설명이 불가능하군요.”
휴고의 추측에 프레져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의 사생아가 제대로 시작되지도 못한 사업에 국고를 탕진했다. 그것도 모자라 국고의 일부는 그의 주머니를 불리는 데 사용됐다는 게 알려진다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프레져가 굳이 응징하려 하지 않아도 이 뒤는 여론이 알아서 움직여 줄 터였다. 안 그래도 현 왕실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많으니 이를 방관한 국왕을 끌어내리라는 말이 나올지도 몰랐다.
“로널드 험프리는 왕실의 명예에 목숨을 거는 자이니.”
뒷일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을 국왕에게 심장 수술을 압박할 여유 따윈 없을 것이었다.
그럴 확률은 굉장히 낮겠지만 만일 루미아르당 역시 예상대로 된다면…….
“당분간 왕성 근처엔 가지 말아라. 다른 직원들과 너희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리 일러두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상처 입혔는데 프레져가 정정당당하게 나가야 할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프레져 헌티드는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수단은 중요치 않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국왕과 2왕자의 끝을 볼 테니.”
“알겠습니다. 자료는 전부 정리해서 신문사에 맡길 테니 대표님께서는 그냥…… 몸 관리나 잘하십쇼.”
로겐이 서류를 차곡차곡 정리해 옆구리에 끼우며 말을 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목숨이 달린 일이니 당분간은 일 생각 마시고 그냥 어떻게 해야 멀쩡히 돌아올지 궁리나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들 미안하고 고맙다.”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면서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십쇼. 멀쩡히 돌아오셔야 제가 이 지긋지긋한 직장을 때려칠 것 아닙니까.”
“……그래.”
부러 투덜거리는 로겐에 프레져는 그제야 굳은 얼굴을 풀었다.
* * *
애런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배를 타고 그레타로 향하기로 했다.
그레타는 내륙 지방이었기에 배를 타고 가면 한참을 돌아가야 했으나, 꼬불꼬불한 기찻길을 캐롤라인의 몸이 견딜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일주일 정도 늦어지더라도 안전하게 가는 편이 나았다.
“그래도 에릭이 함께한다니 마음이 조금 놓이네요.”
마리아 병원까지 가는 여정에는 애런과 에릭, 마샤가 함께하기로 했다. 스테파니는 아크만 부부와 함께 눈이 좋지 않은 이디나를 모시기로 했다. 물론 그레타까지 따라나서겠다는 이디나를 설득하는 데는 한참이 걸렸지만.
홉킨스 박사도 함께하고 싶어 했으나 결과적으론 병원에 남기로 했다. 자칫 잘못했다간 교단의 박해를 받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교단과 왕실의 반대를 피해 수술을 하러 가는 것이었기에 여정은 은밀하게 준비됐다. 캐롤라인은 퇴원을 하고 자택에서 치료를 받는 걸로, 프레져는 그런 캐롤라인을 간호하기 위해 노르티움에 온 것으로 보여야 했다.
그래서 프레져는 그레타에 가기 전에 먼저 노르티움에 들렀다. 왕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였다.
“캐롤라인은 지금 몇 주째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퇴원을 했다고 하면 아마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것처럼 보일 겁니다.”
실제로도 가망이 없었다. 그러나 프레져와 클리브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가망이란 것을 찾을 생각이었다.
“이제부터 제 이야기 잘 들으십쇼. 저번에도 간단히 말하긴 했지만.”
클리브는 프레져에게 수술 동의서를 건넴과 동시에 심장 수술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시작했다.
심장에 삽입할 마광석의 유효기간은 20년. 20년이 지난 후엔 낡은 인공 판막을 새것으로 갈아 줘야 하며 예상 수술 시간은 약 두 시간이라고.
“수술 후 일주일간 경과를 지켜보고 문제가 없으면 바로 캐롤라인에게 수술을 시행할 계획입니다.”
이는 프레져가 캐롤라인보다 열흘 먼저 그레타로 가는 이유였다. 일주일은 경과를 보기에 너무 짧은 시간이었으나 환자의 삶이 반년 채 남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었다.
“내일 새벽에 출발할 예정이니 오늘은 일찍 주무십쇼. 수술 전까지 컨디션 관리가 생명이니까요.”
“알겠습니다.”
클리브가 나간 후, 프레져는 홀로 휴게실에 남아 심장에 손을 올려 보았다. 얇은 피부 위로 심장이 빠르게 박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이곳을 가르고 마광석을 집어넣는다는 것이 아직도 상상되지가 않았다. 어쩌면 다시는 눈을 뜨지도 못한다는 생각에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캐롤라인이 살지 못하는 것이었다. 자신은 이 수술로 인해 죽어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캐롤라인이 살지 못한다면, 이렇게 갖은 애를 썼는데도 끝내 죽어 버린다면…….
“백작님, 거기 계십니까?”
안 좋은 생각이 폭풍처럼 몰려올 무렵,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이디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