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수도에서는 신문이 발행되었다.
헌티드 백작 부인이 시한부라는 소식과 함께, 헌티드 백작이 광증과 몽유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늦은 밤, 헌티드 백작은 잠에 취해 백작저를 돌아다니며, 광증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으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피를 보지 않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는 내용도 함께였다.
다수의 목격자들이 등장하며 이 소식은 신뢰를 얻기 시작했다. 백작저에서 근무하는 사용인과 왕성 시중인들의 증언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피를 뚝뚝 흘리며 왕성을 뛰쳐나가던 프레져를 본 이들 역시 여럿이었다.
백작 부인이 죽을병에 걸린 건 백작의 광증 때문이며, 비정한 헌티드 백작은 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소식이 사람들의 입을 탔다. 이 때문에 현재 헌티드하우스가 공황 상태에 빠졌다는 것도.
알프레도는 오페라하우스로 몰려든 기자들을 막느라 정신이 없었다. 로겐은 극단 내부를 진정시키느라 바빴다. 이 소식을 들은 임원들이 벌 떼처럼 들고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백작저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에드먼드는 저택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내부 고발자를 색출하는 중이었다.
온 수도가 소란한데, 정작 이 모든 사태의 주범은 태평하기만 했다.
제럴드는 테이블 위에 넓게 펼쳐져 있는 신문을 보며 킬킬 웃었다.
「헌티드 백작, 몽유병에 광증까지?」
백작저에서 일하는 델이라는 여자 덕에 아주 재밌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캐롤라인의 전담 하녀라는 그녀는 하녀장의 신임을 받는 모양인지 꽤나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느닷없이 귀를 틀어막거나 한밤중 맨발로 저택을 돌아다니는 이상 행동까지 보였다고 한다. 그 모습이 꼭 귀신에 들린 사람 같았다는 증언이…….」
제럴드는 백작저의 사용인이 과장을 보태 전한 말을 그대로 국왕에게 알렸다. 예상대로 국왕의 얼굴에 흥미로운 기색이 어렸다.
정신병에 걸린 자가 대귀족가의 가주도 모자라 극단의 대표까지 맡고 있다니!
게다가 그는 제 직무를 위임 중이기까지 했다.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남부 공연에서의 공개 사과로 쇄신했던 프레져의 평판이 바닥까지 떨어질 터였다. 평판뿐만 아니라 헌티드하우스와 백작가까지 흔들릴 일이었다.
이 상황에서 백작 부인이 시한부라는 사실을 곁들인다면, 프레져가 아내에게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비정한 남편이라는 사실까지 알려진다면 어떻게 될까?
‘공중분해 된 헌티드하우스를 내 쪽으로 끌어올 수 있다.’
평민들은 유독 정에 민감했다. 국왕이 애써 단란한 가족을 연출하려고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민심을 쥐는 데 가족애와 정은 필수였으니.
기사가 퍼진다면 헌티드하우스에 충성적인 평민 단원들도 분명 프레져에게서 등을 돌릴 터였다.
이를 들은 국왕은 이번 계획이 성공한다면 왕립 극단의 창설을 공표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막대한 지원금과 극단을 위한 공연장 건설까지 약속했다.
“수도에만 퍼지게끔 보도한 게 맞겠지?”
“네. 다른 지역 신문에는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헌티드 백작이 있는 곳까지 소식이 닿으려면 사흘은 걸릴 겁니다.”
보좌관의 말에 제럴드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프레져 헌티드가 일은커녕 직원들과 연락조차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연락이 되지 않는 건 백작저의 집사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내내 발만 동동 구르다가 전화를 받은 게 바로 어제라고 했으니.
“휴고라는 놈이 오려면 이틀은 더 걸릴 테고.”
휴고라는 부하가 항상 프레져의 옆에 붙어 있긴 했지만 그는 수도로 오기 위해 어제 점심 즈음 노르티움을 떠났다고 했다. 델이라는 하녀가 엿들은 내용이라 하니 틀림없는 사실일 터였다.
“소식 하나 전해 들을 수 없을 텐데. 어쩌려나.”
그래서 제럴드는 지금을 노렸다. 수도의 신문에만 보도된 기사이니 노르티움까지 닿을 리도 없고, 프레져가 모든 연락을 무시하고 있으니 직원들도 프레져에게 상황을 전하지 못할 것이었다.
프레져가 모든 걸 알게 됐을 땐 이미 시간이 한참이나 흐른 뒤라 수습하기도 어려울 테고.
“이안 헌티드는 지금 어디에 있지?”
“아직 자고 있다고 합니다. 어제 늦은 시간까지 모임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한심한 작자 같으니. 지켜볼 필요도 없겠군. 헌티드하우스 쪽은?”
“긴급회의가 소집됐다고 합니다. 건물 앞엔 기자들과 투자자들이 몰려있고요.”
“좋아. 잘 주시하다가 바로바로 보고해.”
“알겠습니다.”
제럴드는 보좌관이 나간 후에도 자리에 앉아 델이 전했던 말을 곱씹었다.
‘이건 사용인 중에 저만 아는 비밀인데, 마님께서는 백작저에서 도망치려 하셨던 거 같아요. 플라이크 별장엔 계시지도 않았고, 어디로 가셨는지 행방도 묘연했으니까요.’
“도망이라.”
어딘가 수상한 냄새를 감지한 제럴드는 프레져의 행동 중 가장 이례적이었던 일을 떠올려 보았다.
“난데없이 순회공연이라길래 이상하다 싶긴 했지.”
상류층의 꼭대기에 서 있음과 동시에 귀족들의 문화를 주도하고 있는 남자. 프레져 헌티드가 내렸다고 믿기 어려운 결정이었다.
“흐음.”
제럴드는 의자를 빙글 돌렸다. 집무실 벽 한 면에는 글랜포드의 지리를 상세히 그려 둔 지도가 걸려 있었다.
“순회공연 마지막 순서가 동부, 그리고 캐롤라인 헌티드가 있던 곳이 플라이크…….”
퍼즐 조각처럼 흩어져 있던 단서들이 자리를 찾아 가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가정에 헛웃음이 나오다가도 요즘의 프레져 헌티드라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아내 하나를 찾자고 순회공연을 기획한 건가?”
* * *
로겐이 임원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건물 밖 취재진을 제압한 알프레도는 오페라하우스 1층의 연습실로 향했다.
‘운도 지지리 없지.’
하필이면 오늘은 헌티드하우스의 단원들 전부가 모이는 날이었다. 이제 곧 사교 시즌이 시작될 테고, 이에 맞춰 새 작품을 선보이려면 슬슬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선 모든 단원들과의 논의가 필수였다.
“안녕하십니까. 다들 오랜만입니다.”
안녕할 리가 없었다. 단원들이 싸늘한 반응을 보일 걸 알았음에도 알프레도는 부러 안부 인사를 건넸다. 이것이 귀족의 예의였다.
“…….”
역시나 단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초조해 보이는 이들도 있었고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이들도 있었다. 자리가 몇 군데 비어 있기도 했다.
눈치를 살피느라 바쁜 단원들을 대신해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자리에 모인 이들 중 최연장자이자 지휘자인 에반 쉬르였다.
“우리가 이곳에 모인 건 새 작품을 준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시겠지요.”
그는 품에서 신문을 꺼내 펼쳐 들었다.
“이 기사에 대한 설명을 부탁합니다.”
에반 쉬르 뒤편에 앉은 단원들의 표정이 결연했다. 이에 알프레도는 한숨을 내쉬었다.
“백작 부인의 병환에 관해 묻는 거라면…… 네. 맞습니다.”
“세상에.”
곳곳에서 침음이 터져 나왔다. 이디나 웨즐이 실명 직전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기에 분위기는 더욱 침울했다.
알프레도 역시 캐롤라인의 병환이 깊다는 것만 알았지, 시한부라는 사실은 몰랐기에 착잡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럼 대표님이 몽유병에 광증을 앓고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까?”
“그건 거짓입니다.”
단호하게 답하긴 했지만 사실 알프레도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로겐의 명에 따라 아니라고 답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알프레도의 눈에는 프레져의 상태가 심상치 않은 것이 보였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는 안색에 행사장에서 난리를 치고 다니니, 멀쩡하다 주장해도 의심부터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 자선 행사장과 왕성에서 있었던 일은 다 무엇입니까?”
“그것은…… 윗분들의 이야기인지라 저도 알지 못합니다.”
“대표님께서 백작 부인의 병환에 대해 몰랐다는 것은요?”
“대표님의 사생활인 부분이라 설명드리기 어렵습니다.”
“계속 모른다, 설명하기 어렵다는 말만 하시는군요.”
에반 쉬르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이에 알프레도는 조금 짜증이 났다. 정말 몰라서 모르는 거라 말하는 것뿐인데.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목소리는 에반 쉬르에게서가 아닌 다른 곳에서 나왔다. 단원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플룻 연주자인 릴리가 서 있었다.
“작년에 있던 순회공연이 전부…… 대표님의 사익을 위해 진행된 것이었습니까?”
“그게 무슨 소립니까?”
“말없이 도주하신 백작 부인을 추적하기 위해 순회공연을 기획했냐는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얘깁니다. 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듣고 오신 겁니까?”
알프레도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릴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어디서 듣고 왔는지가 중요합니까? 사실을 말씀해 주세요!”
알프레도는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것이 캐롤라인의 도망은 그조차도 들어 본 적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조금 의아하긴 했지.’
귀족 중의 귀족인 프레져가 문화 예술의 향상을 위해서 극단을 움직인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알프레도 역시 뼛속까지 귀족이었기에 프레져의 결정에 적지 않게 반대했었다.
“또 모른다고 대답하실 겁니까?”
그 머뭇거림을 놓치지 않은 릴리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아닙니다. 생각지도 못한 헛소문에 당황하여…….”
알프레도의 답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이상함을 인지한 단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 탓이었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그 어려운 일을 상의도 없이, 도망간 아내를 잡겠다고……!”
준비 기간은 고작 한 달이었다. 그동안 빠르게 공연을 준비하고, 짧은 시간 동안 전국을 순회하고, 하기 싫으면 관두라는 대표의 으름장을 견뎌 가며 준비를 했다.
그럼에도 평민 단원들이 군말 없이 이를 따른 이유는 하나였다.
“오페라를 모두와 즐기겠다는 뜻이 아니었군요.”
프레져 헌티드가 얼마나 귀족적인 사람인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래도 그는 평민인 단원들에게 장학금을 줘 가면서까지 음악을 할 수 있게 도와줬다.
그래서 기대했다. 신분이 사라지는 날 따윈 오지 않겠지만, 어쩌면 우리도 신분에 상관없이 다양한 것을 누릴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프레져처럼 높은 사람이 움직이니 다를 거라고.
근데 그게 전부, 본인의 잘못으로 인해 놓친 아내를 찾기 위해서였다니. 그것도 고고한 명예를 지키기 위해.
“실망이네요.”
릴리가 뱉은 말은 그게 다였다. 그녀가 자리를 뜨자 평소 릴리를 엄마처럼 따르는 단원들 역시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이외에도 프레져의 무책임함에 실망한 이들이 다수 자리를 떴다.
오히려 눈치를 보며 자리에 남은 건 귀족 출신 단원들이었다.
제럴드에게 스카웃 제의를 받은 이들은 이번 일로 헌티드하우스를 뜰 결심을, 그러지 못한 이들은 와해된 극단을 왕실에서 인수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평민 단원들이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여 퍽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음…… 어떡하지?”
“그러게.”
두 무용수가 목소리를 줄인 채 속닥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