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와, 바깥 좀 봐. 눈이 엄청 쌓였네.”
“그러게요. 역시 북부라 다른가 봐요.”
캐롤라인의 감탄에 마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간 내린 눈 덕에 온 세상이 새하얬다. 아이들은 춥지도 않은지 눈 쌓인 산책로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마샤, 기억해? 우리 눈 오면 같이 눈사람 만들기로 했던 거.”
“당연히 기억하죠.”
눈싸움도 같이 하자고 약속했었는데. 눈이 이렇게나 많이 왔는데도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설원을 뒹굴기엔 캐롤라인의 몸이 너무 약해졌기 때문이었다.
“스테피는 힘도 좋네.”
캐롤라인이 바깥에서 눈덩이를 굴리고 있는 스테파니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화단에 줄지어 선 눈사람 중 가장 큰 것이 스테파니가 만든 눈사람이었다. 힘에 부치지도 않는지 제 몫의 눈사람을 다 만든 스테파니는 아이들이 눈덩이 굴리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새 친해진 모양인지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스테파니의 눈사람에 구슬과 나뭇가지를 달았다. 이런 일에 흥미가 없는 에릭은 그 옆에서 목발로 눈덩이를 으깨고 있었다.
“마니임!”
자리에서 방방 뛰며 자신을 부르는 스테파니에 캐롤라인은 창문을 열었다. 그러곤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스테파니는 활짝 웃더니 주변의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곤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스, 스테파니!”
멍하니 서 있던 에릭이 뒤늦게 그녀를 불렀지만, 스테파니는 이미 건물 안으로 사라진 뒤였다.
머지않아 장갑 낀 손 위에 작은 눈사람을 올린 스테파니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스테피, 에릭을 버리고 오면 어떡해!”
“이제 잘 걸어 다니시던데? 그건 그렇고 마님, 이것 좀 보세요.”
에릭은 안중에도 없는 스테파니에 마샤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는 겉옷을 챙겨 입은 뒤 에릭을 데려오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마님 보여드리려고 가져왔어요.”
“어머, 귀여워라.”
“그렇죠? 에릭이랑 같이 왔으면 진작 다 녹아서 없어졌을 거예요. 밖에 버려 두고 오길 잘했다니까요.”
자비 없이 말하는 스테파니를 보며 캐롤라인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주먹 두 개를 합쳐 놓은 크기의 눈사람은 지푸라기로 된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다. 눈에는 보라색 구슬 두 알이 달려 있었고 코와 입은 아몬드로 되어 있었다.
“이거 마님이에요.”
“응?”
“마님을 모델 삼아 만든 눈사람이라구요.”
장난인 줄 알았는데. 가만 보니 눈사람의 머리와 눈동자 색이 캐롤라인의 것과 같았다.
“왜, 그때 같이 눈사람 만들기로 했었잖아요.”
“그랬지.”
“칠면조 대신 닭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같이 만드는 건 어려울 테니까요.”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 마음씨가 예뻐서 캐롤라인은 스테파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오래도록 간직하고픈 추억과는 달리, 눈사람은 빠른 속도로 녹고 있었다. 실내가 따뜻한 탓이었다.
캐롤라인은 창문을 열어 눈 쌓인 창틀 위에 눈사람을 올렸다. 차가운 바깥 공기를 만난 눈사람은 더 이상 녹지 않았다.
“그렇게 두면 이틀은 가겠네요.”
“응. 너도 얼른 들어가서 씻으렴. 이러다 감기 걸리겠어.”
“아, 곧 백작님께서 오실 시간이죠?”
스테파니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질척해진 바닥을 걸레로 깨끗이 닦은 뒤 병실을 나섰다.
휴고가 들어온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무렵이었다.
“대표님께서는 병원장과 잠시 나눌 이야기가 있다고 하셔서요.”
“대체 무슨 얘길 하길래 틈만 나면 병원장을 만나는 거래요?”
“마님을 치료하기 위해서 뭔들 못 하시겠습니까.”
“……병원장을 만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그레타에 간 클리브에게서도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런데 병원장이라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제발 수도로 돌아가라 화를 내고 싶다가도, 잠까지 줄여 가며 제 옆을 지키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약해졌다.
캐롤라인이 겁에 질린 채 잠에서 깼던 날 이후, 프레져는 캐롤라인을 간호하는 내내 쪽잠 한 번 자지 않았다. 두려움에 흐느끼는 아내의 모습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프레져에게 약한 모습을 보인 게 마음에 걸리면서도 캐롤라인은 내심 불편했다.
“그 사람 잠은 자나요?”
“네. 그래도 노르티움에 오신 이후론 간간이 주무시는 것 같더군요.”
그래도 아예 못 자는 건 아니구나. 캐롤라인은 작게 안도했다.
“휴고는 어때요?”
“네? 저 말입니까?”
“네. 눈 밑이 새까매요.”
“아.”
휴고는 눈으로 손을 뻗었다. 푹 꺼지는 눈두덩과 푸석푸석한 피부가 손끝에 느껴졌다. 프레져가 돌보지 않는 업무를 처리하느라 잠을 자지 못한 탓이었다.
“피곤하겠네요. 미안해요.”
“저한테 사과하실 거 없으십니다. 제 피로의 원인은 전부 대표님인걸요.”
휴고는 이런 말을 내뱉는 스스로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꼭 캐롤라인에게 이 상황을 해결해 달라 호소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아니. 들리는 게 아니라 실제로 의도한 거지.’
캐롤라인의 성정상 제 말을 듣고 그냥 넘어가진 않을 테고, 그녀라면 프레져를 회유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휴고는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이야기를 흘렸다.
“역시. 극단엔 프레져가 필요하군요.”
역시 캐롤라인은 그의 예상을 한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내가 잘 말해 볼게요. 설득하면 생각을 바꿀지도 몰라요.”
“아닙니다. 마님께서 왜 그런 고생을 하십니까. 몸도 안 좋으신데.”
아픈 것도 모자라 프레져에게 상처 입은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꼭 환자를 이용하는 것 같은 죄책감이 휴고를 짓눌렀다.
“대표님 고집이 얼마나 센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도요. 프레져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데. 그렇다면 돌아가야죠.”
함께 있어 봐야 피차 불편하기만 한데. 차라리 그가 수도로 돌아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휴고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쉬어요.”
“……감사합니다.”
프레져가 들어온 건 대화가 막 끝났을 무렵이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군.’
휴고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병실 밖으로 나갔다. 프레져는 그런 휴고를 미심쩍게 쳐다보다 캐롤라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군청색 눈동자가 캐롤라인의 어깨에 있는 새하얀 물체에 가 닿았다.
“웬 눈사람이지?”
“스테파니가 만들어 줬어요. 원래 같이 만들기로 약속했었는데 내 몸이 안 좋아지는 바람에 못 했거든요.”
“애도 아니고.”
“백작저에 있을 땐 못 했던 일이니까요.”
“…….”
프레져는 결혼 후 함께 맞았던 첫 겨울을 떠올렸다. 부츠와 장갑에 눈을 잔뜩 묻혀 들어오던 캐롤라인을.
뭐 하는 거냔 물음에 캐롤라인이 뭐라고 대답했더라?
“로우밸리는 눈이 잘 안 오거든요.”
그래. 그때도 지금과 똑같이 말했었다. 세상이 하얗게 잠기는 게 신기해서 저도 모르게 뛰쳐나갔다고.
코끝이 빨개진 모습이 귀여웠으나 프레져는 미소 짓는 대신 얼굴을 굳히는 것을 택했다. 귀부인이 눈밭에서 뛰어노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대신 왕국의 유명한 조각가가 만든 얼음 조각상을 구경시켜 줬었다. 그런 건 체통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니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덩치가 커다란 개랑 같이 눈밭을 뒹구는 게 소원이었어요. 근데 과거에도 지금도 할 수가 없으니까.”
생각해 보면 캐롤라인이 원하는 것은 전부 귀부인의 체통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아주 사소했다. 되돌아 생각해 보면 나서서 말렸던 게 무안해질 정도로.
아주 소소하고 별 볼 일 없는 것들이라 무심코 지나쳤던 게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간들이 쌓여 지금의 골을 만들었다.
캐롤라인이 원하는 게 이런 것임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그리고 그들에게 닥칠 미래가 암울할 줄 미리 알았더라면. 그녀를 타박하는 일 따윈 하지 않았을 텐데.
“그래서 나는 눈이 오면 당신이 생각나요. 그만큼 밉기도 하고요.”
“…….”
“물론 내 행동이 잘못됐다는 건 알아요. 당신 말대로 눈밭을 뛰어다니는 귀부인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그래도 한 번쯤 눈감아 줄 수 있는 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창밖의 눈사람은 해맑게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눈사람과 얼굴을 마주한 캐롤라인은 웃지 않았다.
“그래서 난 당신을 볼 때마다 속이 불편해요. 옛날 생각이 자꾸 나서 쉬어도 쉬는 것 같지가 않아요.”
“…….”
“그러니까 이만하고 백작저로 돌아가 줬으면 좋겠어요.”
“그건 안 돼.”
여태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게 무색할 정도로 프레져는 빠르게 입을 열었다. 단호한 목소리와는 달리 캐롤라인을 보는 눈동자는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캐롤라인의 침대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당신이 날 미워하는 게 당연해. 여기서 더 원망하게 된대도 난 할 말이 없어. 그러니까 제발 돌아가라는 말은 하지 마.”
“내가 너무 힘들어서 그래요. 이제 그만하고 돌아가 줘요. 당신도 많이 바쁘잖아요. 직원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당신이 이렇게 아픈데 그깟 일이 뭐가 중요해. 혼자 앓을 당신을 생각하면 나는…….”
상상만 해도 끔찍한 듯 프레져가 손으로 제 뺨을 쓸어내렸다. 정신을 잃은 채 숨만 헐떡이던 캐롤라인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했다.
“그냥 내 탓을 해. 아니, 전부 내 잘못이 맞아. 당신이 아픈 건 다 나 때문이잖아. 내가 당신을 혼자 둬서 생긴 일이잖아.”
“…….”
“얼마든지 욕해도 상관없어. 당신 화가 안 풀린다면 나를 때려도 좋아. 체통이고 예의고 그게 왜 중요해. 당신이 그러고 싶다는데.”
프레져는 어느새 무릎을 꿇고 있었다. 캐롤라인의 손을 잡을 수 없어 침대 다리를 붙든 채였다.
“그러니까 제발 날 보내려고 하지 마, 응?”
가슴이 절절해지는 호소였다. 프레져의 눈동자는 파도처럼 일렁였으나, 이를 지켜보는 캐롤라인의 얼굴은 한없이 잔잔하기만 했다.
“프레져, 당신이 내 곁에 머무는 게 정말 나를 위해서라고 생각해요? 당신 편하려고 하는 일 아니고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절대 아니야.”
“당신은 그동안의 일로 내게 죄책감을 갖고 있었잖아요. 사과를 하고 싶어했고요.”
“내가 당신을 상처 입혔으니까. 당연하잖아.”
“이렇게 내 옆에 있으면 그동안의 잘못을 조금이나마 사과하는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정말 없어요?”
따지는 말투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목소리는 날아가는 나비처럼 나긋나긋하기만 했다. 그래서 프레져는 더욱 두려움을 느꼈다.
“없었다면…… 거짓말이야. 하지만 절대 나 편하자고 하는 일은 아니었다. 알잖아. 나한테 가장 두려운 일은 당신이 아파하는 거라는 거. 내가 여기에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당신을 보살피기 위해서야.”
“난 당신과 함께 있는 걸 원하지 않아요. 당신 두려움을 진정시키겠다고 날 힘들게 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은 안 해요?”
“…….”
“날 위해서라는 말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거예요. 지금처럼 굴면 당신 마음이 조금은 편해질 테니까.”
나에 대한 미안함도, 당신의 두려움도 해결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