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108)화 (108/156)

#108

“어서 오세요, 헌티드 백작.”

제럴드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얼굴로 프레져를 맞이했다. 그 자리엔 다른 손님도 함께였다.

“저, 전하, 다른 사람이 올 거라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내가 약속 시간을 잊고 있었나 보군요.”

제럴드의 능청에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이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얼마 전 헌티드하우스에 사직서를 낸 임원들이기 때문이었다. 각 분야에서 높은 자리를 맡았던 이들 세 명이 제럴드와 함께 있었다.

“익숙한 얼굴들이군요. 다들 오랜만입니다.”

“아, 예에…….”

프레져가 먼저 말을 거니 인사를 하긴 했지만 그들은 좀처럼 몸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그들은 뭐 마려운 개처럼 엉덩이를 들썩이며 제럴드가 축객령을 내려 주길 기다릴 뿐이었다.

“세 분께서는 이만 가 보셔도 좋습니다. 운영에 관한 이야기는 차후 다시 논의하시죠.”

“네.”

윗사람의 인사에 세 사람은 허둥지둥 자리를 떴다.

“참으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뼈가 있는 말이었다. 그동안 알현 신청을 거부한 것에 대한 지적과 함께 공식적인 알현 시간을 잊어버린 것을 꼬집는 것이었다.

“내가 요즘 일이 워낙 많아서 말입니다.”

그러나 제럴드는 프레져에게도 이전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사과하지 않았다.

“만나는 분이 많으신 것 같긴 하더군요.”

프레져는 조금 전 자리를 비킨 이들을 떠올리며 제럴드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약속 시간을 잊어버렸다는 핑계로 그들을 붙잡고 있던 이유야 뻔했다.

‘저들이 자신에게 붙었다는 것을 과시하려고.’

사실 제럴드는 머릿속으로 이것보다 더한 무례를 저지르고 있었다.

국왕이 오페라 극장을 위한 증축 허가를 내린 것이 일주일 전이었다.

국왕이 극장에 하사한 이름은 무려 루미아르, 말 그대로 글랜포드에 빛을 퍼트리라는 의미였다. 뿐만 아니라 건물 증축이 끝나면 공식적으로 왕립 극단의 출범을 허락하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비록 안젤라 골드를 데려오진 못했지만 헌티드하우스 출신 직원들을 끌어왔으니 반은 성공했다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안젤라 골드가 헌티드하우스를 떠난다는 게 가장 큰 횡재였다. 어찌 됐든 글랜포드의 예술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그녀였으니.

그러나 엊그제 나온 기사로 인해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보아하니 백작도 요즘 바쁜 것 같던데. 왕성까지 찾아올 여유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분명 극단과 백작가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대체 언제 심장 수술 연구에 지원까지 한 걸까.

덕분에 왕성에 새로 짓고 있는 건물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저 아래로 묻혀 버렸다. 게다가 갖은 애를 써 망쳐 두었던 프레져의 평판 역시 다시 회복되고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장기를 고치는 일이니 당연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손상된 장기를 고치는 건 먼 옛날의 신관들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으니.

“전하께서 벌이신 일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게 사실입니다.”

“……내가 벌인 일이라니,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입니까?”

모른 척 오리발을 내미는 제럴드에 프레져는 작게 조소했다. 그는 제럴드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재킷 주머니 안에서 물건 하나를 꺼냈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그의 손에 들린 물건은 표면에 검은 재가 묻은 다이아몬드였다. 재를 제대로 닦지 않아 엉망이었으나 흠집 하나 없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제럴드는 그것이 자신이 델에게 주었던 다이아몬드임을 빠르게 눈치챘다.

그 계집에게 넘겨줄 때만 해도 멀쩡했던 물건이 왜 저리 엉망이 되어 있는 건가.

“혹시나 해서 벽난로에 던져 봤는데, 역시 약한 불로는 어림도 없더군요. 전부 타 버리기는커녕 이리 흠집 하나 없고.”

“자네 지금…… 저걸 불에 태웠다는 말인가?”

“다이아몬드만 태웠겠습니까. 다른 보석도 다이아몬드만큼이나 견고할지 궁금해지더군요.”

“…….”

“돈은 종이라 그런지 활활 잘 타고.”

그 말을 통해 제럴드는 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자신이 보낸 수족들이 델의 그림자 하나 발견할 수 없던 이유도.

‘어쩐지 기차역 근처에 보이지도 않더라니.’

도망치는 길에 조용히 처리하려 했는데.

제럴드는 놀란 속내를 숨기곤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부러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백작, 정말 광증이라도 앓는 겁니까? 어찌 보석을 태우는 그런 이상한 짓을…….”

“너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

“이 보석의 주인은 누구인지, 누구이길래 이걸 볼 때마다 화가 나는지 모르겠단 말입니다. 기사처럼 정말 광증에라도 걸린 게 아닌지 요즘 걱정입니다.”

프레져가 다이아몬드 표면을 손으로 매만지며 웃었다. 반짝이는 보석을 담은 눈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어 제럴드는 저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그것 외에도 궁금한 게 정말 많습니다.”

“…….”

“내게 그토록 관심이 많은 이가 누구인지, 그 인간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지, 또…….”

프레져는 접은 손수건 위에 다이아몬드를 내려 두며 씨익 웃었다.

“다이아몬드도 불에 타는데……그 인간은 과연 불 속에서 얼마나 버틸까 하는 생각?”

“백작!”

살벌한 말에 제럴드가 테이블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제가 또 실언했나 보군요. 정말 광증은 아닌지 조만간 병원에 가 봐야겠습니다.”

프레져의 농담에 제럴드는 웃을 수도, 화를 낼 수도 없었다. 평소와 다른 눈빛이 프레져의 말을 진심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저 보석을 어떻게 다루든 그건 프레져의 맘이었다. 왕족이 하사한 물건을 함부로 다룬 죄를 물으려면 저 보석의 원래 주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밝혀야 했다.

“……상태가 정말 이상하군.”

결국 제럴드는 프레져에게 말을 가려 하라는 경고를 내린 뒤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언론이 보도한 대로 프레져가 미쳤다면 달리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사실 제 상태가 이상하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습니다. 남들 보기에만 멀쩡하고 일만 잘하면 작은 흠이 될지언정 문제가 되진 않겠죠.”

“…….”

“그러나 왕실은 다르지 않겠습니까? 애초에 모든 것이 완벽한 자가 아니면 왕위의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는 자린데.”

“지금 내가 광증이라도 걸렸다는 겁니까?”

덜컥 목소리를 높이는 제럴드에 프레져는 대답 대신 다이아몬드를 내밀었다.

“전하께서는 권위가 없지 않으십니까.”

“뭐?”

“그러니 그 하녀에게 넘겨준 것이 기껏해야 보석 몇 개가 전부인 것이겠지요.”

정곡을 찌르는 말에 제럴드는 자신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부정도 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왕족들은 아랫사람과 거래를 할 때 돈을 포함한 다른 것을 약조했다. 귀족의 수양딸 자리나 왕성에 있는 직책 중 하나, 그것도 아니면 좋은 혼사 자리 같은.

그러나 제럴드는 델에게 그중 무엇도 약속하지 못했다. 막상 담이 그렇게 큰 편도 아니라서 왕성의 시녀 자리를 주겠다는 허언도 하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왕족이기에 나오는 재산을 마음대로 쓰는 것이 전부였다.

“왕실은 이 나라의 꼭대기에 있다는데……. 그런 왕실이 무엇이 무서워 한낱 귀족을 깎아내리는 데 사력을 다한답니까? 참 초라하고 우습지 않습니까?”

“감히 왕실을 조롱하는 겁니까!”

“그 말이 조롱인지 아닌지는 따져 보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조롱이 아니라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지금 내가 백작의 사람을 매수라도 했다는 겁니까? 나는 맹세코 그런 일은 한 적이 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억측은 마십시오!”

“그러게나 말입니다. 저도 한 나라의 왕자씩이나 되시는 분이 일개 귀족 하나를 난처하게 하려 이런 수고를 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프레져는 얼굴이 벌게진 제럴드를 보며 그저 웃었다. 왕실을 조롱하지 말라는 말은 사실을 인정하는 말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런 일을 벌이지 않았다면 조롱거리가 될 일은 없을 테니.

제럴드도 이를 모르진 않는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이 이상의 말실수를 용납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프레져는 이전보다 더욱 목소리를 낮춘 뒤 입을 열었다.

“전하, 저는 전하가 두렵지 않습니다. 두려움은 상대의 몸집이 자신보다 거대할 때 느끼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평범한 남자보다 훨씬 거대한 프레져의 그림자가 제럴드의 얼굴을 가렸다.

“겁을 먹기엔 전하께서 구상 중인 것들이 영…… 별 볼일 없어서.”

프레져는 보란 듯이 테이블 위에 있는 무대 설계도를 보며 웃었다.

음악을 고려하지 않은, 오직 가수만을 주목하기 위한 무대 구조.

이 엉망인 무대는 분명 오페라 가수들에게만 관심을 집중하려는 제럴드의 의견이 일방적으로 작용된 것일 터였다.

수많은 전문가들을 모아 두고도 제럴드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안젤라 골드가 여명을 부르는 사람이라면, 그 여명을 만들어 낸 사람은 헌티드하우스의 모든 이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혼자만의 생각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했던 것은 과거 프레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알았다. 혼자만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혼자서 잘할 수 있다 호언장담하는 사람치고 제대로 된 놈은 한 명도 없다는 것을.

남들 눈에도 자신이 저리 어리석게 보였을까 생각하니 새삼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지금은 자기반성을 할 때가 아니었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시간 낭비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겠더군요.”

“…….”

“죄 없는 내 아내를 이용한 대가는 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프레져는 제럴드 쪽으로 기울였던 허리를 곧추세우며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는 언론을 참 좋아하셨지요. 친한 사촌을 신문사 임원으로 올리고 중요한 일은 전부 신문을 통해 알릴 만큼.”

“…….”

“전하께서 무엇을 하든 저는 관심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저와 같을지는 모르겠군요.”

글랜포드에서 가장 높고 고결하다는 왕실. 그 왕실이 고작 귀족 하나를 끌어내리기 위해 시한부 환자의 개인 사정까지 캐냈다는 게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사실이 어떻든 그닥 중요하지 않다는 거,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사실 관계를 확인하는 건 이후의 일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자극적인 헤드라인에 흔들리기 마련이었으니. 그리고 지금까지 그 피해자는 프레져와 캐롤라인이었다.

“받은 건 돌려드리겠습니다.”

프레져는 손수건으로 감싼 다이아몬드를 제럴드의 찻잔 옆으로 밀었다.

“받은 것뿐만이 아니라 전부 그 이상으로 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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