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프레져가 왕국 전역에 보육원을 설립한다는 기사와 함께 델의 증언이 보도되며 판도는 완전히 뒤집혔다.
사람들은 품위를 잃은 왕실에 야유를 보냄과 동시에 프레져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고아가 아닌, 부모가 있는 아이들을 돌봐 주는 보육원이란 개념이 글랜포드에 생소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자식을 학교에 보내지 못하는 이들에겐 참으로 좋은 소식이었다.
이제 사람들에게 있어 프레져의 극단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단순히 보고 즐기는 예술보다야 삶과 밀접히 닿아 있는 의술과 복지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예술 산업에 이어 의학, 인체에 무해하다는 신자원, 그리고 복지까지. 헌티드 가문을 중심으로 정세가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이에 국왕은 샤를리즈에게 연락을 보냈다. 제대로 내조만 했다면 남편이 누구와 손잡았는지 알 수 있었을 일을, 도대체 뭘 하느라 여태껏 몰랐냐는 것이었다.
전서구까지 시켜 보냈건만, 돌아온 답장은 짧고 간결했다.
「폐하의 말씀대로 저는 집에서 내조만 하는 사람인데, 남자들이 밖에서 하는 일을 어떻게 알겠나요.
그러게 평소에 잘 지켜보시지는. 뒤늦게 애먼 사람을 잡는 건 어째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거 같습니다.」
“이런……!”
국왕은 샤를리즈의 편지를 구겨 던져 버렸다. 예부터 살가운 남매 사이는 아니었으나 이런 답장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씩씩거리며 숨을 고른 국왕은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귀족들의 납세 내역을 모아 놓은 것이었다.
항상 상위 언저리에 위치하던 프레져는 어느덧 귀족 중 납세 금액 1순위가 되어 있었다.
내는 세금이 이리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는 것은 벌어들인 돈도 가진 재산도 늘었다는 뜻인데.
“지금 내가 본 게 맞는 건가? 왜 헌티드 백작의 세금이 이렇게 높게 책정되어 있지?”
겨울은 사교 행사가 없는 계절로, 예술 사업의 비수기이기도 했다. 헌티드하우스는 대표 경영자의 부재라는 이유로 막대한 손해를 본 탓에 겨울에 내야 할 세금이 줄어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대체 왜?
노기 어린 국왕의 목소리에 관료가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자, 작년에 헌티드하우스의 순회공연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때 벌어들인 수익이 함께 책정된 모양입니다.”
“고작 한 달이다. 그 한 달 부지런히 일했다고 소득이 이리 느는 게 말이 된단 말이냐?”
“워낙 인기가 많은 공연이었으니…….”
관료는 작은 목소리를 말하다 국왕의 눈치를 살피곤 후다닥 말을 바꿨다.
“폐하, 세금일 뿐입니다. 아시다시피 예술 분야의 세금이 다른 분야보다 높게 책정되어 있지 않습니까. 실제로 벌어들인 것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관료의 말은 국왕의 노기를 다스리지 못했다.
점점 세를 불려 가는 게 싫어 법을 개정하면서까지 훼방을 놓았다. 헌티드하우스의 국외 수익을 생각해 국외 소득에 대한 세를 늘리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놈은 심장 수술이라는 전혀 예상치 못한 분야로 발을 뻗고 있었다.
“폐하, 이는 작년 하반기 기준의 결과입니다. 올해는 여러 일들이 많았으니 이보다 적은 액수가 책정될 게 분명합니다.”
“과연 그럴까.”
프레져 헌티드가 젠트리들을 상대로 더 많은 공연을 기획하기 시작한다면, 보육원과 마리아 병원에서 시너지를 얻어 의학계로 뻗어 나간다면.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기상천외한 방법을 만들어 낸다면…….
국왕은 두려웠다.
빠르게 바뀌고 있는 정세, 체제를 바꾼 여러 나라들과 똑똑해지는 민중들, 옆 나라에서 흘러 들어온 지식인들까지.
이러다 왕실이 아닌 헌티드를 추종하는 자들이 나오면 어쩌나. 작위 장사까지 해 가며 지켜 온 왕권이 무너지면 어쩌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절대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로널드 험프리는 결심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루미아르관 천장에 신의 눈을 그려라! 아주 크게!”
* * *
새로 증축한 왕성 건물이 예배당으로 쓰일 거라는 소식이 공표될 즈음, 프레져에게 연락이 쏟아졌다. 캐롤라인이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연락과, 아직 수술의 안정성을 명확히 보장할 수 없다는 그레타 측의 연락이었다.
다행히 급한 일은 마무리해 둔 참이라 프레져는 곧장 노르티움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전신을 통해 재깍 연락을 하겠다는 말과 함께였다.
노르티움 종합 병원에 도착함과 동시에 캐롤라인에게 향하려던 그를 막은 것은 클리브 헤이오스였다.
“왜 당신이 여기에……?”
“일단 이쪽으로 오시죠. 수술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클리브는 프레져를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이끌었다. 그러곤 거의 다 성공한 이 수술을 바로 행할 수 없는 이유를 프레져에게 설명했다.
“백작도 글랜포드 사람이니까 이해하겠죠.”
“아니요. 이해 못 합니다. 어차피 아파 죽을 거 돈도 주고 수술도 시켜 준다는데, 그게 뭐가 문제라는 겁니까?”
“의학과 윤리라는 게 떼 놓을 수 없는 문제인데…….”
캐롤라인의 생존 문제에 대해선 윤리 의식이 없어지는 프레져에 클리브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에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에 당황스럽기도, 약간 언짢기도 했다.
“사실 나도 그런 마음입니다. 그런데 캐롤라인은 글랜포드 사람이 아닙니까. 다 무시하고 수술에 성공한다고 해도 그다음이 문제가 될 겁니다.”
캐롤라인은 여러 이유로 글랜포드의 주목받는 귀족 중 하나였다. 물론 죽는 것보다 끔찍한 일은 없겠지만 수술을 이유로 교단의 지탄을 받게 될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글랜포드 왕실은……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요.”
프레져는 불현듯 왕성 예배당의 건축을 공표했던 국왕을 떠올렸다. 모두가 극장이 될 거라 예상했던 건물이 갑자기 예배당이 된다기에 의아하긴 했는데.
“설마.”
기분 나쁜 예감이 목덜미를 스쳤다. 그의 예상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 예감은 사실이 될 터였다.
“물론 그 전에 최종 실험에 자원하겠다는 환자가 나타나면 더 쉬워질 겁니다. 쉽진 않겠지만.”
캐롤라인이 한계를 맞이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이는 클리브가 글랜포드까지 찾아온 이유이기도 했다. 그녀의 상태를 직접 확인하고 가능하다면 그녀를 마리아 병원에 데려가 수술시키려고.
그러나 캐롤라인의 상태가 생각보다 좋지 않아 큰일이었다. 만일 이 상황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최악의 상황엔 캐롤라인을 잃게 될 수도 있었다.
수술을 코앞에 두고 허무하게.
“어찌 됐든 정 안 되면 그레타로 보내는 방법도 생각해야 합니다. 마리아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아예 그레타의 국민이 되면 그래도-.”
“그 최종 실험, 꼭 심장병 환자여야만 하는 겁니까?”
뜬금없이 묻는 프레져에 클리브는 당황해하면서도 입을 뗐다.
“환자면 좋긴 하겠지만 아니어도 상관은 없습니다. 인공 판막이 인체에서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는지 확인하고 제 역할을…….”
줄줄 설명을 잇던 클리브는 무언가 이상함을 인지한 듯 말을 멈췄다.
“백작, 설마…… 그런 짓을 하려는 건 아니겠죠?”
클리브가 염려스러운 얼굴로 물었으나 프레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걸음을 돌려 캐롤라인이 있는 곳으로 향할 뿐이었다.
* * *
왕성의 신전, 원래대로라면 극장이 되었을 건물에서 대신관은 기도를 올리는 중이었다. 그 앞엔 신도들이 열을 맞춰 앉아 있었다. 왕성 안에 있는 건물인 만큼 자리에 모인 이들은 당연히 귀족이었다.
“신께서 하나하나 조각해 숨을 불어넣은 것이 인간입니다. 신께서 하사하신 몸에 함부로 칼을 대는 것은 곧 신에 대한 모독일 터…….”
극장으로 쓸 목적으로 개조한 탓에 건물은 목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는 효과가 있었다. 이에 대신관의 목소리는 꼭 신의 목소리처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국왕의 명령에 따라 증축이 급하게 마무리가 된 탓에 건물은 엉성했다. 아직 정비가 덜 된 곳엔 흰 커튼을 치고 백합과 백색 조각상을 갖다 두었다. 엉성함을 가리기 위함이었다.
그래도 천장 한가운데 그려진 신은 눈 하나만큼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이는 신이 너희를 지켜보고 있다는 의미를 가진 교단의 상징이었다. 그 덕에 내부는 그럭저럭 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글랜포드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이 루미아르당을 교단에 내어 주신 폐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신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대신관의 인사에 국왕이 고개를 까딱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어느덧 건물의 이름은 루미아르관에서 예배당을 칭하는 루미아르당으로 바뀌어 있었다.
“신께서 정한 흐름을 바꾸려는 자는 응징을 받을 것입니다.”
프레져를 눌러놓으려면 그가 행하려는 일이 얼마나 야만적인지, 신의 뜻을 얼마나 위반하는 행동인지 알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국왕은 교단과 손을 잡았다.
왕성에 있는 아름다운 건물과 막대한 헌금을 내는 대가는 심장 수술에 대한, 정확히 말하자면 프레져에 대한 지탄이었다.
신전을 왕성 안에 두는 것 자체가 종교에 힘을 실어 주겠다는 뜻이기에 대신관은 흔쾌히 국왕의 손을 잡았다.
“인간은 수없이 다칩니다. 피치 못할 사고로 인해 크고 작게 다치길 반복하지요. 그러나 이 심장이 다치는 걸 사고라고 할 수 있습니까?”
대신관의 자신의 가슴께에 손을 올린 채 말을 이었다.
“외상과는 달리 원인을 모른 채 일어나는 질병들은 사고가 아닙니다. 그저 신의 뜻에 따라 그렇게 될 예정이었던 것입니다.”
대신관의 말에 나이가 지긋한 귀족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대신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세상에 이유 없는 일은 없습니다. 이유를 모른 채 생긴 병이라면 그 또한 신의 뜻이니 받아들인 채 살아야 합니다. 낫겠다고 생살을 가르고 장기를 끄집는 것은 신의 뜻에 반하는 행위입니다.”
만족스러운 연설에 국왕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옆에서 함께 기도를 올리고 있던 왕비가 그를 애타는 눈으로 쳐다봤으나 눈길 주지 않았다. 감히 신을 뜻을 배반하려는 자를 처단하기 위해 국왕은 제럴드를 과감히 털어 낼 작정이었다.
‘어차피 평민의 피가 섞인 반쪽짜리 자식이 아닌가.’
언론에서 제럴드가 프레져를 욕하기 위해 사람을 매수했다는 사실까지 알려지며 왕실의 위상은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거는 기대가 크기는커녕, 자질도 없는 자식 따위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