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91)화 (91/156)

#91

‘왜 이러지?’

캐롤라인은 덜컥 두려워졌다. 혀는 움직이는데 왜 목소리는 나오지 않은 걸까.

그녀는 어둠 속에서 눈을 굴렸다. 이쯤 되면 눈이 어둠에 적응돼야 하는데, 흐릿하게라도 형상이 보여야하는데, 이상하게도 앞이 조금도 보이질 않았다.

사방이 캄캄했다. 작은 빛 한 점도 들어오지 않는 탓에 위와 아래를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설마.’

이대로 죽은 건가. 여기는 죽음의 공간이라 이리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것일까.

정말 죽은 건가. 그래서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몸도 움직이지 않은 건가.

아니야, 밤일 거야. 별조차 뜨지 않은 밤이라 이리 어두운 걸 거야.

“…….”

근데 정말 죽은 거면 어떡하지. 밤이 아니면 어떡하지.

캐롤라인은 소리 없이 흐느꼈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눈물을 닦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무서웠다.

나는 죽어서도 이렇게 외롭고 아파야하는 건가. 이성적인 사고를 하기가 어려웠다.

“……흐.”

나 여기 있어. 그러니까 제발, 제발 누구든 와줘.

몇 번이나 속으로 외쳤다. 손가락을 하나를 움직이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그런 그녀를 붙잡은 건 조금 서늘한 온도의 손이었다.

마샤와 스테파니와는 다른, 훨씬 크고 딱딱한 손.

“캐롤라인?”

프레져의 목소리였다.

“캐롤라인, 왜 그래?”

낮게 가라 앉아있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편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전혀 아닌데, 희안하게도 캐롤라인은 그 음성을 들음과 동시에 안도했다.

나 살아있구나.

“잠깐만.”

프레져는 불을 켜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다시 주저앉았다. 마치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캐롤라인이 제 손을 꽉 쥔 채 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다 선잠이 든 게 잘못이었다. 잠들지 않았다면 그녀가 힘들어하기 전에 바로 의사를 불렀을 텐데.

가쁜 숨소리에 잠이 깨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나. 차라리 환청에 잠을 설치던 백작저에서의 밤이 나을 지경이었다.

“어두워서 그래. 불만 켤게.”

“…….”

“많이 아픈가?”

프레져는 캐롤라인의 손을 놓는 대신 잡히지 않은 쪽 손을 뒤로 뻗었다.

차락.

손에 잡힌 천 자락을 옆으로 젖히자 어스름한 빛이 쏟아졌다. 갑작스레 찾아온 빛에 캐롤라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이젠 제법 익숙한 무늬의 천장이었다. 백작저도, 노르티움의 집의 것도 아닌 새하얀 천장. 캐롤라인은 이곳이 병실이라는 것을 한 박자 늦게 인지했다.

“눈이 오길래. 너무 밝아서 당신이 깰까 봐.”

프레져의 말대로 창밖에선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구름이 잔뜩 껴 별 하나 보이지 않는데도 사방이 새하얬다.

그리고 창문 옆에 붙어있는, 유난히 짙은 색의 커튼.

캐롤라인은 그제야 자신이 병원에서 가장 좋은 병실을 쓰게 됐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햇빛을 사랑하는 캐롤라인과 달리 귀족들은 피부가 그을리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에 캐롤라인은 몸에 힘이 추욱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아파서 깬 거지? 금방 의사를 부를게.”

프레져는 병실을 나가려다 멈칫했다. 그는 자리를 비우는 대신 팔만 길게 뻗어 비상실과 연결된 줄을 당겼다. 이제 곧 간호사가 올 것이었다.

“……많이 아팠구나.”

프레져는 손수건으로 캐롤라인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았다.

캐롤라인은 얼마 남지 않은 힘을 짜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긴장이 풀리자 비로소 몸이 움직였다.

“그럼 악몽이라도 꿨나?”

땀에 젖은 귀밑머리를 목 뒤로 넘겨주며 물었다.

“……알고…….”

“응?”

“……주, 죽은 줄 알고.”

쩍쩍 갈라진 목소리가 목구멍을 비집고 나왔다. 젖먹던 힘을 짜내도 나오지 않던 목소리는 안도감을 느끼고 나서야 터져 나왔다.

“…….”

프레져는 무어라 입을 열지도 못한 채 캐롤라인을 응시했다. 그녀의 눈꼬리에서 떨어진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내려와 베개를 적셨다.

“무서워서…….”

캐롤라인은 매일 밤을 이렇게 지새웠을까?

어둠이 찾아오면 밤이 왔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차라리 눈이 먼 것이라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당신 안 죽었어.”

죽음을 가늠하는 삶은 어떤 것일까.

프레져는 아직까지 덜덜 떨리고 있는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듯 쥐었다.

“너무 오래 잠들어 있어 목소리가 안 나왔나보군. 당신은 먹은 것도 얼마 없으니까.”

프레져는 캐롤라인과 깍지 낀 손을 그녀의 입술 위에 얹었다. 포개진 손 위로 캐롤라인이 내쉰 숨이 느껴졌다.

“느껴져? 당신 이렇게 살아 있어.”

이젠 대답할 기운도 없는지 캐롤라인은 가만히 눈만 깜빡였다.

“이렇게 숨 쉬고 있어.”

당신의 숨이, 온기가. 아직 이렇게 머무르고 있어.

프레져는 입술 위에 얹어진 손을 제 얼굴께로 가져왔다. 그러곤 깍지 낀 손가락 마디에 제 이마를 대었다.

겨울의 밤은 이토록 긴데, 캐롤라인은 이 지독한 시간을 어떻게 버티나.

“내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군.”

픽,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감고 있던 눈을 뜨자 흐리게 웃고 있는 캐롤라인이 보였다.

“진심이야.”

대신 아플 수 없다면 그녀가 가진 고통의 무게를 나눠지고 싶었다. 이리 멀쩡한 몸으로 아픈 그녀를 보고만 있다는 것이 죄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이런 당신을 두고…….”

멍청하게 자리를 비웠었구나.

혼자 앓을 캐롤라인을 두고 내가 없는 편이 낫겠거니, 하며 두고 갔던 거였구나.

프레져는 제 손을 꽉 쥐고 있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힘없이 축 누워 있는 와중에도 캐롤라인은 손에 준 힘을 풀지 않고 있었다. 맞닿은 살갗으로 그녀가 느낀 두려움이 선명히 흘러들어왔다.

아픈 캐롤라인을 두고 림홀로 떠나던 날, 자신의 뒤통수에 대고 중얼거리던 그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당신은 아파본 적이 없으니 모르겠지.’

홀로 앓았던 어린 날, 열에 시달리며 울었던 이유는 무서워였구나.

고통 속에 혼자 남겨진 것이 지독하게도 외로워서였구나.

“이젠 안 갈게.”

어린 자신이 바랐던 것은 이렇게 손을 잡아줄 사람이었다는 것을, 프레져는 캐롤라인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커튼도 안 칠게.”

손을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캐롤라인의 얼굴은 편안해졌다. 그 모습을 보며 프레져는 더욱 짙은 후회를 느꼈다.

감히 당신의 고통을 가늠할 수는 없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나눠질 수 있다면. 그래서 당신의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다면.

“계속 옆에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어울리지 않게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 어색한 말투에 안도하며 캐롤라인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병실 안으로 간호사가 뛰어 들어오는 소리와 함께 잠이 쏟아졌다.

* * *

프레져는 아침이 되자마자 건물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병원장실이었다. 캐롤라인은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하는데 더 이상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연락도 없이 찾아온 프레져에 병원장은 허둥지둥 그를 맞이했다.

“외과 의사들과 연락을 해 보겠다 하셨지요. 어떻게 됐습니까?”

“그게…….”

병원장은 난감한 얼굴로 결론을 전했다. 글랜포드는 물론, 이 대륙의 어떤 의사들을 불러와도 치료가 어렵다는 말이었다.

“저번에 말씀드렸던 수술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저희 병원과 협약을 맺은 마리아 병원에서 연구 중인 수술 말입니다.”

클리브 헤이오스가 연구 중이라던 수술이었다. 그자의 조상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의 아버지는 얼마나 저명한 의사인지, 또 본인은 얼마나 똑똑하고 의욕적인지. 병원장에게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의사들뿐만이 아니라 화학자, 공학자, 기계공들까지 참여하는 대규모의 실험입니다. 그 유명한 리거웰 박사까지 모였으니 분명 방법을 찾아낼 겁니다.”

“기계공이라니요?”

매일 의학 서적을 읽고 의사들에게 자문을 구한다 한들, 프레져의 지식엔 한계가 있었다. 평범한 귀족인 그로선 어째서 병원에 기계공이 필요한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심장을 직접 수술하는 방법과 함께 심장 일부를 대신할 부품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수술 시간 동안 환자에게 산소를 공급해 줄 기계도 함께요.”

설명은 이전에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장황했다. 그러나 프레져에게 중요한 것은 실험의 규모와 의의 따위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 실험은 언제쯤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답니까?”

“…….”

“올해 안에 성공할 순 있는 겁니까?”

병원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실험이 성공적으로 끝나는 건 몰라도 얼마나 빨리 끝날지는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프레져는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머리를 헤집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 나서고 싶은데. 제가 아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이 되고 있는지 알려 주시죠. 현재 어디까지 연구했고 어느 부분이 가장 문제가 되는지.”

“그, 그건 아직 전해진 바가 없습니다. 설령 물어본다고 한들, 구체적인 사항은 그쪽에서도 함구할 거라…….”

병원장이 프레져의 눈치를 살금살금 살피며 대답했다. 내부 사항이라고 하니 마리아 병원까지 찾아간다고 해도 설명을 들긴 어려울 터였다.

“그 연구를 후원하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됩니까?”

“예? 아, 현재는 그레타에서 총 세 개의 병원이 경제적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왕립 대학에서 교수들과 기계 부품을 지원하고 있고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프레져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입을 열었다.

“헌티드 가문에서 마리아 병원의 연구를 다방면으로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필요한 돈은 물론이고 연구에 동참할 공학자들과 기계공들까지 보내도록 하죠.”

“예? 갑자기요?”

갑작스런 후원에 병원장은 멍청하게 되물었다.

“대학을 포함하면 겨우 네 곳에서 후원을 받고 있다는 얘긴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규모가 너무 작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맞댈 머리는 많을수록 좋습니다. 거기에 경제적 지원까지 더해진다면 연구에 더욱 도움이 되겠지요.”

그러면 캐롤라인을 치료할 방법을 더 빨리 알아내게 될지도 몰랐다.

“의학이라면 모를까, 공학은 그레타보다 글랜포드가 훨씬 능합니다. 그레타는 찾아내지 못한 답을 글랜포드라면 찾아낼지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었다. 헌티드 가문의 기계공을 보내두면 그들을 통해 연구의 진척 상황을 보고받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럼 일단 마리아 병원에 연락을 해 보겠습니다. 좋은 제안이니 분명 동의할 겁니다.”

“네. 답이 오는 대로 지원금을 보내도록 하죠. 이외에도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하라 전해 주십시오.”

프레져는 일방적인 통보를 남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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