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115)화 (115/156)

#115

클리브가 마리아 병원에 말을 전한 이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노르티움까지 장비를 옮겨 오는 것보다는 그레타에서 수술을 진행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하에 프레져의 그레타행이 결정되었다. 장비는 물론이거니와 글랜포드에서 이뤄지는 종교적 압박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레타로 장소를 옮기는 편이 나았다.

노르티움에서 간단한 검사를 마친 프레져는 바로 수도로 돌아갔다. 그레타로 가기 전에 마무리 지어야 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었다.

헌티드하우스도, 백작저의 일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왕실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프레져는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왕성으로 향했다.

프레져가 자진해서 나선 것은 아니었다. 그를 먼저 찾은 것은 놀랍게도 국왕이었다.

“자네는 참 불경하군. 요즘 자네를 주시하는 이들의 시선이 어떤지 알고 있는가?”

그 시선을 만들어 낸 사람이 국왕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프레져는 국왕의 말에 반박하는 대신 조용히 머리를 숙였다.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할 일이니 오히려 신께서 기뻐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지금 단순히 가슴을 가르는 것만 문제 삼는 게 아니네. 그 신자원이라는 게 대체 무엇일 줄 알고?”

“그것이 인체에 문제가 없다는 것은 곧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지금은 국왕과 힘을 겨룰 때가 아니었다. 캐롤라인이 수술을 받는 것이 먼저였다. 그러기 위해선 이 상황을 조용히 빠져나가야 했다.

순순히 고개를 숙이는 와중에도 좀처럼 뜻을 꺾지 않는 프레져를 국왕은 탐탁지 않은 얼굴로 쳐다봤다.

“이를 증명받기 전에 확실히 알고 싶군. 그 신자원이라는 것, 출처가 확실한 건가?”

“출처라 함은…….”

“믿을 수 있는 곳에서 발견한 게 맞냐는 물음이네. 정체가 무엇인지, 어디서 난 것인지 밝히지도 않고. 설마 불법적인 경로로 취한 건 아니겠지?”

마광석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려는 의도가 뻔히 보이는 질문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제 아내의 몸에 쓰일 물질입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흐음.”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는 프레져에 국왕은 불만스러운 듯 콧소리를 내었다.

프레져처럼 눈치 빠른 자가 제 의도를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는데. 부러 모르는 척하고 있는 거라 생각하자 국왕은 그가 더욱 괘씸해졌다.

“사실 내가 요즘 걱정이 많네. 그래서 더욱 종교에 의지하게 된 것도 있어.”

국왕은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시장 경제에 있어 과독점만큼 독이 되는 것도 없지. 그리고 자네는 예술 산업에 이어 신자원에, 의학 기술까지 발을 뻗으려 하고 있고.”

“…….”

“자네가 이 모든 것들을 독점해 글랜포드 경제에 큰 위기를 가져오면 어쩌나? 이제 자네가 마음만 먹으면 물가를 올리는 것쯤이야 일도 아닐 텐데.”

터무니없는 가정이었다. 겨우 자원 하나와 의학 기술 하나를 더 소유한 걸 가지고 과독점이라니. 이 정도로 흔들릴 시장이라면 그 나라의 경제부터 뿌리부터 잘못돼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애초에 신자원과 의학 기술은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니 제가 마음을 먹는다 해서 달라질 건 없을 겁니다.”

“자네는 아니라고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지 않는가? 자네가 마음을 바꿔 갑자기 이를 독점하려 들면 어쩌나? 가격을 터무니없이 올린다든지.”

이를 통해 프레져는 확신했다. 국왕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따로 있다는 것을. 그 확신에 쐐기를 박듯 국왕은 말을 이었다.

“과독점을 막으려면 아무래도…… 왕실이 관여하는 게 가장 좋지 않겠나?”

신자원, 즉 마광석을 왕실에 넘기라는 노골적인 요구였다. 대놓고 물으면 거절하기 어려울 거란 판단하에 던진 질문이었다.

“사람 목숨을 쥐락펴락하는 광석이네. 그리 위험한 광석이라면 당연히 왕실이 통제해야 하지 않겠나?”

느른하게 말하는 국왕의 목소리가 제법 자애롭게 들렸다. 그러나 그 속엔 시꺼먼 욕심이 그득했다.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것은 신의 영역이었다. 만일 이 자원이 왕실의 손에 들어온다면, 그래서 이 수술이 왕실의 관할하에 이뤄진다면.

‘왕실은 신격화될 수 있다.’

대륙 곳곳에 의회가 생기고 왕정이 무너진 나라가 생겨나면서 왕족의 존재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신자원의 소유는 왕실이 전지전능한 신의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인상을 심어 주기 적합했다.

작위 장사를 하지 않아도, 제럴드처럼 쓸데없는 예술 사업을 벌이지 않아도 왕권을 강화할 수 있을 터였다. 귀족 하나를 무너뜨리자고 교단과 손을 잡을 일도 없어지겠지.

사람을 살리는 광석을 가진 왕족은 곧 신의 대리자나 마찬가지니까!

“나도 무작정 내놓으라는 건 아니네. 어찌 됐든 신자원의 소유가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될 테니…… 내가 교단 정도야 해결해 줄 수 있지 않겠는가?”

“그건 곤란합니다.”

단호한 대답에 너털웃음을 터트릴 준비를 하려던 국왕의 얼굴이 이상한 모양새로 굳었다.

수술은 이제 막 개발에 성공한 단계였다. 수술이 한 차례로 끝날지, 후에 여러 차례를 더 거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경우에 따라 더 많은 마광석을 필요로 할지도 몰랐다.

그런데 얼마 있지도 않은 마광석을 국왕의 손에 쥐여 줄 순 없었다. 그건 캐롤라인의 목숨을 남에게 내어 주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폐하, 그 말씀은 꼭 왕실이 교단을 움직이고 있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

“저를 심판하는 건 신이 하실 일입니다. 부디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은 자제 부탁드리겠습니다.”

“기어코 나와 척을 지겠다는 거군.”

국왕은 분했으나 할 말이 없었다. 대놓고 물었는데 거절당했으니 자존심이 적잖이 상하기도 했다.

프레져는 팔걸이 위에 얹어진 국왕의 손을 응시했다. 팔걸이를 두드리고 있는 줄 알았던 손은 자세히 보니 경련하듯 떨리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느낀 국왕은 은근슬쩍 손을 숨기며 말을 이었다.

“죽는 게 신의 뜻이라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무얼 얼마나 더 살아 보겠다고 그러는지.”

기어코 나온 말에 프레져는 소리 없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과연 자신이 죽을 날을 앞두고도 저런 말이 나올지 궁금했다.

“나는 백작에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줬네. 이를 저버린 건 자네야.”

기회는 무슨. 프레져는 인사를 한 뒤 빠르게 자리를 떴다. 그 더러운 목소리를 들은 귀를 뜯어 물에 헹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알현실을 나와 복도를 걷던 프레져는 때마침 맞은편에서 걸어온 콘월 후작과 마주쳤다. 이다음 차례에 잡힌 알현이 콘월 후작인 모양이었다.

콘월 후작은 프레져를 흘겨본 뒤 인사도 하지 않고 그를 지나쳐 갔다. 바쁜 와중에 콘월 후작까지 상대할 생각은 없었기에 프레져 역시 건물을 나서 마차에 올라탔다.

마광석에 대한 보안을 더욱 철저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무렵, 창문 너머로 극장이 될 뻔했던 건물의 모습이 보였다. 기도가 없는 날인지 어린 사제들이 주변을 청소하고 있었다.

“잠시 멈춰라.”

프레져의 명령에 마차가 루미아르당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사제들을 지나쳐 예배당 안으로 들어섰다. 예배당의 특성상 오가는 사람을 단속하지는 않았다. 왕성 예배당에 오가는 사람은 전부 신원이 증명된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프레져는 건물 내부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대신관을 찾기 위해서였다.

달리 약속을 잡고 온 건 아니었지만 대신관을 만나 설득이라도 해 볼 생각이었다. 혹 국왕처럼 무언가를 원하고 있다면 쥐여 주면 될 테니. 그러나 자리를 비운 모양인지 대신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프레져는 예배당을 나서는 대신 건물 내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웅장함을 자랑하는 외관과는 달리 예배당 안은 휑하기 짝이 없었다. 기분 나쁘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신의 눈을 제외하곤 달리 공을 들였다 볼 수도 없었다.

“기둥을 다 없앴군.”

원래 극장으로 쓰려던 까닭에 실내엔 기둥이 몇 개 없었다. 소리가 멀리 뻗어 나가게 하려는 목적인 듯했다. 공사가 급하게 끝난 탓에 마감이 엉성한 곳도 몇 군데 있었다.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이 손을 대다니.’

그리고 천장을 받치고 있는 기둥을 전부 부숴 버리다니. 주위를 둘러보던 프레져는 예배를 드리는 의자 옆에 어색하게 드리워져 있는 커튼을 걷었다. 그러자 금이 간 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나, 하고 생각할 새도 없이 다시 커튼이 쳐졌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커튼을 잡고 있는 사람은 흰옷에 금으로 된 브로치를 달고 있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대신관인 모양이었다.

“예배당은 성역입니다. 감히 신의 요람을 뒤지는 겁니까?”

급하게 달려왔는지 대신관의 호흡은 가빴다. 얼굴엔 불쾌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교단이 추구하는 자애로움과는 거리가 먼 모습에 프레져는 한 걸음 물러섰다.

“뒤지지 않았습니다. 단지 새로 단장한 신의 요람이 궁금했을 뿐입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프레져의 깍듯한 사과에 대신관 역시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자신이 지나치게 예민했음을 뒤늦게 깨달은 까닭이었다.

“흠, 평범하신 분이 아니라 제가 예민했나 봅니다. 아무래도 교리를 벗어난 일을 벌이시는 분이니…….”

짐짓 부드러운 표정을 지은 대신관은 설교를 시작했다. 말이 설교지 사실상 훈계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신이 내린 소중한 몸에 칼을 댄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국왕이 했던 말에서 신앙심을 더 강조한 것이었다.

“회개하십시오. 기도만이 당신의 죄를 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당신도 당신의 전 부인도, 전부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지금 저주를 하는 겁니까?”

내내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프레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람들의 안녕을 바라야 할 대신관이 저런 말을 하다니.

“저주가 아니라 경고입니다. 불경한 자에겐 분명 신의 심판이 따를 것입니다. 신이 아니더라도 글랜포드의 법이 당신을 벌하겠지요.”

“글랜포드의 법이라…….”

프레져는 교단을 설득하는 것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다. 교단의 세력 확대를 원하는 대신관에게 프레져가 제안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겠지. 프레져는 그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몸을 돌렸다.

신의 축복이 내렸다는 예배당. 이곳이 어떻게 되든 그건 모두 신의 뜻일 테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