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와! 클리브 선생님이다!”
“선생님, 왜 이렇게 늦었어요?”
“선생님, 선물은요? 선물 주세요!”
아이들이 칭얼거리며 클리브의 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인원이 줄지 않은 걸 보니 다행히 세상을 뜬 아이는 없는 모양이었다.
“자자, 일단은 자리에 앉아. 치료가 끝나면 한 명씩 선물을 나눠 줄 테니까.”
“와아!”
아이들은 후다닥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록하드에게 약을 받는 것으로 임상 실험을 끝낸 아이들은 다시 클리브에게 달라붙었다. 클리브는 그레타에서 사 온 장난감과 인형, 간식 같은 것을 아이들에게 하나씩 건넸다.
“녀석들. 나를 기다린 건지 선물을 기다린 건지.”
그러면서도 클리브는 빠르게 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한창 클 때의 나이라 그런지 아이들은 가을에 봤을 때보다 훨씬 커 있었다.
남은 선물의 개수가 점점 줄어들 즈음, 뒤뚱뒤뚱 걸어 다가온 아이는 모아였다.
“우리 모아도 그새 많이 컸네?”
끄덕.
“우리 모아한테는 선생님이 머리핀을…… 모아, 무슨 일 있니?”
유난히 뚱한 표정의 모아에 클리브가 걱정스레 물었다.
몸이 안 좋은 건가? 아니면 캐롤라인이 아파서 상심한 건가? 걱정에 가슴이 철렁할 무렵 모아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어?”
정확히 말하자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는 말은 반쯤 거짓이었다. 왜냐하면 모아의 앞니가 무려 두 개나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아, 벌써 이 빠진 거야?”
“웅. 댜랑하고 시퍼써요.”
앞니에 구멍이 뻥 뚫린 탓에 발음이 줄줄 샜다. 이를 보여 주기 위해 일부러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것을 알게 된 클리브는 허탈하게 웃었다.
“요 장난꾸러기.”
“헤헤.”
“어디 한번 보자. 새 이가 나나 안 나나.”
“아직 안 나써요. 그래서 옥슈슈 못 머거.”
불만스레 입술을 삐죽 내미는 모아에 클리브는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픈 와중에도 잘 자라고 있는 것 같아 장하고 대견했다.
“캐롤라이니 베개 미테 빠진 이를 두고 자면 이빨 요정이 새 이를 줄 거라고 했는데. 아직도 안 가따줘써요.”
“…….”
“그리고 캐롤라인도 안 일어나.”
직전의 장난기는 다 어디로 갔는지 모아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클리브는 눈에 띄게 야위어 있던 캐롤라인을 떠올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상심한 아이에게 우울한 모습까지 보여 줄 순 없었다.
“걱정 마. 봄이 되면 모아 앞니도 나고 캐롤라인도 다시 일어날 테니까.”
“뎡말……?”
“그럼. 참, 선생님이 가져온 선물 한번 볼래?”
“웅! 볼래여!”
금세 기운을 차린 모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아의 앞머리에 핀을 꽂아 준 클리브는 아이의 말랑한 뺨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 아이들한테 실험을 권유할 생각을 하다니.’
잠시나마 고민했던 스스로가 끔찍해 클리브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최종 실험은 안전성이 보장된 단계가 아닌, 안전성을 보장하기 위한 단계였다. 캐롤라인을 안전하게 치료하자고 이 어린아이들에게 최종 실험을 권유하려 했다니.
그에겐 여전히 모든 환자들이 소중했다. 이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하루빨리 건강해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이젠 더 이상 모든 환자가 공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새 클리브에게 가장 중요한 환자는 캐롤라인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이대로 죽는다면 더 이상 심장병을 연구하는 의미가 없을 정도로.
‘의사로서 실격이군.’
자진해 수술을 받겠다는 사람이 나타나긴 했지만 미친 짓이었다.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인간이 가슴을 가르고 멀쩡한 심장에 칼을 댄단 말인가. 프레져 본인의 의지라 해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심장 수술에 관해 가능한 많은 것을 묻고 싶었던 보호자들은 클리브의 표정이 좋지 않자 내일을 기약하며 자리를 비켰다. 그런 클리브에게 먼저 다가간 것은 브리오였다.
콕콕.
“어, 브리오구나. 왜? 선물이 마음에 안 들어?”
도리도리?
“그럼?”
소년은 그 잠깐 사이에 목소리가 더욱 낮아져 있었다. 그러나 말수가 적은 것만큼은 한결같았다.
“표정이 안 좋아요.”
“그래 보이니?”
“캐롤라인 때문이에요?”
“…….”
의외의 통찰력을 가진 브리오에 클리브의 입이 다물렸다. 이내 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캐롤라인은 곧 괜찮아질 거예요. 여기에 모인 다른 애들도요.”
“……그렇지.”
“캐롤라인 보고 싶네요.”
한숨처럼 뱉어진 말에 클리브의 눈이 유난히 크게 뜨였다. 유난히 감정 표현이 없는 아이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시한부, 지긋지긋한 입원, 병원에서의 삶. 두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유대를 느낀 클리브는 브리오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선생님은 지금 캐롤라인한테 갈 건데, 같이 갈래?”
“네.”
어차피 브리오에게도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캐롤라인이 들어야 할 말이라면 브리오도 함께 들어야 했다. 클리브는 그렇게 생각하며 캐롤라인의 병실로 향했다.
“선생님, 브리오!”
“오랜만입니다, 캐롤라인.”
“잘 지내셨죠? 브리오도 잘 지냈어? 아, 이분은 내 오빠인…….”
흥분한 탓에 캐롤라인은 평소보다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그러자 또다시 심장이 쿵쾅거려 캐롤라인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 흉통에는 방법이 없기에 세 사람은 캐롤라인이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렸다.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을 즈음 클리브가 먼저 입을 열었다.
“수술은 최종 단계입니다. 마지막 단계만 통과하면 바로 수술에 들어갈 수 있어요.”
그는 캐롤라인과 애런, 브리오를 차례로 앉혀 놓고 심장 수술의 현주소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말이 길어질 때마다 애런과 캐롤라인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브리오는 평소처럼 무표정했지만.
그 변화를 지켜보던 클리브는 말을 고르고 고른 끝에 좀처럼 떼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수술을 도입하려면……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왜요?”
“얼마나 걸린다는 거죠?”
질문은 제각기 다른 사람에게서 나왔다. 애런과 캐롤라인은 똑 닮은 얼굴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최종 실험에 성공해야 허가 승인이 나는데…… 아직 실험할 만할 사람을 찾지 못했어요. 종교적인 문제도 얽혀 있고…….”
부가적인 설명을 이을수록 캐롤라인의 얼굴은 어두워져 갔다. 그런 게 어딨냐며 성을 내는 애런과는 상반된 태도였다.
“그렇군요.”
캐롤라인이 한 말은 이 한마디가 다였다. 그러나 그녀가 크게 실망하고 또 좌절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캐롤라인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 잠시 말이 없더니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최종 실험을 거치지 않고 바로 수술에 들어가는 건 안 되나요? 수술이 잘못돼서 죽나 병에 걸려서 죽나, 어차피 곧 죽는 건 둘 다 똑같은데.”
“넌 겁도 없어?”
그런 그녀를 향해 목소리를 높인 건 애런이었다.
“네 말대로 어차피 곧 죽는다 치자. 그 과정이 고통스럽지 않을 거라곤 어떻게 보장하는데?”
“…….”
“수술이 잘못돼서 지금보다 더 상태가 안 좋아지면, 그래서 숨도 못 쉴 만큼 아파지면 어쩔 건데? 수술 도중에 죽기라도 하면?”
“……뭘 하든 어차피 죽는다면 미완성인 수술이라도 받는 게 낫잖아.”
“어차피 죽을 거니까 상관없다 이거야? 넌 더 살고 싶은 욕심도 없어? 하루든 이틀이든, 조금이라도 더 살 방법을 생각해야지!”
“나라고 뭐 죽고 싶은 줄 알아?”
결국 캐롤라인도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누군 안 무서워서 이렇게 말하는 줄 아나?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으니까 내가 고를 수 있는 최선을 택하려는 거잖아! 왜 이렇게 화를 내?”
“화낸 적 없어! 네가 너무 경솔한 판단을 내리는 것 같아서-.”
“지금 내고 있잖아!”
“아니라니까!”
“아니긴 무슨!”
“시끄러워요.”
점점 커지는 목소리 사이로 소년은 낮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에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캐롤라인 아프잖아요. 그렇게 화내면 또 심장이 쿵쾅댈 거예요.”
“……그렇지.”
“그리고 아저씨는 화낸 거 맞아요. 목소리도 높였고 말도 안 예쁘게 했으니까.”
“……미안하다.”
“아픈 사람한테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귓속을 후비며 심드렁하게 말하는 브리오에 두 사람은 재깍 입을 다물었다. 남매 사이에 끼어 어쩔 줄 모르던 클리브는 상황을 순식간에 중재시킨 브리오를 보며 감탄했다.
“사과할 사람은 내가 아니에요.”
캐롤라인이지. 쭉 손가락으로 캐롤라인을 가리키는 브리오에 애런은 마른세수를 하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화내서.”
“…….”
“네가 너무 위험한 선택을 하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어. 나랑 어머니는 네가 조금이라도 더 살길 바라니까.”
그 마음은 캐롤라인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보살피느라 신경이 예민해져 있다는 것도, 걱정이 앞서 그랬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를 알면서도 그를 다독이긴커녕 같이 성질을 부리기나 했다.
“진짜 오빠랑 나는…… 나이를 먹어도 똑같네.”
“……인정하는 바야.”
남매는 선생님에게 혼난 아이처럼 시무룩하게 앉아 있었으나 정작 이들을 나무란 브리오는 태연했다. 브리오는 클리브의 서류 가방을 가만히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제가 할게요.”
“어?”
“자원해서 나설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잖아요. 그러면 제가 할게요.”
못 알아들은 클리브를 위해 브리오는 친절하게 다시 대답해 주었다. 오늘은 브리오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말을 한 날로 기억될 터였다.
“절대 안 돼.”
그러나 돌아온 클리브의 대답은 단호하기만 했다. 그건 캐롤라인과 애런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저는 걱정할 가족도 없잖아요. 아쉬운 것도 없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절대 안 돼.”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해요.”
“그래도 넌 안 돼.”
“그럼 그런 일은 누가 해야 하는 건데요?”
높낮이 없는 물음에 캐롤라인의 입이 조가비처럼 다물렸다.
브리오의 말처럼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 위험한 일을 맡길 수 없는 이유는 브리오가 제게 소중한 아이라는 이기심 때문이었다. 게다가 브리오는 아직 어리지 않은가.
“실험이라서 문제가 되는 거면 최종 실험인 걸 안 밝히면 되잖아요. 제가 졸라서 어쩔 수 없이 먼저 수술하게 됐다고 하세요. 캐롤라인이 착한 사람이라 양보해 준 거라고.”
“그래도 안 돼.”
캐롤라인은 울컥한 얼굴로 브리오를 꼭 껴안았다. 조금 전 애런이 제게 화를 낸 이유가 와닿았다.
“그래, 브리오. 일단은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확신할 수 없는 말을 하며 클리브는 프레져를 떠올렸다. 자신의 심장을 이용하라 말하던 프레져 헌티드를.
이 순간에 그가 떠오르는 이유는 자신에게 있어 프레져가 그리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겠지.
‘무엇보다 프레져 헌티드는 건강하니까.’
아픈 사람보단 사지 멀쩡한 사람을 두고 실험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에 클리브는 고개를 저었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자고 덜 소중한 사람을 희생시키려는 자신의 욕심이 넌덜머리가 났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에 자원해 줄 환자를 찾고 있는 처지고.’
윤리를 증명하기 위해 또 다른 윤리를 해쳐야 한다는 이 상황에 머리가 아팠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모순투성이였다.
‘그래도 무조건 실패한다는 보장은 없잖아. 성공할 확률이 더 높은 실험이니까.’
그러면서도 클리브의 생각은 점점 프레져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