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111)화 (111/156)

#111

제럴드는 근신 명령을 받고 왕자궁에 칩거 중이었다.

델의 증언을 부정할 새도 없이 프레져를 향한 긍정적인 기사들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심지어 과거 로잘린의 폭로를 보도했던 맥타인 사 역시 프레져의 행보를 칭찬하며 나섰으니. 이들이 제럴드를 질타하는 건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럴드와 프레져를 비교하는 기사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거짓을 주장하는 왕실 측 항변은 통하지 않았다. 이엔 왕실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는 프레져의 침묵이 가장 컸다.

“당장 폐하를 봬야 한다.”

“폐하께서는 지금 예배를 드리고 계십니다. 부디 폐하께서 걸음하실 때까지 기다리시-.”

“대체 나보고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거냐? 청을 드려도 답 한번 없으신데!”

와장창!

제럴드가 테이블을 뒤집어엎자 위에 있던 물건들이 전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조차도 성에 차지 않는지 제럴드는 바닥의 유리 조각을 밟으며 씨근덕거렸다.

뭐든 손을 써 보려 했지만 녹록지 않았다. 국왕이 근신 명령을 내리며 제럴드를 버렸기 때문이었다.

“폐, 폐하께 다시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하녀들을 불러 주변을 치운 시종은 허겁지겁 방을 빠져나갔다.

제럴드는 하녀가 테이블 위에 다시 올려놓은 서신을 보다 전부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갑작스레 사라져 버린 왕립 극단에 대해 당황을 표하는 서신이었다.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게 된 이들은 혼란에 휩싸였다. 다시 헌티드하우스로 돌아갈 수도 없으니 이 일의 책임자인 제럴드에게 따져 묻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제럴드가 근신 명령으로 인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저 답답해 미칠 노릇인 것이었다.

“젠장, 젠장, 젠장!”

그리고 미치기 일보 직전인 건 제럴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외면 중인 것도 모자라 극장이 들어설 자리를 예배당으로 만들어 버린 국왕을 통해 제럴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왕립 극단은, 그리고 왕세자 간택은 물 건너갔구나.

그러나 이와 별개로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받은 것뿐만이 아니라 전부 그 이상으로 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헌티드 백작의 서늘한 목소리가 잊혀지지 않는 까닭이었다. 분명 이 뒤에 더 큰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예감이 제럴드의 몸을 덮쳤다.

* * *

프레져는 용기를 내어 병실 앞, 정확히 말하자면 병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애런 앞에 섰다.

“왜 오셨습니까?”

적대감 어린 목소리에 프레져는 머뭇거리다 입을 뗐다.

“……캐롤라인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누가 백작께 그러덥니까? 설마 캐롤의 근처에 사람을 심어 두신 겁니까?”

“경호 목적으로 붙여 둔 것이 답니다. 이혼 기사로 시끄러워졌으니 기자들이 닥칠 것을 대비해-.”

“네. 말씀대로 백작님은 제 동생과 이혼을 하셨죠.”

“…….”

“이제 캐롤라인은 백작님의 아내가 아닙니다. 백작께서 제 동생을 신경 쓸 이유도, 만날 이유도 없습니다.”

단호한 목소리에 프레져의 고개가 숙여졌다.

“지금껏 백작님 얘기 한번 꺼내지 않고 잘 지내 온 아이입니다. 괜히 모습을 보여 아픈 사람을 힘들게 만들지 마세요.”

프레져와 함께한 세월이 힘들면 힘들었지 결코 행복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애런은 이를 갈았다. 눈앞의 남자가 헌티드 백작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주먹을 날렸을 텐데.

“애런, 밖에 누가 왔니?”

그때 문 안쪽에서 이디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난처한 얼굴이 된 애런은 문을 조금 열어 대답했다.

“별일 아닙니다. 금방 들어갈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니다. 괜찮으니까 천천히 해.”

살짝 열린 문틈으로 이디나 앞에 누워 있는 캐롤라인이 보였다. 슬쩍 보인 게 전부였으나 얼핏 봐도 캐롤라인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이전보다 훨씬 많은 기계가 주변에 놓여 있기까지 했다.

“…….”

이에 프레져는 소리 없이 탄식했다. 애런은 아차 싶었는지 문을 닫은 채 한숨을 쉬었다. 이전보다 목소리를 낮춘 애런은 프레져에게 경고하듯 입을 열었다.

“백작님은 캐롤라인에게도 제 어머니께도 해가 되는 사람입니다. 그걸 모르시진 않겠죠.”

“……압니다.”

“노르티움을 떠나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되도록 저 두 사람 눈에 띄지 마세요. 난 더 이상 내 가족들이 아파하는 걸 볼 수 없습니다.”

캐롤라인에게 해가 되는 사람. 프레져는 그 단어를 곱씹으며 걸음을 돌렸다.

애런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캐롤라인에게 유해한 사람이었다. 프레져는 가진 게 아무리 많아도 캐롤라인에게 도움 하나 줄 수 없었다. 짧지 않은 결혼 생활 동안 이는 캐롤라인을 옥죄는 족쇄가 되었으니까.

“백작께서 마리아 병원의 수술을 지원하셨다는 이야긴 들었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

“제 동생에게 병을 준 건 백작이십니다. 병 주고 약 준 셈인 걸로 캐롤라인을 구한 거라 착각하지 마십쇼.”

애런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는 더 이상 헌티드 백작 앞에서 몸을 수그리지 않았다.

하나뿐인 동생이 병을 얻었다. 그것도 모자라 눈앞의 남편이라는 자는 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에 대해 캐롤라인이 입을 연 적은 없었으나, 지금까지 상황을 미루어 보면 그녀가 백작저에서 어떻게 살아왔을지가 눈에 보였다.

애런은 캐롤라인의 가족이니까. 미우나 고우나 동생을 사랑하는 오빠이니까.

프레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일단 얼굴부터 찌푸리고 보는 스테파니만 봐도 대충 알 수 있었다.

“백작께서 제 동생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여기서 물러나 주시는 것뿐입니다.”

“……죄송합니다.”

틀린 것 하나 없는 말에 프레져는 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심장 수술을 연구했다고 우쭐한 적은 맹세코 없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캐롤라인에게 조금이라도 속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애런의 말대로 캐롤라인에게 병을 준 사람은 자신이면서.

프레져는 병실 문틈으로 얼핏 보이던 캐롤라인을 떠올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에겐 시간이 없었다.

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자신처럼 버러지만도 못한 인간이 캐롤라인에게 도움이 될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나뿐이었다.

* * *

“애런, 밖에 누가 왔었어?”

“응. 오늘은 좀 손님이 많네. 시끄러웠어?”

“아니.”

캐롤라인은 가만히 누운 채 고개만 저었다. 죽은 듯 내리 잠만 자던 캐롤라인은 꼬박 사흘째 되던 날에 눈을 떴다. 그 이후로도 그녀는 아주 오래 잠들어 있다 잠깐 눈을 뜨길 반복했다.

“너 이제 정신 좀 차린 것 같아서 어머니는 마샤가 모시고 갔어. 쉬셔야 될 것 같아서.”

“잘했어.”

캐롤라인이 앓는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심장 수술 연구의 성공을 시작으로, 에릭은 퇴원을 하고 스테파니는 지금보다 좀 더 높은 직급으로 승진을 했다. 이제는 사장의 바로 밑에서 일을 돕게 됐다고.

뼈까지 시리던 겨울은 한 걸음 물러남과 동시에 캐롤라인은 헌티드 백작 부인에서 웨즐 남작 영애로 바뀌어 있었다.

“당분간은 엄마 병원에 못 오게 해 줘. 몸도 안 좋으신데.”

“응.”

“그리고 오빠도 조심하고. 선천적인 병이래잖아.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바로 병원 가고.”

“그래.”

삐쩍 마른 게 누굴 걱정하냐 한 소리 하려던 애런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캐롤라인에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말대답을 하면 말이 길어질 게 뻔했다.

“이것 좀 말했다고 숨이 차네.”

오랜만에 아주 깊은 잠을 잤는데, 깨어나 보니 몸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더 나빠질 것도 없다고 생각한 몸이었다. 앞으로 여기서 얼마나 더 안 좋아지려나.

캐롤라인은 머리를 쓸어 넘기려다 그것마저 힘에 부쳐 포기했다. 보다 못한 애런은 캐롤라인의 머리를 넘겨 주며 부러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내가 어제 말했잖아. 수술 연구가 최종 단계를 앞두고 있다고.”

“응.”

“사실 오늘 계속 밖이 시끄러웠던 이유가 있어. 수술 연구에 참여하신 클리브 헤이오스란 분께서 오셨거든. 듣자 하니 이전에 네 치료를 담당했던 분이라는데.”

“정말? 클리브 선생님이 오셨단 말이야?”

캐롤라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오랜만에 보는 생기 있는 모습에 애런은 미소를 머금었다.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 교단에서 이를 반대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부러 덧붙이지 않았다.

“아까는 네가 자고 있어서 잠깐 자리를 비우셨어. 실험실 아이들만 만나고 돌아오시겠대. 너한테 전하고 싶은 말이 많으신가 봐.”

“정말 선생님이…….”

캐롤라인은 감격스러운 듯 말을 끝맺지 못했다. 희망과 감격으로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동요하고 있었다.

“그리고…….”

애런은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모처럼 기분이 좋아 보이는 캐롤라인을 가라앉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래도 캐롤라인을 살리겠다고 연구에 막대한 후원금을 낸 사람인데. 이 정도는 말해 주는 게 예의 아닐까.

애런은 이건 딱 그 정도의 대가일 뿐이라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헌티드 백작이 찾아왔어.”

“……어?”

캐롤라인은 놀란 듯 살짝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다행히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널 만나고 싶다는 걸 내가 내쫓았어.”

“왜?”

“괘씸하잖아. 그놈 보면 없던 병도 생길 거 같은데 어떻게 널 보여 주냐?”

“풋.”

캐롤라인은 오랜만에 웃음을 터트렸다. 프레져를 놈이라고 부르는 애런이 왜 이렇게 통쾌한지. 예전이라면 그러지 말라며 뜯어말렸을 텐데.

프레져의 욕을 하면서 시원히 웃을 수 있는 날이 왔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더 이상 프레져의 편을 들 일이 없다는 생각에 낯선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내가 잘못 판단한 거야? 지금이라도 불러 줘?”

“아니.”

의외의 대답에 애런은 조금 놀랐다. 캐롤라인이 프레져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애증 비슷한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욕이라도 한 바가지 해 줘야겠다, 이런 생각 안 들어? 하다못해 머리털을 쥐어뜯고 싶다든지. 그런 거라면 이 오라버니가 모른 척해 줄 수 있어.”

보고 싶다고 말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뜯어말리려 했을 텐데. 막상 저리 덤덤한 것을 보니 되려 멋쩍어진 것은 애런이었다.

이에 캐롤라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얼굴 한번 못 보고 이혼한 게 조금 걸리긴 하는데. 그래도 이 정도면 된 것 같아.”

“…….”

“여기서 멈춰야지.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지 않아.”

무엇보다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가쁘게 호흡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목덜미에서 죽음의 냄새가 풍길 것 같은 이 몰골을.

프레져를 죽도록 미워하던 시절은 이제 지났다. 캐롤라인은 그가 자신에게 어떠한 감정도 가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게 죄책감이든 사랑이든.

누구든 얽매여 있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니까. 그도 자신도 이혼이라는 새로운 길을 선택했으니 각자의 길로 향해야 하지 않겠나.

게다가 수술이 최종 단계를 앞두고 있다지 않나. 삶이 끝나지 않고 이어질 예정이라면 자신은 더욱 과거의 것들을 떨쳐 내야 했다.

“그러니까 난 이만큼이면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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