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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87)화 (87/156)

#87

“소방대가 빨리 와 준 게 천만다행이지요.”

“그 공장 문 닫아야 되는 거 아니에요? 어떻게 고장 난 기계를 계속 쓸 수가 있어요?”

“이쪽 일이 다 그렇습니다.”

오래된 기계를 중고로 매입해서 고치고 또 고쳐 쓰고.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부리는 술수는 글랜포드 산업 현장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였다.

“깜빡 존 제 잘못이 큽니다.”

에릭이 허허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자세히 보니 뺨에도 작은 생채기가 몇 개 나 있었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습니다. 가벼운 화상으로 그쳐서 다행이죠.”

“에릭한테 크게 다친 거의 기준이 뭐예요? 뼈 하나 정도는 부러져야 되는 거예요?”

스테파니가 입술을 삐죽였다. 마음 같아선 등짝을 한 대 때리고 싶었지만 아픈 사람이니 그럴 수도 없었다.

“평소에 덤벙대는 성격도 아니면서. 이번엔 왜 그러셨어요.”

“이젠 완전히 적응한 줄 알았는데. 아직 일이 손에 익지 않았나 봅니다.”

대학을 그만둔 이후론 나름 쉬운 일만 전전하다 보니 몸 쓰는 일에 대한 감을 잃은 모양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 변한 제 모습이 신기해 에릭은 피식 헛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마요!”

결국 스테파니가 에릭의 등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물론 얼마 가지 않아 마샤에게 제지당하고 말았지만.

스테파니의 뒤에 선 캐롤라인은 조용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에릭이 업무 중에 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 때문에 통 못 잤으니까.’

에릭은 해가 뜨기 전 출근해 점심 즈음 퇴근했다. 그런 의미에서 해 질 무렵은 에릭에겐 취침 시간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요 며칠 에릭은 제시간에 잠들지 못했다. 해가 지면 캐롤라인의 몸이 더 안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려 걷기 힘들 때면 늘 에릭이 캐롤라인을 안아서 옮겼다. 세 사람 중 에릭만큼 의학에 빠삭한 사람도 없었기에 캐롤라인의 상태가 많이 좋지 않을 때면 에릭이 주로 그녀를 간호했다.

에릭은 원체 바쁘게 사는 사람이라 잠이 없는 편인데, 그런 그가 기계가 터지는 것도 모르고 졸았으니 얼마나 피곤할진 말하지 않아도 짐작 가능했다.

‘내가 진작에 입원을 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병원엔 의사도 있고 주기적으로 상태를 확인하러 오는 간호사도 있으니까. 그러나 자신은 병원이 싫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집을 피웠다. 제 이기심이 결국 에릭을 다치게 만든 것이었다.

“마샤 언니는 마님이랑 같이 있어야 하니까 에릭은 내가 간호할게.”

“나 그렇게 시간 없지 않아. 한 번씩 찾아올 여유는 있어.”

“그래? 그러면 내가 퇴근하기 전에만 언니가 신경 좀 써줘. 다행히 손은 다치지 않았으니까 식사는 혼자…….”

마샤와 스테파니는 에릭을 간호하기 위해 없는 시간을 쪼개기 시작했다. 이에 캐롤라인은 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진작 프레져한테 패물 좀 처분해 달라고 할걸.’

제가 시한부라는 걸 프레져가 알게 된 이상 어려울 것도 없었다. 급하게 도망치느라 미처 처분하지 못했던 장신구와 예술 작품을 처분하면 제법 큰 돈이 나왔을 텐데. 그럼 스테파니와 에릭이 일하지 않아도 됐을 터였다.

‘차라리 보육원을 짓지 말 걸 그랬어.’

씀씀이가 워낙 검소하기도 하고, 지금 살고 있는 집 역시 마샤가 저렴하게 얻은 덕에 돈이 새는 부분은 없었다.

보육원은 세우고 싶긴 한데, 세 사람에게 남겨 줄 유산엔 손대긴 싫고.

그래서 캐롤라인은 수중에 있는 돈을 짜냈다. 딱 치료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만.

그게 스테파니와 에릭이 일을 관두지 못하는 이유였다.

‘당장 내 옆의 사람도 보지 못하는 주제에 누굴 돕겠다고.’

캐롤라인은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속상하긴 하지만 또 나 때문이라며 분위기를 초 치고 싶지 않았다. 이 착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제 짐을 덜어 주려 애쓸 테고, 에릭은 그런 제가 신경 쓰여 편히 쉬지도 못할 터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간호가 필요할 정도로 다친 건 아니니 저 말고 마님을-.”

“제대로 걸어 다니지도 못하면서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예요?”

“맞아요. 그러다 흉이라도 남으면 어쩌려고. 원래 화상 흉터가 제일 위험한 거 몰라요?”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는 에릭을 두 여자가 매몰차게 거절했다. 에릭이 의대를 다녔다는 사실은 이젠 중요치 않았다.

“무리하다가 상처 덧나기만 해봐요. 진짜 가만 안 둬.”

스테파니가 에릭의 어깨를 찰싹 때리다 또 마샤에게 저지당했다.

캐롤라인은 아웅다웅하는 세 사람을 지켜보다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왔다.

“마님, 어디 가세요?”

“잠깐 홉킨스 박사님 좀 뵈고 오려고.”

“그럼 저랑 같이 가요.”

“아냐. 어차피 같은 건물이니까 따라오지 않아도 돼. 나 말고 에릭한테 신경 써 줘. 수술 끝난 지도 얼마 안 됐잖아.”

“그럼…… 알겠어요. 금방 돌아오실 거죠?”

“응.”

캐롤라인은 곧장 홉킨스 박사의 개인 연구실로 했다. 다행히 오늘 그는 비번이라 예정된 진료가 없었다.

“선생님,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실까요?”

“캐롤라인 헌티드 씨군요. 네, 괜찮습니다. 들어오세요.”

캐롤라인은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걸어가 홉킨스 박사 앞에 앉았다. 쉬는 날 찾아온 게 미안해서였다.

“선생님 말씀을 계속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입원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가능하면 빨리요.”

“환자분이 그러시다면야. 원하시면 오늘 중으로도 가능합니다만?”

“오늘은 어려울 것 같고…… 내일 오전 중으로 가능할까요? 급한 일이 있어서요.”

오늘 입원을 하게 되면 짐을 가지러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럼 마샤와 스테파니만 번거로워지겠지.

“알겠습니다. 이 서류를 접수대에 제출하시면 바로 처리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캐롤라인은 입원 서류를 받아 들고 연구실에서 나왔다. 이로써 세 사람을 편하게 해 주려는 목표는 달성한 참이었다.

이번 목표는 프레져였다.

‘그 사람이 있을 만한 곳이 어디일까?’

고민하던 캐롤라인은 복도에서 익숙한 인영을 발견했다. ‘외과 전문의’라 쓰인 명찰을 단 의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남자의 정체는 휴고였다.

“휴고가 왜 여기에 있어요?”

“마, 마님.”

“그 사람이 시켰군요.”

“죄송합니다.”

“사과할 필요 없어요. 덕분에 소방대도 빨리 도착했고 에릭도 늦지 않게 치료받을 수 있었으니까. 아니에요?”

휴고는 대답하는 대신 멋쩍은 듯 눈알만 굴렸다.

캐롤라인은 외과 의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손에는 에릭의 의료 차트가 들려 있었다. 보아하니 그가 에릭의 진료를 담당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이 역시 프레져가 시킨 거겠지.

“프레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캐롤라인은 프레져의 호의를 못 본 체하고 입을 열었다.

“이야기 나눌 게 있어서요.”

“대표님은 지금 꼭대기 층 병원장실에 계십니다.”

“고마워요, 휴고. 그럼 편하게 이야기 나누세요.”

캐롤라인은 휴고와 의사에게 눈인사를 하곤 승강기에 올랐다. 꽤 많은 승객들이 함께였다.

층이 오를 때마다 함께 탄 사람들이 하나둘씩 내렸다. 꼭대기에 도착했을 때 남아 있는 사람은 캐롤라인 한 명뿐이었다.

덜커덩, 도르래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눈앞에 나타난 건 복도가 아닌 감람빛 넥타이에 베이지색 코트를 입은 남자의 가슴팍이었다.

“……프레져?”

“캐롤라인, 당신이 왜 여기에 있지?”

프레져는 승강기 안에 들어오지 않고 서 있었다. 두 뼘밖에 되지 않는 두 사람의 거리를 승강기가 가르고 있었다.

“당신한테 할 말이 있어서요. 휴고가 병원장실에 있을 거라고…….”

드르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프레져는 닫히는 문 사이로 황급히 손을 밀어 넣었다. 승강기가 크게 덜컹이더니 다시금 문이 열렸다.

“뭐하는 거예요. 위험하게.”

“닫히려고 하기에. 일단은.”

프레져는 캐롤라인의 손을 잡은 뒤 제 쪽으로 가볍게 당겼다. 그녀의 얄팍한 몸은 어떤 저항도 없이 힘에 끌려왔다. 곧 문이 닫히고 승강기가 아래로 내려갔다.

“……당신이 타면 됐잖아요.”

“저런 고철엔 타고 싶지 않아. 덜컹거리는 데다 위험하기까지 하잖아.”

“설마 여기까지 걸어서 올라온 건 아니죠?”

“그렇다면?”

캐롤라인은 프레져에게 밀착되어 있던 제 몸을 뗐다. 그가 승강기를 싫어한다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자신은 몸이 안 좋아 승강기를 탈 수밖에 없으니 돌아가는 길이 겹치진 않을 터였다.

“보아하니 안쪽에 응접실이 많더군. 잠시만 쓰겠다고 하면 자리를 내어 줄 거야.”

프레져가 먼저 복도 안쪽으로 걸어갔다. 남의 응접실을 막 써도 되는 건가, 의아해졌지만 캐롤라인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프레져 헌티드가 아니던가.

감히 헌티드 백작의 청을 거절할 사람은 이 왕국에 없었다.

다행히 고층엔 병원장실을 비롯한 이사장실, 회의실 등이 모여 있었고 두 사람은 병원장의 비서에게 응접실을 안내받을 수 있었다.

프레져는 떨리는 손을 숨기며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캐롤라인이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려는 것은 그가 노르티움에 온 이후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그녀와 말을 섞는다는 안도감이 반, 어떤 말을 들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반이었다.

휴고를 만났다면 자신이 에릭에게 특별히 신경을 썼다는 사실을 알았을 텐데.

생색을 내는 건 신사로서 할 짓이 못 됐으나, 옹졸한 기대감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당신 덕분에 소방대가 빨리 도착했다면서요. 외과 의사한테도 에릭이 잘 치료받을 수 있도록 말해 줬고요.”

“……휴고가 그거까지 얘기했나?”

캐롤라인이 픽 웃었다.

“고마워요. 당신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그 네 음절의 말에 찻잔을 쥐려던 프레져의 손이 멈칫했다.

고맙다는 말 같은 거, 영영 못 들을 줄 알았는데.

“그 말을 하려고 찾아온 건가? 나와 만나는 건 질색하는 줄 알았는데.”

“당신이 싫은 건 싫은 거고,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인 거예요. 이런 건 확실히 말해야 한다고요.”

말하지 않으면 모르니까요.

캐롤라인이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사업하는 사람이 그런 걸 따져서 어떻게 해요?”

다행히 직전보다는 입꼬리가 풀려 있었다. 이에 프레져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래도 오늘 만남이 저번처럼 엉망으로 끝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혹시 아직 저택에 내 물건이 그대로 남아 있나요?”

“응. 손 하나 대지 않고 그대로 남겨 뒀어.”

당신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도록.

그러나 캐롤라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프레져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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