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103)화 (103/156)

#103

이 역시 전부 제럴드의 계략이었다.

왕국의 그 많은 신문사들은 모르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단지 함구하고 있었을 뿐. 기상 악화라는 좋은 핑곗거리를 앞세워 제럴드가 전해 준 특종을 터트릴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번엔 백작 부인의 도주와 함께 헌티드 백작이 순회공연을 연 이유까지 함께였다.

그 기사가 왕국 전역에 퍼졌을 때, 프레져는 기차역에서 연착된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도가 코앞이었다. 무언가 해 볼 새도 없이 일어난 소동에 프레져는 크게 분노했다.

“제럴드 험프리…….”

기차역에 있는 사람들이 시종 하나 데리고 나오지 않은 프레져를 힐끔거렸으나 프레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백작 부부의 사이가 소원하다는 것은 알 만한 이들은 전부 알고 있었다. 백작 부인의 투병 사실을 전혀 몰랐던 헌티드 백작은 뒤늦게 치료가 진행 중인 노르티움 종합 병원으로 향했으며…….」

캐롤라인이 받았을 충격이 가늠되지가 않았다. 가뜩이나 몸도 좋지 않은데 기사를 보고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빌이 있으니 기자들이 병원으로 들이닥치는 것은 막을 수 있겠지만 캐롤라인에게 피해가 갈 것은 막을 수 없을 터였다.

‘차라리 캐롤의 말대로 하는 게 나으려나.’

프레져는 이혼을 하고 싶다 말하던 캐롤라인을 떠올렸다.

그것만큼은 막고 싶었으나 이보다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캐롤라인이 상처 입지 않을 방법은 제게서 멀어지는 것밖에 없었다.

백작 부인이 아니게 되면 그녀는 이 지긋지긋한 구설수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이전처럼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겠지.’

발을 만지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말하던 시골 소녀 캐롤라인 웨즐처럼.

댕-댕-댕-.

때마침 기차가 들어옴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표정을 달리한 프레져는 비장한 표정으로 기차에 올라탔다.

수도 휴링턴 역에서 내렸을 땐 휴고가 보낸 마차가 역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프레져는 곧장 헌티드하우스로 향했다.

“대, 대표님!”

그를 본 직원들이 귀신이라도 본 듯 하나같이 소스라쳤다. 프레져가 돌아올 것을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비켜.”

프레져의 명령에 회의실 앞을 지키고 있던 직원이 황급히 자리를 비켰다. 회의실 문이 굳게 닫혀 있는 걸 보니 회의가 진행 중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분위기는 프레져가 있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회의실 안의 소란이 꽉 닫힌 문을 넘어 복도에까지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이에 프레져는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 기회에 왕립 극단에 편승해야 한다니까요!”

“아직 왕실 쪽에서 아무런 말이 없는데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이건 다 부대표의 일처리가 엉망이어섭니다. 자질이 되지도 않는 사람이 임시 대표를 맡고 있으니…….”

“지금이 직책을 운운할 때입니까?”

“대, 대표님이 어째서 여기…….”

프레져가 온 줄도 모르고 소리치던 임원들은 뒤늦게 프레져의 등장을 알아차렸다. 물을 끼얹기라도 한 듯 방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돌아온 것뿐입니다.”

프레져는 회의실 가장 상석에 앉아 임원들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가 돌아온 것만으로도 분위기는 어느 정도 소강되었으나 빈자리가 여럿이었다. 왕립 극단과 헌티드하우스를 저울질하다 전자에 붙은 모양이었다.

물론 프레져는 이들을 책망할 입장이 되지 못했다. 원인 제공을 한 사람은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프레져는 가장 먼저 전해야 할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동안 모습을 보이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더불어 대표로서 무책임한 행동을 보인 것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프레져에 임원들은 물론이거니와 로겐까지 당황했다.

프레져 헌티드가 부하들에게 고개를 숙여?

그 프레져 헌티드가?

갑작스런 사과에 벙쪄 있던 것도 잠시, 임원들은 다시금 목청을 높였다.

“마, 마침 잘 오셨습니다! 이젠 드디어 설명을 들을 수 있겠군요.”

“대체 여태껏 무얼 하시다 이제 돌아오신 겁니까?”

임원들의 날카로운 질문이 프레져를 향했다. 조금 전만 해도 왕립 극단에 붙어야 한다는 둥, 로겐을 잘못이라는 둥 입을 놀리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떼어 내는 건 사태가 수습된 후에도 늦지 않았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기사와 제럴드를 확실히 처리하는 것이었다.

“아내를 만나고 왔습니다.”

“그럼 신문에 실린 게 전부…… 사실이란 말입니까?”

기사를 부정하지 않는 프레져에 임원들은 경악했다. 프레져는 기사의 일부분을 시인함과 함께 상당한 부분이 날조되었다는 말을 전했다.

예를 들어 자신의 몽유병이나 캐롤라인의 도주가 모두 거짓이라는.

전자는 사실이 아니니 당연히 부정해야 했고, 후자는 캐롤라인의 입지를 위해서였다.

“회의 시작한 지 얼마나 됐지?”

“세 시간 정도 됐습니다.”

“다들 피곤하겠군.”

프레져의 말에 로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세를 고쳐 앉은 뒤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임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일단은 지금 상황을 해결할 방법부터 찾도록 하죠. 궁금하신 사항 역시 이 일이 끝나는 대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다시 회의가 진행되었다.

* * *

캐롤라인은 병원에서 그 소식을 접했다. 평소처럼 아침 신문을 확인한 것이 화근이었다.

기사를 읽은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로우밸리에 있는 가족들이었다. 이 먼 북부에까지 퍼진 신문이라면 분명 로우밸리에도 소식이 닿았을 텐데.

“엄마, 애런…….”

이디나와 애런도 이를 봤을까?

몰려드는 절망에 캐롤라인은 고개를 숙였다. 마샤와 에릭이 그녀를 다독여 봤으나 역부족이었다.

“어차피 알려야 될 사실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알리고 싶진 않았어.”

적어도 제 입으로, 하다못해 프레져의 입을 빌려서라도 말하고 싶었는데.

이디나의 건강이 안 좋아질까 염려되어 미뤘던 것이 이런 결과를 낳을 줄은 몰랐다. 마음 같아선 당장 로우밸리로 향하고 싶었지만 몸 상태고 상황이고 여의찮았다.

“마샤, 펜이랑 종이 좀 줄래? 로우밸리에 편지를 써야겠어.”

“편지는 이따가 쓰시고 지금은 좀 쉬세요. 상태가 안 좋으세요.”

마샤가 덜덜 떨리는 캐롤라인의 손을 쥐며 말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파리했다.

“아니. 조금이라도 빨리 전해야 해.”

캐롤라인의 고집에 마샤는 베드 테이블을 펼쳤다. 종이와 펜을 꺼내 그 위에 올리자 캐롤라인이 빠른 속도로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손이 떨리는 탓에 필체가 엉망이었다.

“마님, 힘드시면 제가 대필을 해 드리겠습니다.”

“남의 글씨면 오해할 거야. 글도 못 쓸 정도로 아픈 줄 알겠지. 서체가 엉망이더라도 내가 직접 쓰는 게 나아.”

쓰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힘이 없어 펜을 오래 쥐지도 못했다. 캐롤라인은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현재 자신의 건강 상태를 정리해 쓴 뒤 편지를 봉했다. 이를 받아 든 마샤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우체국으로 향했다.

“이제 어떡하지.”

눈을 질끈 감자 어둠 속에서 몇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를 보고 슬퍼할 이디나와 애런, 먼저 세상을 떠난 제뉴라 그리고…….

“……프레져가 광증을 앓고 있다는 건 뭐야?”

“아마 날조된 걸 겁니다. 이 기사, 날조된 부분이 상당하니까요.”

“하지만 에릭이 알지 못하는 부분도 많잖아.”

두 사람은 백작저를 떠난 지 너무 오래된 탓에 프레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극단의 상황도, 2왕자와의 대치 상황도 몰랐다.

“믿을 소식이 따로 있죠. 백작님이 몽유병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그렇겠지?”

캐롤라인은 잠든 제 옆을 지키던 프레져를 떠올렸다. 그의 잠든 모습을 떠올리려 했지만 좀처럼 생각이 나지 않았다. 노르티움에 온 이후 프레져가 잠든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상했다면 티가 났겠지 분명.”

그러나 이를 답해 줄 사람은 이미 자리를 떠난 뒤였다.

* * *

임원 회의는 꼬박 4시간 만에 막을 내렸다.

회의는 평소보다 효율적으로 진행되었고 쓸데없는 싸움을 벌이는 이들도 없었다. 프레져의 지시와 적절한 논의하에 다들 깔끔하게 역할 분담을 하게 되었다.

프레져가 돌아왔다는 것만으로 안도하는 이도 있었으나 탐탁지 않아 하는 이들 역시 다수였다.

이번 일이 해결된 이후 가장 중요한 것은 프레져에게서 등을 돌린 직원들과 여론을 되돌리는 일이 될 터였다.

프레져는 회의록을 정리하고 있는 로겐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돌아올 거라 휴고가 말해 주지 않던가? 임원들은 전부 모르는 눈치던데.”

“……말해 줬습니다. 임원들에겐 제가 전달하지 않은 것뿐이고요.”

“어째서?”

“아는 것보단 모르고 있는 편이 더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표님께서도 극단 꼴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보셔야 할 것 같았고요.”

로겐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대표님 말이 맞더군요. 말씀하신 대로 오합지졸이었습니다.”

“…….”

“신분과 혈통 중심의 운영 체제가 얼마나 잘못됐는지 잘 알았습니다. 역사 속에서 그 많은 난(亂)이 일어난 이유도요.”

푹 한숨을 내쉰 로겐은 프레져의 얼굴을 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런 말씀은 하셔선 안 됐습니다.”

“…….”

“이리 쉬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체제를 만든 사람도, 아무런 지시도 없이 자리를 비우신 것도 대표님 아니십니까? 마님 때문에 속이 말이 아니실 건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건 정말…….”

“…….”

“아닙니다. 제가 또 주제를 모르고 기어올랐군요.”

로겐은 됐다는 듯 말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회의실 밖으로 나가려는 그를 멈춰 세운 건 프레져의 목소리였다. 목소리보다는 그 안에 담긴 뜻이 로겐을 움찔하게 만들었다.

“미안하다.”

그러나 로겐은 감동하지 않았다. 그는 문고리를 쥐고 있던 손을 놓고 프레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뭐가 미안하십니까?”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무례한 일이지만 로겐은 자제하지 않았다.

“오합지졸이라고 하신 게요, 아니면 제대로 된 연락 한 번 없으셨던 게요? 아니면 갑작스레 자리를 비우신 것에 대한 사과입니까? 그게 아니면 지금까지의 일들을 모두 뭉뚱그려 미안하다는 말로 퉁치시려는 겁니까?”

프레져가 저리 쉽게 사과하니 그동안 쌓여 왔던 설움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이 거지 같은 회사, 정 안 되면 사표 던진다.

……라고 마음먹으며 살았지만 막상 사표를 던질 때가 되면 순순히 몸이 움직이지가 않았다.

오래 몸담아 온 곳이기도 했지만, 부대표인 자신마저 빠지면 헌티드하우스의 중심이 흔들리기 때문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이 극단을 아끼고 사랑했다.

“대표님은 정말 악질이셨습니다. 이 헌티드하우스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변치 않을 것을 알아서 그리 행동하신 것 아닙니까!”

마치 캐롤라인에게 했던 것처럼. 그들의 애정과 신뢰, 복종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절대 없습니다. 나 하나 잘났다고 해서 잘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말을 쏟아 뱉은 로겐은 뒤늦게 숨을 골랐다. 씩씩, 숨을 내뱉자 열이 가라앉으며 이성적인 사고가 돌아왔다. 그러자 덜컥 겁이 났다.

‘지금 대표님한테 화낸 거야? 내가?’

슬금슬금 눈치를 봤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프레져는 기분 나빠하는 기색이 없었다.

‘뒤늦게 뉘우치기라도 하는 건지.’

노르티움에 다녀오더니 사람이 바뀌긴 한 모양이었다.

‘그럼 뭐 해.’

사람의 마음은 바위와는 달라서 아주 가벼운 바람에도 상처 입고 마는데.

“저 계속 대표님 밑에 있을 생각 없습니다. 이번 일만 처리되면 그만두든지 새 회사를 차리든지 하겠습니다.”

무거운 한숨을 내쉰 로겐은 회의실을 빠져나가기 위해 걸음을 돌렸다. 이번만큼은 프레져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다른 이유로 발이 묶이고야 말았다.

“대표님 왔다면서요? 어딨죠?”

안젤라가 회의실로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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