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백작님, 수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빨리 시청으로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가지.”
허겁지겁 찾아온 빌에 프레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캐롤라인과 휴고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더 이상 전화를 무시해서는 안 됐다.
─ 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전화를 건 사람은 휴고였다. 이제 막 오페라하우스에 도착했다는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수도의 상황을 전했다. 프레져와 헌티드하우스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을 이뤘으나 정작 프레져의 초점은 다른 곳에 맞춰져 있었다.
“캐롤라인의 이야기가 신문에 실렸다고?”
자신이 광증을 앓고 있다는 헛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캐롤라인이 아픈 것도 모자라 1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실이 신문에 실렸다는 게 프레져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어떤 개자식이…….”
이를 알게 되면 캐롤라인은 상처를 받을 게 분명했다. 자신이 시한부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됐는데 누가 속 편히 웃을 수 있겠나.
─ 출처는 왕실인 게 확실해 보입니다만, 다들 다른 일을 먼저 처리하느라 바빠 2왕자 쪽과는 연락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럴드 험프리.”
이를 꽉 깨문 탓에 턱에 힘줄이 불거졌다. 제까짓 게 설쳐 봤자 큰 위험이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한 게 오산이었다. 헌티드하우스를 밀어내겠다는 그의 욕심은 극단과 백작가를, 그리고 캐롤라인을 상처 입게 만들었다.
“기사가 난 지 벌써 3일째라며. 그런데 왜 내겐 아무런 연락이 없던 거지?”
─ 대표님께서 싫어하셨으니까요.
“…….”
─ 로겐 님도, 에드먼드한테도. 연락하지 마라 신신당부하지 않으셨습니까. 전화를 건다 한들 받으실 거란 보장도 없고요.
사실 이들이 침묵한 것은 프레져의 경고보다는 주변의 영향이 더 컸다. 에드먼드는 밀고자 색출과 이안 헌티드를 상대하느라 혼이 빠진 상태였고, 로겐 역시 내부를 진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동안 프레져에게 연락을 못 했을 뿐더러, 그가 연락을 받지 않을 거란 판단에 자연스레 그를 선택지에서 지워 버린 것이었다.
결국 프레져가 자초한 일이었다.
─ 노르티움엔 언제 소식이 닿을진 모르겠어서 일단은 가장 빠른 편으로 신문을 보냈습니다. 날이 좋으면 전서구라도 보낼 텐데 그러질 못해서…….
휴고가 평소보다 수도에 늦게 도착한 것도, 노르티움까지 기사가 전해지지 않고 있는 것도 전부 기상 악화 때문이었다. 간헐적으로 내리는 진눈깨비는 세상의 모든 흐름을 느리게 만들었다.
─ 반박 기사는 알프레도가 쓰고 있습니다. 로겐 님은 지금 긴급회의 중이시고, 단원들은…….
휴고가 쉴 틈 없이 말을 늘어놓았으나 프레져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오합지졸에 엉망진창. 그것은 헌티드하우스의 직원들이 아니었다. 오만하며 이기적인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나는 무엇을 믿고 그리 오만했던 걸까. 어째서 내겐 한 치의 잘못도 없다고 생각했던 걸까.
캐롤라인도 헌티드하우스도 모두 제가 망친 게 맞는데.
이렇게 쉽게 무너질 탑을 설계한 건 모두 자신이었다.
─ 대표님, 듣고 계십니까?
“그래.”
그러나 지금은 절망할 시간이 없었다. 절망할 시간에, 캐롤라인이 그 망할 기사를 보기 전에 빨리 일을 처리해야 했다.
프레져는 휴고에게 우선순위로 처리해야 할 일들 위주로 지시를 내렸다.
“로겐에게 전해라. 오늘 당장 내려가겠다고.”
─ 바로 오셔도…… 괜찮은 겁니까?
캐롤라인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이 일을 막는 게 먼저다.”
캐롤라인은 이미 제게 입은 상처로 마음이 너덜해진 상태였다. 이 상태에서 자신의 건강 상태를 폭로하는 기사까지 접한다면…….
‘특히 어머니를 이용한 건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가 안 돼요. 그건 정말로…… 할 짓이 못 됐어요.’
새삼 자신이 캐롤라인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가 뼈저리게 느껴졌다.
가족을 이용하는 게 얼마나 잔인한 짓인지, 사랑하는 이의 병환을 신문으로 접하는 게 얼마나 충격적인 일인지.
이 기사가 퍼지면 캐롤라인도 이디나도 분명 슬퍼하겠지.
아내를 잡기 위해 장모를 이용하는 자신이나 왕립 극단을 위해 캐롤라인을 들먹이는 제럴드나 결국 똑같은 치였다.
“……둘 다 버러지 같군.”
─ 네?
“아니다. 바쁘겠지만 시간이 난다면 에드먼드에게도 말 좀 전해 주면 좋겠군. 내가 오늘 중으로 출발한다고 말이야.”
─ 네. 최대한 빨리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 네. 말씀하십쇼.
프레져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러나 자신의 무책임함과 무능을 깨달은 이상 말해야 했다.
“미안하다.”
─ …….
예전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었다. 유독 하기 어려운 말을 소리 내어 뱉자 생선 가시가 걸린 것처럼 갑갑했던 목이 시원해졌다. 동시에 씁쓸하기도 했다.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는 데까지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했고 또 상처받았다.
‘캐롤라인만큼은 아니겠지만.’
프레져는 캐롤라인이 떠나고 나서 그녀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그녀가 떠난 후에야 자신의 과오를 곱씹고 후회했다. 제가 무얼 하든 캐롤라인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일은 없을 터였다.
이쯤 하면 알 때도 됐는데. 프레져는 또 같은 일을 반복할 뻔했다. 그 대상이 아내에서 직원들로 바뀌었을 뿐.
“그럼 수고해라.”
프레져는 휴고의 대꾸조차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밖으로 나가자 잠시 그쳤던 진눈깨비가 다시 흩날리고 있었다. 그는 마차에 올라타 생각을 정리했다.
‘캐롤라인이 모르게 막아야 한다.’
아직은 캐롤라인은 이를 몰랐다. 게다가 끊임없이 내리는 진눈깨비 때문에 대부분의 교통이 마비되어있었다. 소문을 퍼뜨릴 사람도, 신문을 가져올 사람도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지금 잘 처리한다면 캐롤라인의 귀에 이 소식이 들어갈 일은 없을 터였다.
‘제대로 해결해야 한다.’
기사도, 극단도. 그리고 캐롤라인이 원하는 바도.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오자 머리가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그러자 비로소 캐롤라인에게 올 피해를 최소화할 방법이 떠올랐다.
프레져는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캐롤라인 곁에 나란히 앉아 있던 에릭과 스테파니는 프레져가 오자 알아서 자리를 비켰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캐롤라인이 입을 열려고 할 즈음, 프레져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중요한 일은 전부 처리했어. 오늘 중으로 수도에 돌아갈 거야.”
“밖에 눈이 오는데요?”
“진눈깨빈데 뭘. 이 정도야 괜찮아.”
눈을 맞은 탓에 프레져의 앞머리는 살짝 젖어 있었다. 그는 머리의 물기를 가볍게 털어 내곤 다시 입을 열었다.
“날이 추우니까 당신은 밖에 나오지 말고.”
“안 나가요. 나가 봤자 요 앞 산책로가 전부인걸요.”
“되도록이면 병실에 있어. 원래 이렇게 애매한 날씨가 제일 위험해.”
밖을 돌아다니다 이상한 소문을 마주칠지도 몰랐다. 그래서 프레져는 어울리지도 않는 날씨 핑계를 댔다.
“수도에 가면 콘월 후작부터 만나 볼 생각이야. 만나서 이야기하면 다를지도 모르니까.”
“고마워요.”
“그다음엔 바로 마샤와 스테파니, 에릭 포스터의 계좌에 사례금을 남길 거고.”
필요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캐롤라인의 곁에 아주 잠깐이라도 더 머물고 싶다는 마음이 되도 않는 이야기를 늘어놓게 만들었다.
“부동산만 처분해도 충분할 거야. 당신 물건은 저택에 남겨 둘게. 혹시라도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니까.”
“물건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캐롤라인은 난처한 듯 눈을 굴리다 입을 뗐다.
“충분하다고 해도 그냥 다 처분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내가 저택으로 돌아가는 일은…… 앞으로 없을 테니까요.”
“내가 말했잖아. 치료 방법을 무조건 찾을 거라고.”
죽음을 염두에 두고 하는 듯한 말투에 프레져는 다급히 대꾸했다. 그러나 캐롤라인은 그게 아니라며 손을 휘저었다.
“죽을 걸 생각해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나는…….”
캐롤라인은 잠시 입술을 달싹거리다 말을 이었다.
“당신과 함께 살아갈 마음이 없어서 그래요.”
“…….”
“내가 살 확률은 정말 희박하지만, 치료가 된다면…… 당신한테 이혼을 요구하겠죠. 내가.”
“…….”
“당신도 알잖아요. 우리가 함께 사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프레져를 원망하고 신을 원망하다 못해 시간을 되돌리길 바랐던 날들이었다. 캐롤라인은 더 이상 남을 미워하고 싶지 않아 프레져에게 떠날 것을 요구했다.
“모처럼 다시 건강해졌는데, 아팠던 기억이 잔뜩인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런 그녀에게 프레져는, 그리고 백작저는 악몽이자 불행의 둥지나 다름없을 터였다.
프레져의 상상 속에 캐롤라인이 죽는 가정이란 없으니 그녀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그러나 몸은 좀처럼 뜻을 따라주지 않았다.
“지금 당장 하자는 건 아니에요. 그런 건 병이 치료된 후에 결정해도 괜찮으니까요. 당신도 생각이 필요할 테고…….”
그런 그를 이해한다는 듯 캐롤라인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나 그 뜻을 철회하진 않았다.
“미안해요. 지금 이렇게 치료받고 있는 것도 다 헌티드 가문 덕인데……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면 죽는 것만 못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말에 결국 프레져는 고개를 끄덕였다.
캐롤라인이 자신이 죽지 않는 미래를 입에 올린 건 처음이었다. 겨우 희망을 품은 사람을 다시 끌어내릴 수는 없었다.
“그래.”
살아야지. 살게 만들어야지. 살아서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게 해 줘야지.
지옥 같은 내 곁이 아니라,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게.
프레져는 몸을 돌려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고리를 쥔 채 잠시 서 있던 그는 캐롤라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캐롤라인, 힘들게 해서 미안했어.”
“…….”
“아프지 말고. 건강히 지내.”
“……당신도요. 조심히 가요.”
그게 끝이었다. 부부의 작별은 프레져가 노르티움을 떠남으로써 끝이 났다.
프레져는 기상 악화로 인해 연착된 열차를 기다리며 오로지 하나만을 생각했다.
‘기사를 막아야 한다.’
캐롤라인의 행복을 위해서.
그러나 그의 계획이 실현되기도 전에 일이 터졌다. 프레져가 수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전국에 헌티드 백작 부부에 대한 기사가 보도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