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답장 쓰실 거면 실험실 아이들 것도 같이 보내는 게 어때요? 클리브 선생님께선 아이들을 좋아하시잖아요.”
“그거 좋은 생각이다.”
“아이들 편지는 제가 받아 올게요. 마침 오늘이 보육원에 가는 날이니까요.”
보육원은 일주일에 두 번 운영되고 있었다. 보육 교사와 대학생들이 아직 출근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마샤 혼자서는 매일 문을 여는 게 어려웠다.
“마샤한테는 맨날 일만 시키네. 미안하게.”
“뭘요. 그게 제 역할인걸요.”
마샤는 본인을 시녀라고 강조하긴 했지만 캐롤라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마샤는 친구 이상으로 소중한 존재였다.
‘프레져가 내 물건을 처분해 줘야 할 텐데.’
백작저의 재산이 정리가 되어야 마샤와 에릭, 스테파니에게 빚을 갚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기 위해선 프레져가 수도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빨랐다.
캐롤라인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응시했다. 덜 녹은 눈이 땅에 질척하게 쌓였다.
‘눈이 녹으면 돌아갈 줄 알았는데.’
그쯤 말하면 수도로 돌아가리라 확신했다. 그는 가문과 극단에 대한 애착이 대단한 남자였으니. 그러나 그는 휴고를 수도로 돌려보냈을 뿐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이혼할 생각은 있습니까?’
클리브의 편지를 읽으니 문득 제게 이혼할 마음이 있냐 물어보던 것이 떠올랐다.
‘이혼이라.’
캐롤라인은 헌티드 가문 안에서 불행했으나, 그 덕에 많은 부를 누릴 수 있었다. 지금 받고 있는 치료도 백작가의 재산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그러니 자신이 프레져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있는 처지라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어차피 곧 죽을 건데 이혼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기도 했고.
‘차라리 이혼을 하는 게 나으려나.’
이혼을 하게 된다면 자신에 대한 프레져의 간섭을 줄일 수 있을 터였다. 법적으로 남이 되는 것이니 서로에게서 완전히 멀어질 수 있겠지.
물론 프레져가 이를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만에 하나, 정말 운이 좋아 죽지 않게 된다면, 치료에 성공한다면…….
‘프레져와는 함께 살 수 없어.’
상상만 해도 끔찍한 가정에 캐롤라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안 좋은 기억만 가득한 백작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었다 말하는 귀부인들의 비웃음을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마님, 왜 그러세요?”
“아, 눈이 좀 건조해서.”
“계속 난로를 때서 그런가 봐요. 창문을 좀 열어야겠네요.”
마샤는 캐롤라인의 숄을 단단히 여며 준 뒤 창문을 반쯤 열었다. 차가운 바람을 맞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글을 못 쓰는 아이들한텐 그림을 그리게 해야겠네요. 마침 색연필이 잔뜩 있으니까.”
계획을 읊는 마샤에 캐롤라인은 프레져에 대한 생각을 거뒀다.
“색연필? 그건 따로 사 둔 적이 없는데.”
“왜, 시장님께서 기부를 하고 가셨다 했잖아요. 기부 물품 중에 색연필도 있더라고요.”
“그래?”
역시 시장이라 꼼꼼하구나. 캐롤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 곧 패트릭 씨가 돌아온다고 했는데.”
“정말? 모아가 엄청 좋아하겠네.”
“네. 근데 눈이 많이 와서 도착이 늦어지고 있나 봐요.”
캐롤라인은 창밖을 바라봤다. 덜 녹은 눈이 땅에 질척하게 쌓여 있었다.
“우리 모아 달래 주려면 패트릭이 고생 좀 하겠네.”
입이 댓 발 튀어나왔을 꼬마를 생각하며 캐롤라인은 푸스스 웃었다.
* * *
“모아, 클리브 선생님한테 편지 쓰자.”
“우응.”
“모아는 글 쓸 줄 모르니까 내가 대신 써 줄게.”
편지지를 흔들며 경쾌하게 말하는 슈와는 달리, 모아의 대답은 힘없이 축 늘어졌다.
“왜 그러고 있어?”
“아빠 때문에.”
“아직도 안 오셨어?”
“응.”
고개를 끄덕인 모아의 입술이 오리처럼 삐죽 튀어나왔다.
곧 도착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전했던 패트릭은 벌써 일주일째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눈이 너무 많이 왔던 탓에 도시 안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 빼고 너희들끼리 놀아.”
“왜애. 같이 놀자.”
모아는 대꾸 없이 이불로 가 철푸덕 드러누웠다. 그 모습을 안쓰럽게 쳐다보던 슈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리를 옮겼다.
“아빠 바보. 미워.”
모아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자그마한 주먹을 팡팡 내려쳤다. 죄 없는 이불을 괴롭히던 행동은 갑자기 나타난 다뉴로 인해 중단되고 말았지만.
“악!”
마치 블럭을 쌓듯 모아의 몸을 깔고 누운 다뉴에 모아가 빽 소리를 질렀다.
“다뉴, 놀랐잖아.”
“쪼기.”
다뉴가 손가락을 뻗어 창밖을 가리켰다. 손가락이 향한 곳엔 요즘 통 안 보인다 싶었던 프레져가 서 있었다.
“미안한데 나 지금 눈사람 구경할 기분 아니야.”
저 아저씨가 우리 아빠면 좋을 텐데.
모아는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다뉴는 아랑곳하지 않고 모아의 어깨를 흔들었다.
“아이참, 나한테 오지 말고 딴 데 가서 놀라니까.”
“쪼기, 쪼어기.”
“다뉴, 너 정말……! 됐어. 그냥 내가 다른 데로 갈래.”
체념한 모아는 담요를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어른들의 눈을 피해 밖으로 나갔다.
놀이 시간이 아닌 탓에 놀이터는 텅 비어 있었다.
모아는 담요를 망토처럼 어깨에 둘러 묶은 뒤 그네에 올라탔다. 짧은 다리를 있는 힘껏 구르자 그네가 높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바람이 눈가를 스치자 눈물이 흘렀다.
“흥! 아빠는 바보야.”
그네가 앞으로 솟을 때마다 아이의 닭똥 같은 눈물이 바람에 흩날렸다.
“아빠는 방구, 눈곱, 트름, 응가야!”
눈물 젖은 뺨에 머리카락이 다닥다닥 달라붙었다.
시야를 가린 머리카락을 치우기 위해 모아는 그네 줄에서 손을 뗐다. 하필 그네는 아이의 힘으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다.
“으힉!”
비명과 함께 중심을 잃은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이의 작은 몸은 땅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악!”
점점 가까워지는 땅에 모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슨 애가 이렇게……!”
커다란 손이 모아의 다리를 덥석 붙잡았기 때문이다.
“겁이 없어!”
프레져가 아이의 발목을 붙잡은 채 소리쳤다.
모아는 사냥당한 토끼처럼 대롱대롱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머리부터 고꾸라지려는 걸 프레져가 다급히 붙들었기 때문이다. 모아의 머리만 아슬아슬하게 풀숲에 파묻힌 상태였다.
“앞이, 앞이 안 보여!”
울먹거리는 목소리에 프레져는 발목을 붙든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덤불 속에서 뽁, 하고 아이의 얼굴이 솟아올랐다.
“아저씨, 왜 거꾸로 서 있어요?”
“…….”
프레져는 대답하는 대신 모아의 몸을 돌려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하, 내가 거꾸로 있던 거구나.”
프레져는 울타리에 몸을 반쯤 걸친 채였다. 다리와 팔이 짧았더라면 울타리 너머에 있는 아이를 받기 쉽지 않았을 터였다.
“어른들은 어디에 있고 혼자 나온 거지?”
프레져는 울타리 안쪽으로 굽혔던 몸을 곧추세우며 물었다.
“어른들 없는데요?”
“뭐? 대체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내가 몰래 나온 거니까!”
울먹거리던 것은 벌써 잊어버렸는지 모아는 입을 가리며 까르르 웃었다. 이에 프레져의 눈썹이 들렸다.
원래 아이란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존재인가?
“얼른 들어가라. 감기 걸린다.”
프레져가 모아의 머리에 붙은 풀을 떼며 말했다. 그새 풀에 긁히기라고 했는지 뺨엔 작은 생채기가 나 있었다.
“다치면 걱정한다.”
나 말고 캐롤라인이.
캐롤라인이 가장 아끼는 아이가 모아라는 사실을 프레져는 모르지 않았다.
“들어가서 어른들한테 꼭 치료해 달라고 하고.”
“아저씨도요.”
“…….”
“아저씨도 손 아야 했잖아요.”
프레져는 그제야 제 손을 들여다보았다. 울타리에 긁혔는지 손목이 살짝 까져 있었다.
“그리고 감기는 어른도 걸려요.”
“…….”
“아저씨도 감기 걸리니까 밖에 그만 서 있어요. 심심하면 놀러 오든가요.”
당돌하게 말하는 모아에 프레져는 할 말을 잃었다. 어쩐지 이전부터 자신을 계속 보고 있다 했더니.
“아, 눈사람은 감기 안 걸리나?”
“……됐으니 얼른 들어가라.”
프레져는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모아의 등을 떠밀었다.
“밀지 마요. 아저씨 힘 너무 쎄.”
“…….”
“안녕. 아저씨 빠빠이.”
건물 안으로 자박자박 걸어 들어가는 모아를 보며 프레져는 손을 말아 쥐었다.
‘아주 살짝 밀었는데 그게 아팠나.’
이래서 그는 아이들이 불편했다. 너무 작고 연약할 뿐더러, 당최 행동을 종잡을 수 없으니까.
방금 전 모아만 봐도 그랬다. 자신이 나서지 않았다면 크게 다쳤을 것이 분명했다.
눈만 떼면 사고에, 툭하면 우는 애들을 캐롤라인은 어째서 좋아하는 걸까?
프레져는 제 허리께도 오지 않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스스로도 왜 이곳에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캐롤라인은 자신을 불편해하고, 그렇다고 그녀를 떠날 수는 없으니 잠시만 병실에서 나가 있으려는 거였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이곳이었다.
“모아!”
모아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만 보고 걸음을 옮기려 했는데 누군가 멀찍이서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아빠……?”
얼떨떨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던 모아의 눈이 점점 커졌다. 이내 모아는 남자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압빠아아아!”
남자는 아이의 아빠인 모양이었다. 남자의 품에 안긴 모아의 얼굴은 어느새 눈물 콧물로 범벅이었다.
‘방긋거릴 때는 언제고.’
그네에서 떨어졌을 때도 눈물 한 번 보이지 않더니.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는 모습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눈이 갔다.
“그런데 누구……?”
“…….”
의문스레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프레져는 흠칫했다. 지금 제 모습이 굉장히 수상해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보육원 안을 기웃거리고 있는 덩치 큰 남자라니. 누가 봐도 이상하지 않은가.
잘못한 것이 없지만 프레져는 괜히 불안해졌다. 그래서 서둘러 자리를 떴다. 뒤에서 패트릭이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아이의 울음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흐어엉, 아빠 바보! 지각쟁이!”
“아빠가 다 잘못했어. 미안해, 우리 딸.”
“흐으, 헝.”
패트릭은 프레져를 추궁하는 대신 모아를 안아 들고 둥가둥가 어르기 시작했다. 그 우렁찬 울음소리에 보육원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내밀었다.
“어머, 여보!”
패트릭을 발견한 베카가 겉옷 하나 걸치지 않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이에 프레져는 더욱 걸음에 속도를 높였다.
들켜선 안 된다는 생각은 왜 드는 건지, 그리고 어째서 이곳에 더 머물고 싶은지는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