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다행이네요. 사실 오늘 당신을 찾아온 건 그걸 전부 처분하기 위해서거든요.”
“……어?”
프레져가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캐롤라인은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보석이랑 장신구도 그렇고, 패물이 꽤 되잖아요. 그걸 팔면 돈이 꽤 많이 나올 거예요.”
꽤 많이가 아니었다. 캐롤라인이 가진 금품을 전부 돈으로 환산한다면 건물 몇 채는 족히 될 터였다.
“당신 눈치가 보여서 처분하지 못했던 부동산도 두어 개 더 있고요.”
“…….”
“하는 김에 그것들도 다 매각할 생각이에요.”
프레져가 싫다고 온 힘을 다해 말해 놓고. 필요할 때만 그를 찾는 자신이 약아빠진 것처럼 느껴졌다. 겨우 한다는 이야기가 돈 문제인 것도 우스웠다. 따지고 보면 그것들은 전부 프레져가 자신에게 넘겨준 재산이었으니.
‘염치없는 건 잠깐이야. 어차피 난 곧 죽잖아. 남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얼굴에 철판 까는 것쯤이야.’
캐롤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을 다잡았다.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되면 운이 좋은 거고. 그렇게 마음먹기로 스스로와 약속했다.
“왜?”
프레져가 테이블을 짚은 채 상체를 세웠다. 그 탓에 찻잔이 달그락거리며 찻물이 튀었다.
“혹시 치료비가 부족해서 그러는 건가? 그런 거라면 내게 말해. 얼마든지 내 줄 테니까.”
“돈이 부족한 건 아니에요.”
치료비가 워낙 비싸긴 하지만 저축해 둔 게 있기에 문제가 되진 않았다. 보육원을 세운 데 쓴 돈을 제외하곤 세 사람 몫으로 남겨둔 유산도 그대로였다.
“이번에 에릭이 다친 건 근무 중에 깜빡 졸았기 때문이에요. 나를 간호하다가요. 그건 마샤와 스테파니도 마찬가지예요. 세 사람 모두 나 때문에 제대로 못 쉬고 있어요.”
“…….”
“어차피 나는 오래 살지 못하잖아요. 당신한텐 염치없는 말이긴 하지만, 세 사람이 일하면서 겪는 고생을 덜어 주고 싶어요. 제대로 된 보상을 해 주면서요.”
“당신은 안 죽어.”
“자꾸 부정하지 말아요, 프레져. 난 곧 죽어요.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고요.”
“아니야. 분명 방법이 있어. 분명.”
“…….”
“내가 말했잖아. 당신과 치료에 대한 이야길 나누고 싶다고.”
프레져가 다급히 캐롤라인의 손을 붙잡았다.
“오늘 병원장을 만난 것도 그것 때문이야. 왕국의 유명한 외과 의사들을 전부 끌어모으라 했으니 안 될 것도 없어.”
“프레져.”
“안 되면 그레타로 가면 돼. 병원장이 그레타의 왕립 병원에 연락을 넣을 거랬으니까……. 그래. 거기라면 다를 거야. 그레타의 의학은 대륙 최고니까.”
“나라고 손써 보지 않은 거 아니에요.”
“그레타가 안 되면 다른 곳으로 가자. 대륙을 건너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아. 그곳 의학은 아직 알려진 바가 없으니까.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방법이-.”
“그만해요, 프레져.”
캐롤라인은 프레져에게 잡히지 않은 반대쪽 손을 제 손을 그러쥔 그의 손 위에 올렸다. 슬며시 가해지는 압력에 프레져는 쏟아 내듯 말하던 것을 멈췄다.
“왜 이래요. 당신답지 않게.”
그는 프레져 헌티드다. 해결되지 않을 일에 시간을 쏟는 멍청이가 아니다.
가망이 전혀 없는 일은 깔끔하게 놓아 버리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당신이 프레져 헌티드고, 헌티드하우스의 대표라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어요.”
“대체 뭐가 나답지 않다는 거지?”
손아귀를 빠져 나가려는 작은 손을 프레져가 놓치지 않고 붙잡았다.
“당신 말대로 나는 프레져 헌티드야. 내가 못 할 일은 이 세상에 없어. 지금껏 모든 일이 그랬으니까.”
“…….”
“나는 한다면 해. 당신도 알잖아.”
“당신은 정말 어리석네요.”
어리석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말에 프레져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캐롤라인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팔목을 비틀어 잡힌 손을 빼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모두 똑같아요. 그건 왕이 온대도 달라지지 않아요.”
“…….”
“당신처럼 똑똑한 사람이 왜 그걸 몰라요.”
이젠 인정하면 안 돼요?
캐롤라인이 작게 덧붙였다. 그녀의 얼굴에 어린 체념에 프레져는 손으로 제 뺨을 쓸어내렸다.
“나는…….”
프레져 헌티드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캐롤라인의 죽음도, 극단의 위기도, 모두 그럴 리 없다 부정했던 이유는 지금껏 그의 인생에 이런 위기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현실을 부정한 이유는 하나 때문이었다.
“안 좋은 말을 입 밖으로 내면 그게 현실로 이뤄진다고…… 당신이 그랬잖아.”
“…….”
“말하지 않으면 현실이 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게 어린애들이 하는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라도 믿고 싶었다.
부정해서 현실을 피할 수 있다면, 그게 우매한 짓인 걸 알아도 하고 싶었다.
“캐롤라인, 나는 두려워.”
“……왜 두려운데요?”
“당신을 잃을까 봐.”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캐롤라인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이겼다. 지금까지 있어도 없는 척 잘 살아 놓고.
“그게 왜 두려워요.”
“당신이 소중해서. 소중한 당신을 잃을까 봐.”
“…….”
“그래서 두려워.”
프레져는 눈을 꾹 감았다. 그러자 저 밑에 파묻혀 있던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두려움, 겁, 상실감… 이런 것들은 자신의 인생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 생각했다. 부모가 죽었을 때도 그는 상실의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애초에 무언가를 잃어 본 적도 없었고 의미를 둘 만큼 소중한 것을 가져 본 적도 없었다. 가져 본 적이 없으니 잃는 두려움을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캐롤라인은 달랐다. 그녀가 자신 몰래 사라짐으로써 자신은 반쯤 미쳐버렸고, 그녀가 시한부라는 말을 들었을 땐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때 나설걸. 사람들이 말려도 뛰어들걸. 그러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열심히 노력해도 후회가 생기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얼마나 후회하게 될까요.’
꼭 제 감정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 캐롤라인에 프레져는 계속 생각했다. 그러자 비로소 캐롤라인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자신이 이리 정신 나간 인간처럼 구는 이유는 그녀가 제게 너무도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기에.
어느 순간 슬그머니 들어왔던 그녀가 제 인생을 쥐고 흔들고 있으니까.
“너무 늦었지만…… 이제 알았어, 캐롤라인.”
“…….”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
소중한 사람이 생긴다는 건 나약해지는 거구나.
프레져가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캐롤라인의 눈가를 훔쳤다.
어느새 캐롤라인은 울고 있었다.
“왜, 왜 이제 와서…….”
당신을 이미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거들떠도 보지 않으려 했는데. 당신이 그렇게 말해 버리면.
“미안해.”
“…….”
“내 마음 하나 몰라서, 당신을 혼자 앓게 해서 미안해, 캐롤라인.”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는 멍청이라 미안해. 당신의 말을 듣고서야 당신을 이해하는 나라 미안해. 그러니까…….
“제발 죽지 마.”
* * *
캐롤라인은 도망치듯 자리를 뛰쳐나갔다.
승강기가 지상에 도착함과 동시에 디딘 걸음이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캐롤라인은 빠르게 복도를 지나 병원 밖으로 나섰다.
스스로조차 어디로 향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친 에릭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마샤도, 로우밸리에 있을 가족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머릿속엔 오직 한 가지 물음만 들어찼다.
왜?
왜 이제 와서?
그 답을 알 수 없어서 캐롤라인은 걸었다. 그저 걸었다.
쫓아올 사람도 없는데 꼭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속도를 높였다.
숨이 차오를 때가 돼서야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어느덧 그녀는 낯선 장소에 도착해있었다.
어디인지 모를 곳까지 오고 나서야 캐롤라인은 깨달았다.
나는 내 마음에 쫓기고 있구나. 프레져에게 기우는 마음을 외면하려 도망치고 있는 거구나. 이렇게 필사적으로.
캐롤라인은 길 한복판에 우두커니 선 채 손바닥에 고개를 묻었다.
꼭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잃어버린 부모를 찾는 아이 같던 삶이었다. 수십 번을 기대하고 실망하길 반복하면서도 제 마음은 끊임없이 프레져를 찾아 헤맸다. 프레져를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건 실낱같은 희망조차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였다.
이젠 홀로 나아가야지. 남은 시간만큼은 오로지 나로서 행복해져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프레져를 떠나 다양한 세상을 경험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굳건하진 않지만 쉽게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는 성장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부 착각이었다.
프레져의 말 한마디에 이리 휘청일 만큼, 제 마음은 아직도 나약하기 짝이 없다.
“하하, 하…….”
캐롤라인은 실소를 터트렸다.
웃음과 눈물이 뒤섞인 괴이한 얼굴에 행인이 그녀를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왜 이제 와서.”
막상 죽을 때 되니 아쉬워지기라도 한 건가. 늘 있던 것이 없어진다니 공허하기라도 했나.
차라리 그런 속내라면 마음껏 욕이라도 할 텐데. 그의 눈은 너무도 진솔한 빛을 띠고 있어 그러지도 못했다. 그래서 더 원망스러웠다.
“멍청이.”
캐롤라인은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바닥에 닿은 치마 끝단이 더러워졌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자기 감정 조차 모르는 멍청이로 평생 살지는. 왜 그걸 이제야 깨달아서 나를 억울하게 만드나.
결코 그에게 돌아가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다시 사랑이 샘솟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억울했다.
“……진작에 좀 말해주지.”
왜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나. 왜 그 말 한마디를 못해서 그 좋은 시절을 허투루 보내게 만들었나.
차라리 당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천치였다면 나는 그저 당신을 미워하기만 하다 눈감을 수 있을텐데.
왜 당신을 마음 편히 원망할 수도 없게 만드나.
이젠 무엇을 미워해야할지 알 수 없어서. 그리고 자신에게 찾아온 이 모든 상황이 서럽기 짝이 없어서. 캐롤라인은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