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에릭은 치료비와 함께 보상금을 받고 인쇄소를 그만뒀다. 몸을 다친 탓에 더 이상 일을 할 수도 없거니와, 공장이 불타 버린 탓에 돌아갈 직장이 사라지기도 한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날이 갈수록 허약해지는 캐롤라인과는 달리 에릭은 금방 안정을 되찾았다는 것이었다.
프레져가 자리를 비웠을 때 캐롤라인은 에릭과 마샤, 스테파니를 병실로 불러들였다.
“다행이다. 화상 입은 부위가 감염이라도 되면 어쩌나 걱정했어.”
“처치를 빨리 한 덕입니다. 흉이 조금 남을 것 같긴 하지만 정말 다행이지요.”
처치를 빨리 할 수 있었던 것도 의료진의 꼼꼼한 진료를 받을 수 있던 것도, 전부 프레져의 덕이었다. 캐롤라인은 잠시 자리를 비운 사람을 떠올리다 서두를 뗐다.
“에릭은 다 나은 후에 다른 일을 구할 거야?”
“흠, 생각해 보긴 하겠지만 당장은 쉴 것 같습니다.”
“실은…….”
캐롤라인은 수도의 패물을 처분함과 동시에 많은 돈이 생길 예정이라는 것, 그 금액이 세 사람이 더는 고생하지 않아도 되는 규모라는 것까지 전했다.
유산을 물려줄 거라는 건 에릭에게 말했지만 마샤와 스테파니에게는 말한 적이 없었다.
“그동안 다들 고생했잖아. 와중에 스테파니는 일까지 하느라 바빴고.”
물론 자신이 죽은 뒤에 진행될 일까진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앞으론 힘들게 일해도 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딱 그 정도 정보만을 두 사람에게 전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마샤와 스테파니의 눈은 당연히 휘둥그레졌다.
“앞으로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돼. 그러니까 스테파니랑 마샤도 좀 쉬어. 내 간병은 프레져가 하니까.”
캐롤라인의 예상과는 달리 프레져는 간병 일을 제법 훌륭하게 해내고 있었다. 물수건은커녕 손수건 한 번 빨아 본 적 없는 사람이 매시간마다 꼬박꼬박 물을 길어 와 캐롤라인의 얼굴을 닦아 주곤 했다. 약 먹을 시간도 알아서 꼬박꼬박 챙기고, 의외의 행동이었다.
“마님,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둘 생각이 없어요.”
“왜?”
역시 제가 건넨 제안이 부담스러운 걸까? 스테파니의 성정을 생각한다면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캐롤라인의 우려와는 다른 것이었다.
“사실 찻집에서 일하는 거 좀 재밌거든요.”
괜스레 부끄러운 듯, 스테파니가 인중을 긁적이며 말했다.
“손님 맞는 건 좀 귀찮은데 차 우리는 건 재밌더라고요. 향도 좋고 색깔도 예쁘고.”
“……그래?”
“네. 빵 굽는 것도요. 좀 더 열심히 배워서 나중에 가게를 차리는 건 어떨까 생각도 하고 있었어요. 아직 아무한테도 말 안 했지만요.”
그렇게 말하는 스테파니의 얼굴은 밝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제 일을 좋아하고 있었다.
“몰랐어.”
캐롤라인은 당연히 그녀가 억지로 일을 하고 있다 생각했다. 억지까진 아니어도 썩 즐거운 마음은 아닐 거라고.
‘출근 시간보다 일찍 집을 나설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관심이라곤 프레져에게만 주었지, 세 사람에게는 준 적이 없는 것 같아 캐롤라인은 부끄러워졌다. 정작 가장 가까운 곳에서 고생하고 있는 건 이들임에도.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네.”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마샤 언니한테도 말 안 했는걸요.”
“맞아요. 저도 처음 듣는 얘기에요.”
멋쩍게 웃는 스테파니를 마샤가 거들었다. 어안이 벙벙해 보이는 것을 보니 마샤도 몰랐던 눈치였다.
“그래. 본인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게 제일 중요하지.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말고.”
“네에. 저 일 잘해요.”
“저도 이젠 괜찮으니 찾아오실 필요 없습니다.”
“그건 생각 좀 해 볼게요.”
은근슬쩍 간호를 말리는 에릭에 스테파니가 눈을 가늘게 떴다.
‘돈을 직접 쥐여 주는 것보다는 스테파니가 원하는 걸 배울 수 있게 지원해 주는 편이 낫겠어.’
할 수 있다면 가게까지 차려 주는 게 좋겠지.
캐롤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제가 세상을 뜬 뒤의 일들을 구상했다. 프레져가 돌아온 것은 그때였다.
“시장 바닥이 따로 없군.”
“백작님, 오셨습니까.”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에 에릭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병실이 뭐 하는 덴지 모르나? 조용히 쉬게 해 줘도 모자랄 판에 여기에 모여서 소란을-.”
“내가 부른 거니까 그만해요.”
프레져의 타박이 이어지기 전에 캐롤라인이 나서서 그의 말을 끊었다.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서 부른 거예요. 무엇보다 이 병실 주인은 나고요.”
“…….”
“그렇게 산통 깰 거면 차라리 나가 있어요.”
단호한 목소리에 프레져는 입을 합 다물었다. 순순히 입을 다무는 프레져에 세 사람은 내색하지 않았을 뿐, 크게 놀랐다. 저리 꼬리를 마는 프레져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님, 그래도 백작님이신데…….”
“불만 있으면 알아서 수도로 돌아가겠지. 안 그래요, 프레져?”
마샤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답하는 대신 캐롤라인은 프레져를 향해 물었다. 결국 프레져는 침음을 삼키며 문고리를 잡았다.
“……다 끝나면 말해 줘. 맞춰서 돌아오지.”
사실 요즘의 프레져가 적응이 안 되는 건 캐롤라인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식으로 반응할 때마다 기가 죽는 프레져가 신기하기도 하고 또 통쾌하기도 했다. 제가 이렇게 못된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럼 저희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에릭, 천천히 가. 급하게 움직이다가 상처가 덧날지도 모르잖아.”
“이젠 괜찮습니다.”
눈치가 보여 자리에서 일어나는 에릭을 스테파니가 부축했다. 공손히 시선을 내리깔고 있는 에릭과는 달리 스테파니는 프레져를 노려보다 고개를 팩 돌렸다. 그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프레져는 코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래도 캐롤라인이 아끼는 하녀이니, 게다가 저번에 캐롤라인과 자신을 만나게 해 주려 하지 않았던가. 프레져는 너그러이 넘어가기로 했다.
“마님, 보육원 일은 말씀드린 대로 할게요.”
“응. 부탁할게.”
마샤의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을 병실을 나갔다. 사람이 셋이나 빠진 병실은 유난히 휑해 보였다. 프레져는 의자를 침대 옆으로 끌고 가 앉았다.
“보육원이라니?”
그때 갔던 곳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새 또 처리해야 할 일이 생긴 건가?
“그런 게 있어요. 당신은 알 거 없구요.”
“…….”
새침하게 대꾸하는 캐롤라인에 프레져는 입을 다물었다. 캐롤라인은 그런 프레져는 안중에도 없는 듯 협탁 위에 올려진 서류를 집어 들었다.
프레져는 그 모습에 왠지 모를 소외감을 느꼈다. 하녀들에겐 다 알려 줬으면서 자신에게만 알려 주지 않다니. 꼭 자신만 따돌리고 작당 모의를 하는 것 같지 않은가.
“……허.”
따돌림이라니. 작당 모의라니. 제가 생각해도 유치하기 짝이 없는 생각에 프레져는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캐롤라인은 그런 프레져를 이상한 눈으로 응시했다.
“갑자기 왜 웃어요?”
“그냥. 어이가 없어서.”
“……설마 내가 당신을 내쫓으려고 한 게요?”
“그럴 리가.”
프레져는 펜을 향해 손을 뻗는 캐롤라인 대신 펜을 들어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가느다란 손끝을 응시하는 시선이 왠지 모르게 복잡해 보였다.
“……섭섭한 건가.”
캐롤라인에게 묻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프레져 자신에게 묻는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까끌하면서도 여운이 긴 감정은 처음인지라 프레져는 아리송했다. 그는 어린 시절에도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
섭섭하다는 것은 모자람에서 오는 감정이었다. 태어나 지금까지 아쉬울 게 없는 삶을 살아왔으니 프레져로선 이런 감정이 생소한 게 당연했다.
“당신도 그런 걸 느끼긴 하는군요?”
그런 프레져가 생소한 건 캐롤라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게 뭔데?”
“그걸 또 말로 설명해야 하나요?”
별 의미 없이 던진 물음이었으나 프레져는 순간 아연해졌다.
‘당신한테 일일이 설명하기도 입 아파요.’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냉정하게 말하던 캐롤라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설명하는 게 지쳐서, 이런 내가 지겨워져서. 또 나를 외면하면 어쩌지.
“아니. 설명 안 해 줘도 돼.”
다시금 고개를 드는 불안함에 프레져는 황급히 입을 뗐다.
“어떤 건지 혼자서 생각해 볼게. 그러니까 힘들게 설명해 줄 필요 없어.”
“……풋.”
캐롤라인은 그런 프레져를 아리송하게 쳐다보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그의 얼굴이 사뭇 진지하기 때문이었다. 별것도 아닌 일에 저리 심각해질 필요는 없는데.
이 정도 인심은 써도 되겠지.
이건 그날 손을 잡아준 것에 대한 값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캐롤라인은 끙차, 하고 자세를 앉았다.
“어려운 거 아니에요. 예를 들자면, 나랑 제일 친한 친구가 나 빼고 다른 애들하고만 놀고 있을 때의 기분이랄까요?”
“……그게 대체 뭐지?”
잘생긴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프레져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캐롤라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더 이해하기 쉬운 예시를 들었다.
“왜, 우리 엄마는 나만 예뻐하고 나만 걱정해 줘야 하는데. 다른 일에 정신 팔려서 나한테 관심도 없을 때 있잖아요.”
아랫집에 사는 아줌마가 아기를 낳았을 때였다. 학교에 다녀오면 이디나는 항상 ‘우리 강아지!’하며 캐롤라인을 반갑게 맞아주곤 했다.
하지만 그 날은 아니었다. 이디나는 갓난아이의 깜찍함에 빠져 있느라 캐롤라인 자신을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저 아기는 분명 아무 잘못이 없는데. 작고 연약하고 사랑스러운 것에 눈이 가는 건 당연한데. 제 몫의 애정이라 확신했던 것이 다른 이에게 향할 때의 기분이란.
“섭섭하다는 게 그럴 때 드는 감정이잖아요.”
“겪어본 적 없어서 모르겠는데.”
“정말요?”
믿기 힘든 반응에 캐롤라인은 목소리를 높였다.
“어떻게 그래요?”
설마 프레져는 아기 때도 저 모양이었던 걸까? 제법 경악스러운 상상이 캐롤라인의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으니까.”
프레져의 어머니인 레이벨라 헌티드는 그가 여덟 살도 채 되기 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떴다.
그래도 여덟 살은 추억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어린 나이는 아닌데. 캐롤라인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애초에 부모님과 같이 있었던 적이 거의 없어. 옆엔 항상 유모나 시종들이 붙어있었지.”
“그래도 부모님이 돌봐주셨을 때가 있었을 거 아니에요. 밥을 먹여준다던지, 잠을 재워준다든지.”
“유모가 있는데, 굳이?”
부모는 자식을 낳고 아이가 훌륭하게 자랄 수 있도록 경제적인 지원을 함으로서 그 역할을 다한다. 아이를 키우고 교육하는 건 ‘경제적인 지원’ 절차에서 발탁된 유모나 가정 교사의 일이었다.
이는 권세 높은 귀족 가문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물론 프레져의 경우가 좀 더 엄격하긴 했지만.
“그럼 부모는 뭘 하는데요?”
“확인을 하지.”
“…….”
“잘 크고 있나, 어디 부족한 곳은 없나, 이런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