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젠장.”
싹 갈아엎어야겠다 생각하다가도, 결국 근본적인 잘못은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이혼…….”
프레져는 제게 이혼을 말하던 캐롤라인을 떠올렸다.
이안 헌티드를 비롯한 꼬장꼬장한 가신들. 그리고 그 가신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았을 자신.
병마를 딛고 살아난 캐롤라인을 다시 산지옥이나 다름없는 곳에 데려올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의 뜻대로 하는 게 맞았다.
프레져는 지친 몸을 이끌어 집무실로 향했다. 그러곤 에드먼드를 불렀다.
“가서 변호사를 데려와라.”
아쉽긴 했지만 안도감이 컸다. 헌티드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면 그녀의 이름이 세간에 돌아다닐 일 따윈 없을 테니까.
그녀가 나비라면 가장 아름다운 봄을 만들어 주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일 테니.
변호사에게 연통을 넣은 에드먼드는 가주에게 가장 먼저 전해야 할 말을 일렀다.
“밀고자를 잡았습니다.”
에드먼드의 지시에 위병들이 델을 끌고 왔다. 어깨를 힘주어 누르자 델이 프레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2왕자 전하께 밀고를 한 대가로 뇌물을 받은 하녀입니다.”
프레져는 에드먼드를 제외한 다른 이들을 집무실에서 내보냈다. 방 안엔 프레져와 에드먼드, 첩자만이 남았다.
“너는……?”
델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던 프레져는 뒤늦게 그녀가 캐롤라인의 전속 하녀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러자 기가 찼다.
“사표도 내지 않고 도망치려는 것이 수상해 잡아 두었습니다.”
“2왕자에게 무얼 얘기했지?”
델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파들파들 몸을 떨었다. 그녀 옆으로 현금과 보석이 잔뜩 든 짐가방이 묵직하게 떨어졌다.
“은행을 이용하면 기록이 남으니 현물로 받은 모양입니다. 오늘 새벽 저택으로 들어오다 발각됐습니다.”
2왕자가 거래값을 준다고 한 것이 하필 오늘이었다. 기사가 나오기 직전까지 델을 불러 이것저것 물어본 탓이었다.
‘너와의 거래는 이게 마지막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도망가라. 알겠느냐?’
제럴드가 돈이 든 가방을 던져 주면 했던 말이었다. 왕실이 백작가의 사용인을 매수했다는 사실이 들키면 득이 될 게 없었다.
“내게 사실을 고하나 고하지 않나 달라지는 건 없다. 너는 이 저택을 빠져나감과 동시에 2왕자의 손에 죽을 테니까.”
가진 게 없는 이가 왕족과 거래를 한다는 것은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제럴드 같은 놈이 제 비밀을 아는 이를, 게다가 이렇게 큰돈을 쥐여 줘 놓고 살려 둘 리가 없었다.
“너는 이 세상에 무서울 게 없는 모양이구나.”
덤덤히 말한 진실에도 델은 떨고만 있을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프레져는 그녀의 시선이 돈 가방에 향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얘기할 생각이 없나 보군. 어쩔 수 없지.”
프레져는 델을 매질하는 대신 그녀의 돈 가방을 열었다.
“현금부터 시작해 볼까? 종이라서 활활 잘도 타겠군.”
프레져는 돈뭉치 하나를 집어 벽난로 안에 던졌다. 불이 잘 붙도록 부지깽이까지 쓰는 모습에 델의 눈이 커다래졌다.
“설마 이 정도 각오도 하지 않은 건 아니겠지?”
돈에 눈먼 이에게 목숨이나 가족을 가지고 협박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프레져는 현금의 절반을 벽난로에 털어 넣었다.
“역시. 돈만큼 잘 타는 건 없군.”
델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자비 없이 구는 프레져 탓에 벌써 돈 가방의 반절이 비어 있었다.
프레져는 아직도 입을 열지 않는 델을 보다 가방에서 알이 굵은 다이아몬드를 꺼냈다.
“그거 아나? 다이아몬드는 불에 타면 형체도 없이 사라진다는 거?”
“배, 백작님!”
“아주 센 불에 태워야 한다는데. 과연 벽난로 불에도 탈지 궁금해지는군.”
그 말에 델이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다이아몬드는 이미 프레져의 손을 떠난 뒤였다.
“오늘 실험 한번 해 보자고.”
지폐를 불쏘시개 삼아 타오른 활활 타오른 불이 보석을 삼켰다. 이에 델은 눈을 까뒤집은 채 프레져의 바짓단을 잡고 매달렸다.
“제, 제발 그러지 마세요!”
“어쩌나? 이미 늦었는데.”
프레져는 가방을 뒤져 다이아몬드가 여럿 든 주머니를 꺼내 델의 얼굴 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목숨은 안 아깝지만 돈은 아깝나?”
“전부 말씀드릴게요. 전부 다 말씀드릴 테니 제발…….”
“늦었다니까.”
“…….”
“그래도 걱정은 마라. 그 별볼일 없는 목숨만큼은 살려줄테니.”
프레져는 어느새 가벼워진 돈 가방을 들고 벽난로 앞까지 걸어갔다. 이를 전부 태워 버리기 위함이었다.
“아악! 죄송해요. 죄송해요, 백작님! 다, 다 말할게요! 그러니 남은 것만은…….”
프레져는 발을 털어 제 바짓단을 붙잡은 델을 쳐냈다.
“지금 나랑 거래라도 하자는 건가?”
“그게 아니라…… 으흑.”
그는 델의 바로 옆에 남은 보석을 내려놓았다. 실성한 사람처럼 울던 델은 그제야 약간 정신을 차렸다.
“두 배.”
“……네?”
“제럴드 험프리가 준 것의 두 배를 주지. 뿐만 아니라 무사히 수도를 빠져나갈 길도 마련해 주겠다.”
난데없이 델과 거래를 시도하는 프레져에 에드먼드의 눈에 의문이 들어찼다. 저 죄인을 살려 주는 것도 모자라 그 많은 돈을 약속하다니.
“제게서 무, 무엇을 원하십니까?”
난데없이 조건을 내거는 프레져를 의심하면서도 델은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이에 프레져는 코웃음을 쳤다. 잇속에 밝을 줄은 알았어도 이렇게 맹랑할 줄은 몰랐는데.
감히 내게 조건을 붙이는 건가? 남은 보석이라도 건지려면 방법이 없을 텐데?
꿀꺽, 델이 마른침을 삼켰다. 이내 제 처지를 깨닫곤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 그것만 하면 정말 이 돈의 두 배를 주시는 거죠?”
“그래. 넓은 아량으로 널 용서까지 해 주지. 대신에 중간에 다시 배신한다면 네 목숨은 나도 보장하지 못한다.”
“아, 알겠습니다. 약속 꼬, 꼭 지키겠습니다.”
프레져는 밖에서 대기 중이던 사용인들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
“저 하녀는 지하실에 가둬라. 식사도 내 허락이 있을 때만 가능하고, 에드먼드를 제외하곤 그 누구도 접촉을 금한다. 알겠나?”
“네.”
제럴드에게 넘어간 하인이 남몰래 델에게 접근할지도 모르니 최대한 접촉을 차단하는 게 옳았다. 이 저택에 숨은 귀는 하나가 아닐 테니까.
“정말 거래를 할 생각이십니까?”
그런 프레져 걱정이 되는 듯 에드먼드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럴 리가. 내가 그리 아량 넓은 놈으로 보이나?”
돈 한 푼도 주지 않고 빈털터리로 쫓아낼 생각이었다. 그렇게 놔두면 분개한 제럴드 놈이 알아서 처리하겠지. 굳이 제 손으로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다.
이에 에드먼드는 안도한 얼굴이 되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일어난 일에 프레져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럼 쉬십시오.”
“아니다. 옷만 갈아입고 바로 밀린 보고부터 듣지.”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다 내가 자초한 일이지 않나.”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에드먼드는 조용히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프레져는 집무실 옆에 달린 방으로 가 간단히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머지않아 에드먼드와 조앤이 그동안의 일을 요약해 전하기 시작했다.
“각하, 체셜 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변호사의 도착을 알리는 목소리에 프레져는 에드먼드와 조앤을 물렸다.
프레져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변호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혼을 하려고 하네.”
* * *
“이게 그 마광석이라는 거군요!”
“이쪽은 카프지트에서 오신 마도공학자들입니다. 차례로…….”
프레져가 고용한 통역사가 마도공학자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마도공학과 일반 과학, 의술을 결합하는 연구가 있다는 패트릭의 말에 곧장 그레타행을 결정한 것이었다.
마광석을 손에 쥔 공학자의 눈이 번쩍 빛났다. 오래전 고갈됐다는 천연 자원인 마광석의 등장에 마리아 병원의 연구실은 말 그대로 발칵 뒤집혔다.
이를 보내온 사람이 글랜포드의 헌티드 백작이란 소식엔 더더욱.
그만큼 마광석에 대한 그들의 연구열은 뜨거웠다.
“헌티드 백작은 대체 무얼 하는 사람이길래 마광석까지 가지고 있답니까?”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더불어 그가 왜 심장 수술에 관심을 갖는지 모르겠다는 의문도 함께였다.
“헌티드 백작 부인이 심장병을 앓고 있대요. 시한부라지 아마?”
그 의문에 대한 답은 클리브가 아닌 다른 의사에게서 나왔다. 글랜포드를 발칵 뒤집어 놓은 소식이 그레타까지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레타까지 전해지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지만.
“백작 부인이 지금 노르티움에서 치료받고 있대요.”
“노르티움이라면 우리 병원과 협진을 맺은 곳 아니에요?”
실험실 안 의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클리브에게 향했다. 이들 중 노르티움 병원에서 일했던 이는 클리브가 유일했기 때문이었다.
“헤이오스 선생님, 신문에 실린 이야기가 전부 사실이에요?”
“헤이오스는 여기에도 있네만.”
“아, 원장님 말고 클리브 선생님이요.”
자연스레 대화에 끼어드는 니콜라이에 질문을 한 의사가 손을 내저었다.
“헌티드 백작 쪽에서 기사를 내지 않았습니까. 부인이 아프고 자신이 이를 몰랐던 건 사실이지만, 나머지는 다 거짓이라고요.”
클리브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주먹을 세게 말아 쥔 탓에 손에 쥔 편지가 구겨져 갔다. 며칠 전 캐롤라인에게서 온 편지였다.
「저는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아이들도 마찬가지고요. 선생님께 편지가 왔다니까 답장을 쓰겠다고 서로 난리던 거 있죠?」
‘잘 지내고 있다더니.’
자신이 아는 캐롤라인은 아주 잘 지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유머도 알고 맨손으로 개구리도 잡을 줄 아는, 온실의 화초에 불과한 귀족 자제들보다 훨씬 용감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프레져의 곁에만 있으면 거짓말을 한다. 그 거짓말이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서라는 것이 클리브는 더 속이 쓰렸다.
‘남편이란 인간은 왜 캐롤라인을 괴롭게만 만드는 거지?’
아내를 치료를 하겠다며 연구 지원을 하는 것이 프레져가 하는 일의 전부였다. 그는 캐롤라인의 사생활조차 제대로 지켜 주지 못했다.
“남의 일이니 저도 모르는 게 당연하지. 이쯤 하고 새로 오신 분들께 연구실부터 소개시켜 드리는 게 어떻소?”
클리브를 대신해 니콜라이가 자연스레 화두를 돌렸다. 클리브는 자신을 힐끔거리는 아버지의 시선을 외면하며 새로 온 사람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백작 부부의 이혼 소식이 들려온 건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흐른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