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프레져가 보낸 이혼장은 변호사를 통해 캐롤라인에게 도착했다. 경호원을 주렁주렁 매달고 온 변호사는 그들을 모두 자리에서 물린 뒤 캐롤라인과 독대했다.
“마샤 엘리엇, 스테파니 아든, 에릭 포스터. 대표님께서 세 사람의 계좌로 입금하신 사례금입니다.”
캐롤라인이 프레져에게 했던 유일한 부탁이었다.
“그리고 신문에 마님의 사생활이 노출된 것에 대해서도 사과하셨습니다. 법적으로 남이 되시면 앞으로 헌티드와 관련된 일에 기사가 오르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혼 직후에는 조금 논란이 될 테지만요.”
“프레져는 괜찮나요? 반박 기사를 보긴 했는데…… 상황이 여전히 좋지 않은 것 같아서요.”
“대표님이 돌아오신 이후 극단 분위기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내부 기밀을 폭로한 이도 잡아냈으니 이제 염려 마십쇼.”
“그렇담 다행이네요. 프레져한테도 꼭 고맙다고 전해 주세요.”
변호사는 캐롤라인에게 프레져가 작성한 이혼 서류를 내밀었다. 프레져의 칸엔 이미 도장이 찍혀 있었고 캐롤라인의 서명 칸만 비어 있었다.
“백작님께서 보내신 이혼 서류입니다. 읽어 보신 뒤 서명만 해 주시면 백작님께서 전부 처리하겠다 하셨습니다.”
“네.”
캐롤라인은 이혼 서류를 꼼꼼히 읽었다. 몸이 더 안 좋아져 눈이 침침해진 탓에 몇 번이나 눈을 비벼야 했다.
눈이 건조해서 글자가 잘못 보인 건가, 캐롤라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뗐다.
“위자료로는 프레져 헌티드의 개인 자산의 절반을 지급한다……. 이거 제가 맞게 본 건가요?”
“네, 맞습니다. 대대로 헌티드 가문에 종속되어지는 재산은 분할이 어려워 일단은 계좌와 현물, 부동산을 포함한 백작님의 개인 자산이 위자료로 지급될 예정입니다. 마님 앞으로 되어 있던 기존의 재산에 변동은 없을 겁니다.”
“말도 안 되는 금액이에요. 요즘 극단 사정도 안 좋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큰 금액을 받을 수는 없어요.”
“헌티드 가의 자금줄은 극단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가장 큰 줄기가 오페라이긴 하지만 이 역시 백작님께서 잘 수습 중이시니 염려 마십쇼.”
“그렇다고 해도요.”
“보상할 순 없겠지만, 마님의 외로움에 대한 값이니 받아 주셨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
“마님께서 혼자 계실 동안 백작님께서 미친 듯이 긁어모은 건 명예와 부뿐이었으니 마님께서 가져가는 게 맞는 거라 하셨습니다.”
변호사가 프레져가 함께 보낸 쪽지를 읽으며 말했다.
“정 내키지 않으시면 사과금이라고 여기라 말씀하셨습니다. 백작님의 관리 부실로 인해 마님의 사생활이 신문에 올랐으니까요.”
“…….”
“언론에 이용까지도 되었고요.”
“…….”
“그리고 먼저 이혼 서류를 보내 미안하다는 말도 함께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별걸 다…….”
프레져는 꼭 말을 처음 배운 어린아이 같았다. 가장 인상 깊게 들은 말 한 가지만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서명만 하면 끝이라는 거죠?”
“네.”
그토록 고통스럽던 관계가 이 종이 몇 장으로 끝난다는 게 허탈하면서도, 프레져가 이룬 것을 자신이 고스란히 받는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왕실 법원에 제출하면 한 달 동안 조정 기간입니다. 그 시간만 무탈히 지나면 완전히 이혼이 성립되고요.”
캐롤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가장 크게 느껴지는 감정은 속 시원함이었다. 사지를 붙들고 있던 거미줄을 잘라 낸 기분이었다.
“그럼 찬찬히 생각해 보시고 확신이 섰을 때 말씀해 주십쇼.”
“알겠어요.”
일을 마친 변호사는 예정보다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혼장을 핑계로 한 일주일 지켜보라고 하셨는데.’
경호원을 줄줄이 매달고 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전부 캐롤라인의 안위를 걱정한 프레져의 작품이었다. 변호사 체셜이 자리를 비우면 앞으로 경호원들이 캐롤라인 근처를 지킬 예정이었다.
“꼼꼼히 다시 읽어 보고 이틀 안으로 연락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결정이 생각보다 빨리 내려질 것 같아 걱정이었다.
그는 병실 앞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들에게 티 나지 않도록 캐롤라인을 지키라는 지시를 내린 뒤 자리를 떴다.
* * *
변호사가 노르티움으로 출발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이었다.
“각하, 웨즐 남작님과 대부인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급히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
허겁지겁 집무실로 뛰어 들어온 에드먼드에 프레져는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저택 본관 밖으로 뛰쳐나가자 애런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리고 있는 이디나가 보였다. 두 사람 모두 몹시 피곤한 기색이었다.
“어머님.”
프레져의 부름에 이디나의 퀭한 눈에 초점이 생겼다. 이디나의 고개가 프레져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돌아갔다.
“백작님.”
그와 동시에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던 지팡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디나는 애런의 부축도 마다한 채 프레져를 향해 뛰어왔다. 프레져가 다급히 그녀를 붙들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고꾸라졌을 터였다.
“괜찮으십니까?”
프레져가 제 팔을 붙든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주먹을 꽉 말아 쥔 이디나의 손엔 흉터와 굳은살이 잔뜩이었다.
“에드먼드, 어서 두 분이 머물 방을-.”
“백작님, 우리 애 어디 있습니까?”
“…….”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 오는 이디나에 프레져는 말을 잇지 못했다. 프레져는 이전에 봤을 때보다 탁해진 이디나의 눈동자를 바라보다 겨우 입을 뗐다.
“……날이 찹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시죠.”
“아니요. 한가하게 차나 마시자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닙니다. 지금 당장 대답해 주세요.”
이디나는 외투 주머니에서 네모반듯하게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캐롤라인의 이야기가 실린 신문을 찢어 놓은 것이었다. 얼마나 읽었는지 얇은 종이가 너덜너덜했다.
“옆집 사는 사람이 그러더군요. 여기에 캐롤라인이 시한부라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고요.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캐롤라인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탓에 이디나는 손으로 종이를 아무 데나 짚으며 말했다. 굳이 이 기사가 아니더라도 캐롤라인이 보낸 편지를 통해 알게 됐을 터였겠지만.
“백작님은 분명 그때 말하셨지요. 감기라고 하셨지요.”
“…….”
“금방 괜찮아질 거라고요.”
이디나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캐롤라인의 이름이 쓰여진 신문 조각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내게 거짓말을 하신 건가요? 아니면 정말 모르셨나요?”
“…….”
“나는 앞이 잘 안 보여서 대답해 주지 않으면 모릅니다. 그러니 계속 입 다물고 있지 말고 똑바로 말해 주세요.”
“……죄송합니다.”
“사과 말고 제대로 된 대답을 해 달라고요!”
울분을 이기지 못한 이디나가 팔을 휘둘렀다. 막무가내로 휘두른 손이 프레져의 얼굴을 치고 지나갔다. 자리의 모든 이들이 놀랐지만 프레져와 이디나만은 아니었다.
프레져는 맞은 뺨을 감싸 쥐지도 못한 채 입을 열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어진 대답에 덜덜 떨리던 이디나의 몸이 떨림을 멈췄다. 구겨진 신문 조각이 이디나의 손아귀를 빠져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떻게,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어요? 애가 그 지경이라는데?”
“…….”
“나는 앞이 안 보인다지만, 백작님은 아니잖아요. 두 눈 멀쩡하잖아요. 매일매일 그 애 얼굴을 봤을 거 아니에요.”
“……정말 죄송합니다. 면목 없습니다.”
“노르티움에 혼자 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래야 했는데.”
이디나가 주먹으로 제 가슴을 두드렸다. 꽃다운 나이에 죽게 될 제 딸이 불쌍해서, 그리고 아내의 병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남편이 미워서.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다행이라고. 행복해 보인다고.”
아무리 가슴을 내리쳐도 명치께에 꽉 들어찬 응어리는 쉽게 내려가지 않았다.
“어머니, 그러다 병나요. 그만하세요.”
애런이 나선 뒤에야 이디나는 가슴을 두드리던 것을 멈췄다. 그녀는 미워 죽을 것 같은 얼굴로 프레져를 노려보다가, 상대가 대귀족이라는 사실에 멈칫하다가,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는 프레져가 괘씸해 다시 눈을 치켜떴다.
“애런, 가자.”
저런 썩을 놈을 원망하는 건 나중에 해도 괜찮았다. 한시라도 빨리 딸의 얼굴을 봐야 했다.
애런이 이디나를 다시 마차에 태우려 하자 프레져가 다급히 모자를 붙잡았다.
“곧 해가 질 겁니다. 쉬시고 내일-.”
“아니요. 여기 더 있을 이유 없습니다.”
이번에 입을 연 건 애런이었다. 그는 마차 문을 닫은 뒤 그 앞을 막듯이 섰다.
“우리가 이곳까지 온 이유는 하나입니다.”
“…….”
“아내가 아픈지도 몰랐을 뿐더러…… 도망치게 만들었던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확인하러 온 겁니다.”
“…….”
“그 착한 애는 끝까지 당신을 두둔하려 나설 테니까.”
허탈하게 숨을 뱉은 애런은 거대한 저택과 수많은 사용인들을, 마지막으론 죄인처럼 서 있는 프레져를 주욱 둘러보았다.
“근데 부정도 안 하시는군요. 충분히 알겠습니다.”
애런은 인사도 없이 몸을 돌려 마차에 올라탔다. 문을 닫기 전, 애런은 캐롤라인과 꼭 닮은 눈으로 프레져를 향해 한마디를 뱉었다.
“그때 캐롤라인을 보내지 말 걸 그랬습니다.”
그게 끝이었다. 프레져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달려 나가는 마차를 붙잡지 못했다.
* * *
애런과 이디나는 머지않아 노르티움에 도착했다. 출발 전에 보낸 편지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탓에 캐롤라인은 가족의 방문을 알지 못했다.
자신을 찾는 이들이 왔다는 간호사의 말에 캐롤라인은 허겁지겁 병원 입구로 내려갔다.
로비를 지나 건물 밖으로 나가자 이디나의 부츠 끈을 묶어 주고 있는 애런이 보였다. 두 사람 다 짐이 한가득이었다.
“엄마, 애런!”
“캐롤라인!”
“어떻게 여기까지, 신발 가게는 어쩌고…….”
“캐롤라인 웨즐, 너 지금 그런 거 따질 때야?”
애런이 숙였던 몸을 벌떡 일으키며 말했다. 애런은 환자복을 입은 여동생을 훑어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바보 같아 가지곤.”
애런은 성큼성큼 걸어가 캐롤라인을 와락 끌어안았다.
애런과는 한 번도 나눠 본 적 없는 포옹에 당황한 것도 잠시, 캐롤라인은 손을 올려 애런의 등을 껴안았다. 어느새 훌쩍 커 버린 오라비의 듬직한 품이, 그의 옷자락에 배인 가죽 향이 너무도 편안했다.
꼭 행복하던 과거로 돌아간 것 같아서. 이디나까지 합세해 껴안아 주자 절대 무너지지 않는 방공호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아픈 걸 나랑 어머니한테 숨겨? 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미안…….”
“어떻게 그런 걸 신문으로 알게 해? 어?”
“거짓말해서 미안해. 너무 무서워서 어쩔 수가 없었어.”
“그래도 그렇지……!”
아이를 꾸중하는 것처럼 컸던 애런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어느새 애런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할 정도로 울먹이기 시작했다. 눈시울이 붉어진 건 이디나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캐롤라인마저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진짜 너무 미안한데, 난 그때로 돌아간대도 말 못 할 거야. 절대로 말 못 해.”
“그래도 말해야지. 혼자 아프면 가슴앓이하는 건 넌데.”
병원 앞에서 세 사람은 서로를 껴안고 펑펑 울었다. 이디나가 춥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하루 종일 그대로 서 있을 기세였다.
캐롤라인은 코를 훌쩍이는 애런과 이디나를 데리고 병실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