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95)화 (95/156)

#95

3월에 개원 예정이었던 보육원은 날짜를 앞당겨 문을 열었다. 내부 수리가 일찍 끝난 것도 있었지만, 보육원에 대한 아이들의 기대가 상당하다는 이유가 컸다.

실험실 아이들은 보육원 놀이터에서 뛰어놀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보호자들도 내색하진 않지만 기대하는 눈치였다.

이에 캐롤라인은 보육 교사와 간호 대학생들의 출근 일정을 조정하려 했다.

아쉽게도 이들은 빨라야 3주 뒤에나 출근이 가능하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3주 뒤여도 2월이니 예정된 날짜보단 훨씬 빠르긴 했지만, 들뜬 아이들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캐롤라인은 개원 전까지 보육원을 실험실 아이들의 임시 놀이터로 삼기로 결정했다. 보육 교사들을 대신해 보호자들이 자리를 지키기로 했으니 위험할 것은 없었다.

캐롤라인을 대신해 보육원에 온 마샤는 주변 시설물과 아이들을 꼼꼼히 살피며 개선할 점을 수첩에 정리하는 중이었다.

“아코!”

“어머, 괜찮니?”

책상 모서리에 이마를 박은 아이에 마샤는 화들짝 놀랐다.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는지 아이는 씩씩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은 원형으로 바꾸는 게 좋겠어. 아니면 모서리에 스펀지나 쿠션을 붙이든지.’

낯선 손님이 찾아온 건 한창 정신이 없을 무렵이었다.

단정한 정장을 갖춰 입은 남자가 인부 네다섯을 데리고 보육원 안으로 들어섰다.

“누구시죠?”

남자는 경계하는 마샤를 향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명패를 내밀었다.

“갑작스레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저는 노르티움 시장님의 수석 비서, 올리버 타녹이라고 합니다.”

“그런데요?”

“이디나 캐롤 보육원에 기부를 하고자 하는 시장님의 뜻을 받아 이곳에 왔습니다.”

“기부요? 그런 얘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제가 일찍 도착한 탓에 아직 전달이 되지 않았나 봅니다.”

마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의 명패를 살폈다. 그의 사진 옆에는 노르티움 시장의 직인이 커다랗게 찍혀있었다.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는 뜻이었다.

“시장님께서 복지 정책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환아들을 위한 시설이 노르티움에 세워진 것은 처음인지라 크게 감동하셨고요. 이에 기부를 명하셨습니다.”

“주변에 알린 적이 없는데. 소식이 벌써 거기까지 전해졌나요?”

“노르티움에서 일어나는 일을 시장님께서 모르실 리가 있나요.”

유쾌하게 대답한 남자는 인부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인부들은 바깥에 쌓여 있던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우와! 토끼 인형이야.”

“색연필도 있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상자를 연 아이들이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었다. 상자에는 장난감을 비롯해 질 좋은 담요와 쿠션, 고급 식료품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보아하니 전부 왕실에 납품해도 될 정도의 고급 제품이었다.

“이렇게 비싼 걸 받아도 되는 건가요?”

마샤가 걱정스레 물었다. 이건 어쩌면 노르티움 시민들의 세금일지도 모르는데.

그런 마샤의 걱정을 눈치챈 듯 타녹이 호탕하게 입을 열었다.

“시장님 외에도 뜻이 맞는 분들이 함께해 주셨습니다.”

“그렇군요.”

남자는 친히 서류를 펼쳐 마샤에게 건넸다. 후원 목록을 줄줄이 정리해 놓은 리스트 마지막엔 시장의 친필 서명이 있었다.

보육원을 운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머리는 아프고, 아이들은 산만하고, 이 와중에 후원 물품이라며 인부들은 쳐들어오고. 평소처럼 의심을 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시장이 보낸 거라니까. 까르르 좋아하는 아이들을 본 마샤는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자.”

“그러네, 정말 다뉴가 좋아하는 사자네?”

연신 사자를 외쳐 대는 다뉴에 모아가 상자에서 사자 모양 인형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아이의 시선은 인형에 향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뉴, 어디 봐?”

“바께. 사자.”

다뉴는 장난감 더미엔 관심도 갖지 않은 채 창문 쪽으로 우다다 달려갔다. 창문에 얼굴을 바짝 붙인 탓에 빵빵한 볼이 짓눌렸다.

“사자, 또 와써.”

“그때 그 아저씨?”

“웅.”

모아가 쪼르르 뛰어와 다뉴 옆에 섰다. 주변 아이들은 장난감에 정신이 팔려 있느라, 어른들은 감사의 인사를 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진짜네?”

프레져는 보육원 입구에서 한참 떨어진 자리에서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커다란 나무가 그를 가리고 있는 탓에 창문에 바짝 붙어 서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

“왜 왔지?”

“잡아머그려고. 버팔로, 얼룩말, 송아지이.”

책에서 본 먹잇감을 줄줄 읊는 다뉴에 모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작 프레져는 아이들 쪽엔 관심이 없었다. 그는 보육원 안으로 들어가는 상자들을 보며 한 남자에게 지령을 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저 아저씨도 여기 다니고 싶은 건가?”

“여기?”

“응. 자꾸 찾아오는 걸 보니까 우리랑 놀고 싶은가 본데?”

“놀아?”

어디서 본 건 많은 모아가 탐정처럼 팔짱을 꼈다. 다뉴는 입을 멍하니 벌린 채 프레져를 지켜보았다.

그때 프레져가 슥, 고개를 돌렸다. 그는 먼발치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두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안녀엉.”

동물원의 사자에게 인사를 하듯, 다뉴가 천진난만하게 손을 흔들었다. 모아 역시 다뉴를 따라 양손을 흔들었다.

이를 본 프레져는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려다 나무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 * *

“……그렇게 된 거예요. 이건 그 비서라는 사람한테 받은 증명서구요.”

“음.”

캐롤라인은 마샤에게서 서류를 받아 들었다. 갑작스러운 기부에 그녀 역시 놀란 참이었다.

“생각보다 어린이 복지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네.”

“시장은 노르티움을 대표하는 사람이잖아요. 높은 사람들은 이런 일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어요.”

“그런가.”

캐롤라인이 마샤에게 받은 서류를 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녀가 아는 높은 사람들 중에 복지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없었다. 오히려 현재의 제도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다수였다.

상속세 폐지, 평민에게 작위 수여 금지, 소작세와 임대세 증대.

이들이 원하는 것은 상류층과 하류층 사이의 명백한 선이었다.

“보여 주기식이라도 필요했나 보네.”

캐롤라인은 서류를 대충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선 풀썩 누웠다. 테이블 위엔 먹다 만 크루아상과 수프가 올려져 있었다.

“식사는 좀 하셨어요?”

“아까 전에 조금.”

몸이 아프면 가장 먼저 떨어지는 게 바로 입맛이었다. 먹은 게 없으니 체력이 떨어진 건 당연했고. 때문에 캐롤라인은 요즘 누워 있지 않는 날이 드물었다.

“그래도 좀 드셔야 할 텐데.”

“나도 먹고 싶은데 잘 안 들어가네.”

워낙 먹질 못하니 프레져는 평소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은 음식인 크루아상까지 들고 왔다. 평소였다면 눈살을 찌푸렸을 마샤도 이번만큼은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안 먹는 것보다야 기름진 것이라도 먹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캐롤라인은 이마저도 몇 입 먹지 못했다. 수프 그릇은 그대로였고 크루아상은 쥐가 갉아 먹고 간 것처럼 끝이 조금 뜯겨져 있을 뿐이었다.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몸에 안 좋은 거라도 괜찮으니까 뭐든 말씀해 주셔요. 에릭한테는 비밀로 할게요.”

“음, 딱히 없는데.”

“생크림 케이크는 어떠세요? 과일을 듬뿍 올린 빵도 맛있을 거예요.”

마샤는 캐롤라인이 좋아할 만한 음식들을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캐롤라인에게선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럼 호두파이는 어떠세요? 좋아하셨잖아요.”

호두와 시나몬을 듬뿍 넣고 만든 파이는 캐롤라인이 좋아하는 디저트 중 하나였다.

로우밸리의 구둣방 뒤편엔 유독 호두나무가 많았는데, 바닥에 떨어진 호두를 애런과 함께 잔뜩 주워가면 제뉴라가 그걸로 파이를 만들어 주곤 했다.

갓 구운 따끈한 파이를 가족들과 나눠 먹는 행복이란.

캐롤라인에게 호두파이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오르게 해 주는 음식이었다.

“진짜 먹고 싶긴 한데 안 될 것 같아.”

“왜요? 아…….”

오랜만에 입맛을 다시는 캐롤라인에 반색하던 마샤는 뒤늦게 얼굴을 굳혔다. 캐롤라인이 호두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을 뒤늦게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알레르기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즈음부터 생긴 것이었다.

몸이 허약해짐에 따라 면역력이 약해지며 몸엔 다양한 이상 반응이 생겼다. 그중 하나가 알레르기였다. 멀쩡하게 먹던 음식도 어느샌가부터 먹지 못하게 되었다.

“맛있긴 하겠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반 조각만 먹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간만에 입맛이 돌았는데 먹을 수가 없으니 아쉬웠다.

프레져가 돌아온 건 캐롤라인이 먹다 만 빵을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캐롤라인.”

어쩐 일인지 일찍 자리를 비웠던 프레져가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커다란 라탄 바구니 하나와 함께.

그가 병실 안으로 들어옴과 동시에 달큰하면서도 싱그러운 향이 훅 끼쳐 왔다.

“그건…….”

바구니 안에 든 물건을 본 캐롤라인의 눈이 커졌다. 입이 떡 벌어진 건 마샤도 마찬가지였다.

프레져가 들고 온 바구니엔 복숭아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한겨울에 웬 복숭아에요?”

“당신이 좋아하니까.”

밥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하는 캐롤라인을 걱정하던 프레져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복숭아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렇게 좋아하던 과일이니 이것만큼은 잘 먹지 않을까. 적당히 신 음식은 식욕을 돋워 주기도 하니까. 겨울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니 반가워서라도 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레져는 바구니를 테이블 위에 내려 둔 뒤 가장 탐스러워 보이는 복숭아 하나를 꺼내 들었다.

여름철처럼 잘 익은 분홍빛은 아니었지만, 하얗고 반질반질한 것이 제법 맛있어 보였다. 혀 밑에 침이 고일 정도로 상큼한 향이 병실을 가득 채웠다.

“향기 좋지?”

“……네.”

그러나 복숭아를 받아 든 캐롤라인의 표정은 얼떨떨하기만 했다.

혹시 내가 실수라도 한 건가. 프레져가 난감해할 즈음, 캐롤라인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고맙긴 한데, 나 복숭아 못 먹어요.”

“음?”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프레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식욕이 없어 할 것만 예상했지, 복숭아를 먹지 못한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여름마다 쌓아 두고 먹었잖아.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

“그랬죠. 그랬는데…….”

복숭아를 손에 굴리고만 있는 캐롤라인을 대신해 마샤가 나섰다.

“알레르기가 생기셨어요.”

“알레르기?”

“네. 몸이 약해지시면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음식이 늘었거든요. 복숭아도 그중 하나예요.”

다행히 복숭아털에는 별 반응이 없었지만 과육을 먹으면 몸에 부스럼이 올라왔다. 때문에 캐롤라인은 지난여름에도 그 좋아하는 복숭아를 먹지 못했다.

“……그랬군.”

프레져는 테이블 위에 두었던 바구니를 다시 챙겨 들었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처럼 작았다.

“몰랐어.”

같이 있으면 알았을 그녀의 변화를 프레져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가 제 곁을 떠나갔기 때문에.

그리고 그녀가 떠날 수밖에 없던 이유는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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