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109)화 (109/156)

#109

문밖을 나선 프레져는 때마침 왕자궁으로 찾아온 국왕을 맞닥뜨렸다. 제럴드가 있는 티 룸까지 직접 찾아온 것을 보니 몹시 몸이 달은 모양이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백작. 2왕자를 만나고 오는 길인가?”

“예. 잠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렇군.”

국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프레져를 계속 쳐다보기만 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결국 국왕은 프레져가 의아해할 즈음 입을 열었다.

“……가 보게. 내 2왕자에게 긴히 할 말이 있어서.”

“알겠습니다.”

국왕은 프레져가 떠나는 것을 확인하지 않고 바로 티 룸으로 들어섰다. 제럴드는 아직도 분을 이기지 못해 씨근덕거리고 있었다.

“헌티드 백작이 뭐라더냐?”

“……별말 없었습니다.”

“별말이 없었다는 건 너는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는 뜻이냐? 백작이 말이 없으면 네가 나서서 말이라도 붙여야 할 것 아니냐!”

국왕이 테이블을 내려치며 목청을 높였다.

“여론, 여론, 그놈의 여론! 여론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은 네 입으로 말해서 잘 알고 있겠지!”

“…….”

“네가 그렇게 마르고 닳도록 말했던 여론이 다시 헌티드 백작 쪽으로 기울었다. 정작 그자가 나서서 한 건 하나도 없는데도!”

무너진 평판을 되찾기 위해 밤낮 가리지 않고 일한 것보다 수술 연구에 지원을 했다는 것이 더욱 효과가 좋았다.

그 망할 수술에 얼마나 비싼 값을 매길지도 모르고. 환자를 가족으로 둔 집에서는 프레져를 영웅처럼 여기기까지 했다. 인간 수명의 판도를 바꿀 실험에 연관된 글랜포드인이 프레져 하나뿐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차라리 평판만 좋아진다면 나았을 것을!”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늙고 병드는 것을 두려워하는 법이었다. 무병장수를 꿈꾸는 이들은 대부분 나이가 지긋한 귀족이었고 그들은 노인이라면 피할 수 없는 질환을 하나씩 앓고 있었다.

심장을 비롯해 다른 장기를 치료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자원’을 가진 사람이 프레져와 손을 잡은 사업가라니. 세가 프레져 쪽으로 기울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극단이 문제가 아니겠구나. 새로운 자원도 찾아냈겠다, 의학에도 발을 뻗었겠다. 이젠 다른 방향으로 사업을 불리려 하겠지! 그 괘씸한 놈의 어깨가 더욱 올라가겠구나!”

이후로도 한참 동안 고성이 이어졌다. 문밖에서 이 소란을 듣고 있던 프레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백작 각하.”

생각보다 큰 호통에 당황한 시종이 프레져를 불렀다. 하필 프레져가 두고 온 물건이 있다며 돌아온 탓이었다.

“손수건은 다음에 찾도록 하지.”

“……네. 잘 세탁해 보관해 두겠습니다.”

프레져는 복도에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고성을 뒤로한 채 왕자궁을 빠져나왔다.

왕세자 간택은 무슨. 이 왕성에 머물게 하는 것조차 제럴드에겐 과분했다. 그리고 이 모든 사태를 묵인한 국왕도.

감히 아픈 제 아내의 상처를 헤집은 이들은 모두 응징해야 마땅했다.

그리고 그 응징 대상엔 자신도 포함이었다.

* * *

“어머니, 여긴 제가 지킬게요. 돌아가서 좀 주무세요.”

“됐다.”

이디나는 앓다 지쳐 잠든 캐롤라인의 옆을 계속 뜬눈으로 지키는 중이었다. 불이라도 켜면 딸의 형상이라도 어렴풋이 보일 텐데, 곤히 잠든 이를 깨울 수 없어 컴컴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이디나는 조금 전 몸부림을 친 탓에 엉켜 버린 캐롤라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빗겨 주며 속삭였다.

“아가, 좋은 소식이 있는데. 들어 보고 싶지 않아?”

마리아 병원의 실험 소식을 듣고 가장 좋아할 사람은 캐롤라인이었다. 그러나 사흘 전부터 내내 앓은 탓에 대화 한 번 나누지 못했다.

“너랑 친한 선생님이 실험 연구에 성공했대. 조금만 더 있으면 사람한테도 쓸 수 있을 거라는구나. 그분한테 편지도 왔어.”

이디나가 협탁 위에 올려진 편지를 가리키며 말했으나 캐롤라인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이건 해 주기 싫은 말인데……. 네가 들으면 좋아할 것 같아서.”

“…….”

“헌티드 백작이 왕국 전역에 보육원을 세울 계획이라고 하더구나. 왕국 최초의 보육원인 이디나 캐롤 보육원의 뜻을 기린다고.”

프레져 헌티드, 그 썩을 놈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보육원을 세우고 막대한 위자료를 주면 뭐 하나. 딸아이는 죽을 날을 앞둔 채 하루하루 시들어만 가는데.

“너는 또 언제 나 몰래 그런 좋은 일을 했니. 너를 장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아픈 와중에도 좋은 일을 한 딸아이가 기특하면서도 미웠다. 제 몸이나 열심히 돌보지는 누굴 또 돕겠다고.

“그래도 내가 그렇게 키웠으니까.”

가진 것이 두 개면 하나는 나누는 사람으로, 넘어진 사람을 업고 달리진 못해도 일어서는 사람으로 크게끔 말이다.

“장한 내 딸 목소리 한번 듣고 싶구나. 그러니까 그만 일어나면 안 되니? 너 이렇게 눈 감고 있으면 엄마 불안한데…….”

이디나는 캐롤라인의 눈꺼풀에 손을 올리려다 혹여 그녀가 깰까 봐 다시 손을 거두었다.

“그래도 안 울련다. 나는 네 엄마잖니.”

“…….”

“나도 무서운데 너는 얼마나 더 무섭겠어.”

이디나는 캐롤라인의 손을 꼭 잡은 채 침대에 엎드렸다. 부잣집에 시집갔으니 손이 틀 일은 없겠다 생각했던 게 무색하게도 뼈마디가 불거진 손엔 주사 자국이 잔뜩이었다.

“그러니까 안 울어야지.”

이디나는 그렇게 있다 잠에 들었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애런은 캐롤라인의 맞은편에 있는 간이침대로 이디나를 옮겼다. 병실이 넓은 탓에 여러 물건을 둘 수 있어 다행이었다.

애런은 이디나의 목까지 이불을 꽁꽁 덮어 준 뒤 이디나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았다.

“야, 이쯤 되니 나도 좀 무섭다. 이제 눈 좀 뜨자.”

퉁명스러운 목소리와는 달리, 캐롤라인을 내려다보는 시선엔 걱정이 가득했다.

“아니다. 눈 안 떠도 돼. 그러니까…… 조금만 버텨 주라. 수술할 수 있을 때까지만.”

“…….”

“최종 실험만 성공하면 된대. 백작이 후원하는 거니 당연히 첫 번째 수술 대상은 너고. 그러니까 조금만 더 버텨 봐. 넌 할 수 있을 거야. 너도 살고 싶잖아. 낫기만 하면 이 오라버니가 널 업고 왕국 어디든 돌아다닐 테니…….”

애런은 이후로도 캐롤라인의 옆에서 한참을 속닥거렸다. 이디나가 깰까 목소리를 줄인 채.

* * *

결혼이 끝났다.

조정 기간 동안 특별한 일이 없었기에 두 사람의 이혼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남으로 분리되었고 캐롤라인의 성은 결혼 전의 성인 웨즐로 되돌아갔다. 비교적 간단한 현물과 계좌는 빠르게 정리됐으며 나머지 위자료는 최대한 빠르게 정리해 캐롤라인 쪽에 넘겨주기로 했다.

프레져는 아내가 이혼을 재고해 주길 은근히 바랐으나 캐롤라인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생각을 바꾸기엔 그녀가 온전히 깨어 있는 시간이 너무도 짧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전처럼 발작을 일으킨 적은 없으나 몸이 약을 견디지 못하는 탓에 계속 잠만 잤다. 기력이 쇠해진 탓에 병실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이 소식을 들은 프레져는 초조한 마음으로 마리아 병원의 연락을 기다렸다. 실험이 완전히 성공한다면 가장 먼저 치료받을 이는 캐롤라인이기 때문이었다. 그게 후원의 조건이었다. 캐롤라인의 몸이 더욱 안 좋아지기 전에 빨리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레타에서는 아직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가장 중요한 최종 단계를 넘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걸 어떤 인간이 먼저 실험해 본답니까?”

한 공학자의 여과 없는 질문에 의사들이 모조리 입을 다물었다.

동물과 시체의 심장을 통해 수술 연습을 반복하긴 했으나 살아 있는 인간은 어떨지 몰랐다. 철저한 대비를 하더라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생하는 게 변수였으니.

게다가 산소 공급 기계는 여태껏 오작동을 반복하다 이제야 제대로 작동되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낫긴 했으나 마광석을 넣어도 쉽게 과열되는 단점은 고칠 수가 없었다.

이렇다 할 선례가 없으니 자원할 사람도 없는 게 당연했다. 이 실험을 주목하는 이들은 전부 돈깨나 있는 사람들일 텐데. 과연 어떤 이들이 나서서 먼저 받아 보겠다고 할까.

“같은 병을 앓는 아이들 중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에게 돈을 주고 인체 실험을 하자고 하면-.”

“인체 실험? 지금 제정신입니까? 어떻게 그런 끔찍한 말을 입에 올립니까!”

노발대발한 건 글랜포드에서 온 과학자였다.

“시체까지는 그렇다 쳤습니다. 어차피 죽은 사람이고, 결국 이게 산 사람들을 이롭게 만들 테니까요. 그런데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을 상대로 실험이라니……. 그런 끔찍한 일이 어딨답니까? 신께서 노하실 겁니다!”

글랜포드는 그레타에 비해 보수적인 나라였다. 종교에 의지하는 이들이 비율이 그레타보다 월등히 많기 때문이었다. 많은 신도들이 신이 주신 것에 함부로 칼을 대면 천벌을 받는다고 믿고 있었다.

물론 이는 현대에 와서 많이 누그러진 사상이었다. 특히나 과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자연히 종교와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그레타의 의학이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도 종교를 무시하고 시체에 칼을 댔기 때문이 아니던가.

“어차피 이 수술이 보급화되면 산 사람의 가슴을 가르는 일은 당연해질 겁니다.”

“치료의 목적과 실험의 목적은 다르지 않습니까. 돈 줄 테니 가슴과 심장을 내어 주라니, 온당치 못한 제안입니다.”

그럼에도 뼛속 깊이 새겨진 거부감은 좀처럼 사그라들지가 않았다.

“두 분 다 진정하세요.”

이를 중재하고 나선 이 실험의 최고 책임자인 니콜라이 헤이오스였다.

“산 사람에게 생체 실험을 권유하는 것도, 완성 직전의 실험을 보류하는 것도 둘 다 못 할 짓이니까요.”

틀린 부분이라곤 없는 말에 두 사람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니콜라이는 잘 소독된 용기에 담긴 마광석 부품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은 많은 양이 있다지만 이를 전부 써 버린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도 고려해야 했다.

“일단 우리 병원의 환자들을 대상으로 물어보기야 하겠지만…….”

안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니콜라이 헤이오스는 착잡한 마음으로 프레져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수술을 받아야 할 여자, 캐롤라인 웨즐에게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