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식사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앞으론 끼니때마다 음식이 배달 올 거야.”
“…….”
“기름지지 않고 덜 자극적이게 요리하라고 했으니까 기존에 먹던 것보다는 더 몸에 좋을 거고.”
“…….”
“간이 밍밍할 수도 있겠지만 다 나을 때까지 조금만 참-.”
“프레져.”
캐롤라인의 부름이 있고서야 프레져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느라 주절주절 말하던 것을 멈췄다.
“그만하고 적당히 있다 가요.”
“툭하면 쓰러지는 사람을 어떻게 혼자 둬.”
“지금까진 잘 그래 왔잖아요.”
“…….”
프레져의 입이 풀이라도 붙은 것처럼 다물렸다. 캐롤라인은 프레져를 책망하기 위해 이 말을 꺼낸 게 아니었다.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지내 주면 안 돼요? 당신이 있으면 내가 불편해요.”
“…….”
“그리고 나, 솔직히 당신이 미워요. 미운 사람을 계속 보고 있는 것도 나한테는 일이에요.”
“미안해. 하지만…… 안 되겠어.”
“프레져.”
“당신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워.”
물론 그가 여기 남는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당신이 아파하는 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다면,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 당신 말처럼 나는 평생을 후회하게 될 것 같아.”
‘그 마음이 뭔지 당신이 아는 날이 오려나 모르겠네요.’
“그 마음을 알아 버렸는데, 어떻게 당신을 두고 가.”
“…….”
캐롤라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눈에 보이지라도 않으면 나을까 싶어 이불을 눈썹까지 끌어 올렸다.
“없는 것처럼 조용히 있다 갈게. 곁에만 있게 해 줘.”
저리 애원하는 것처럼 말하니 프레져의 주장처럼, 자신이 정말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캐롤라인은 잠시 그러고 있다 이불을 걷었다.
일단은 병 수발이라도 들게 하자. 나는 환자고 피곤하니까.
“……거기 있는 약 좀 줘 봐요.”
“이거?”
프레져는 반색했다.
“그거 말고 옆에 있는 작은 봉투요.”
프레져가 맞게 찾은 약과 함께 물컵을 내밀었다. 컵에 담긴 물을 본 캐롤라인이 미간을 가늘게 찌푸렸다.
“양이 너무 적어요.”
“절반 넘게 따랐는데 부족해?”
“네. 넘치지 않을 정도로만 가득 따라 줘요.”
아리송한 표정을 짓던 프레져는 캐롤라인이 약 뚜껑을 열고 나서야 그 뜻을 이해했다.
“그렇게…… 많이 먹나?”
“그러니까 물을 많이 따라 달라고 했잖아요.”
“약도 너무 큰 것 같은데.”
“원래 이래요.”
얼마 전까지도 삼키기 힘들어했던 알약을 캐롤라인은 이제 꿀떡꿀떡 잘도 삼켰다. 목구멍이 작은 탓에 약 한 알에 물 두 모금씩을 마셔야 하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프레져는 그녀가 약을 전부 삼키길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 콘월 후작이라고 아나?”
“당신이 자선 행사에서 난동을 부렸다는, 그분이요?”
“…….”
“네. 알아요.”
순간 너무 당연한 듯 대답해 캐롤라인은 멈칫했다. 꼭 자신이 프레져의 기사만 하루 종일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매일 신문에 실리는 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그 같은 유명인의 행보는 매일 같이 신문에 기록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정작 프레져는 다른 걱정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캐롤라인이 자신을 무뢰배로 보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된 것이었다.
먼저 자신을 도발한 건 콘월 후작이었는데. 근데 또 구차하게 그런 사실을 늘어놓고 싶진 않았다.
“아무튼, 콘월 후작이 제약 회사를 가지고 있어. 제법 규모가 커. 잘 말하면 당신이 먹는 약도 좀 더 순하고 효능이 좋은 걸로 개발할 수 있을지도 몰라.”
“……정말요?”
“응. 생각난 김에 오늘 바로 연락해 봐야겠군.”
의사들만 찾아다닌 게 무색할 정도였다. 기사를 보니 기계공들도 심장 수술 연구에 참여한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찾아볼 범위를 넓혀야 할 것 같았다.
“수도에 돌아가게 되면 직접 이야기를 해 봐야겠어.”
피해의식에 빠진 약쟁이와 무슨 대화가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캐롤라인을 살리기 위해서야 개소리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필요하다면 그가 불법 약물에 손을 댄다는 점을 이용해 협박할 생각도 있었다.
“수도에 가게 되면 내가 말한 거 꼭 부탁해요.”
“어떤 거?”
“내 물건이랑 부동산이요. 꼭 처분해 줘요.”
“…….”
“처분이 어렵다면 부동산은 명의만 바꿔 줘도 괜찮아요.”
어떻게 시작하든 두 사람의 대화는 꼭 이런 식으로 끝났다. 프레져가 어떻게든 거리를 좁혀 보려 하면 캐롤라인은 지금처럼 선을 그었다.
“내가 안 죽을 거라는 말은 말고요.”
“……당신 재산은 당신이 계속 가지고 있어. 세 사람 몫은 내가 알아서 챙길 테니까.”
“고맙지만 됐어요.”
“불편해서 그러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그런 게 아니에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해결하고 싶어서 그래요.”
제 재산이 원래는 프레져의 것이었다는 걸 캐롤라인은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건 조금이라도 떳떳해지고 싶은 캐롤라인의 욕심이자 고집이었다.
프레져의 힘을 빌리는 게 아니라, 온전히 자신의 힘만으로 세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다.
“알았어. 당신 뜻대로 할 테니까 이제 말 그만하고 누워.”
사실 프레져는 캐롤라인의 물건을 처분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세 사람에겐 따로 크게 보상해 줘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프레져는 캐롤라인을 눕혔다.
“고마워요.”
“……그놈의 고맙다는 말은 꼬박꼬박 하는군.”
“불편한 건 불편한 거고,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요.”
캐롤라인이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이불을 끌어당겼다.
프레져는 그 웃음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했지만 무어라 다그칠 수는 없었다. 그녀가 그어 둔 선을 먼저 넘은 건 자신이었기에.
프레져가 선을 넘어 바깥을 돌아다니는 동안 캐롤라인은 그가 안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선 위에 벽돌을 쌓고 진흙을 발랐다. 이를 무너뜨리고 뛰어넘는 건 오로지 프레져의 몫이었다.
“그건 그렇고, 그 심장 수술이라는 게 클리브 헤이오스가 연구하고 있다는 건가?”
프레져는 자연스럽게 화두를 돌렸다.
“맞아요. 세상에 그분만큼 좋은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
“똑똑하고 다정하시고. 게다가 사명감까지 넘치시죠.”
괜히 이야기를 꺼냈군.
줄줄 이어지는 칭찬에 프레져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그의 다정함이 오로지 캐롤라인에만 한정된 것인지, 아니면 이 세상의 모든 환자들을 향하고 있는 건지, 프레져는 알 길이 없었다.
“그자보다 뛰어난 의사들도 많지. 얼마 전에 수도의 외과 의사 하나와 연락이 닿았는데…….”
다시 말을 돌리려는 때였다.
“으윽.”
갑자기 시작된 흉통에 캐롤라인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말간 얼굴이 일그러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캐롤라인!”
놀란 프레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분명 이럴 때를 대비한 매뉴얼이 있는데. 간호사와 마샤에게 몇 번이나 신신당부 받았는데. 머릿속이 새하얘져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의사…….”
“으, 응.”
쥐어짜듯 뱉은 목소리를 듣고서야 프레져는 제가 해야 될 일을 상기했다. 그러곤 황급히 병실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간호사는 금방 의사를 데리고 들어왔다.
“어,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프레져는 몇 번이나 말을 더듬었다. 지나치게 긴장한 탓에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했다. 의사도 그걸 아는지 대답하지 않고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기만 했다.
간호사가 캐롤라인의 혀 밑에 알약을 넣고 의사가 그녀의 팔에 주사를 놓음으로써 모든 일이 끝났다.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처럼 꺽꺽거리던 캐롤라인은 몽롱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일시적인 발작입니다. 적절한 약물을 투여했으니 곧 괜찮아질 겁니다.”
두려움에 턱이 덜덜 떨렸다. 프레져는 이를 티 내지 않기 위해 이를 꽉 깨물었다. 어느새 캐롤라인은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정말 괜찮은 것 맞습니까?”
그 모습이 부러질 듯 약해 보여 프레져는 의사에게 다시 물었다. 괜찮다는 사람이 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진정제를 놔서 그렇습니다. 환자가 많이 지쳤어요. 안정이 필요합니다.”
“…….”
캐롤라인은 지쳤다. 그 말보다 그녀의 상태를 잘 표현해 주는 말은 없었다. 살고 싶다는 열망과 달리, 병마는 그녀를 조금씩 갉아먹어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
“앞으로 위급 시에는 여기 달린 줄을 세게 잡아당기면 됩니다. 이전에 있던 간병인이 안 알려 줬습니까?”
“알려 줬습니다. 알려 줬는데 생각나질 않아서…….”
“앞으로는 밖으로 나오지 말고 줄을 당기세요. 그게 더 빠릅니다.”
할 일을 마친 의사와 간호사는 자리를 떴다. 눈을 감고 있던 캐롤라인은 문이 닫히는 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
프레져는 캐롤라인의 머리맡에 앉아 손으로 그녀의 눈을 덮었다.
“한숨 자.”
“안 졸려…….”
“그럼 눈만 감고 있어. 힘들잖아.”
“으응.”
작은 얼굴 위에 얹어 둔 손이 아직도 미세하게 떨렸다. 순식간에 휘몰아친 일에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았다.
캐롤라인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손바닥에 기다란 속눈썹이 스쳤다. 여린 살을 몇 번 간질거리던 속눈썹은 머지않아 움직임을 멈췄다. 이윽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프레져는 그새 바싹 마른 캐롤라인의 입술에 연고를 발랐다. 캐롤라인은 누군가 제 얼굴에 손을 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곤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정작 프레져의 손은 아직도 떨리고 있는데도.
머지않아 하늘이 흐려지고 눈이 쏟아졌다. 내리는 눈에 캐롤라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프레져는 새근새근 잠든 캐롤라인의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보다 커튼을 쳤다. 조금의 방해도 없이 그녀가 편히 쉬기를 바라며.
* * *
연약해진 몸은 체력을 비축하려는 듯 아주 오랜 시간을 잠만 자게 만들었다. 이렇게 쓰러진 날이면 캐롤라인은 대부분의 시간을 잠든 채 보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캐롤라인은 잠드는 것마저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불현 듯 잠에서 깨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었다.
“흐음…….”
오늘도 그랬다. 서늘한 공기가 옅게 잠들어 있던 캐롤라인을 깨웠다.
으슬으슬 한기가 느껴졌다. 캐롤라인은 이불을 코끝까지 끌어올릴 요량으로 몸을 뒤척였다. 아니, 뒤척이려고 했다.
뻣뻣하게 굳은 다리는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누군가 바늘로 발바닥을 찌르는 것처럼 따끔거리기까지 했다.
종아리가 저려올 무렵이 되어서야 캐롤라인은 번뜩 눈을 떴다. 사위가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밤인가?’
그런 것 같았다. 해가 지면 유독 몸이 말을 듣지 않았으니.
상태가 더 안 좋아지기 전에 사람을 불러와야했다.
캐롤라인은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마샤와 스테파니를 부르기 위해 입을 벌렸다. 자신이 부르면 그녀들은 언제나 달려와 줬으니까.
잠에서 덜 깨 비몽사몽 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미안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새카만 밤,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면 캐롤라인은 무서웠다. 자주 있는 일임에도 그랬다.
캐롤라인은 입을 벌렸다. 마샤, 하고 부르기 위해 혀를 궁글렸다.
“…….”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벌린 입술 사이로는 바람 빠진 소리 밖에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