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지금 뭐 하는 거야!”
프레져가 캐롤라인의 어깨를 잡고 휙 돌려세웠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프레져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당신 뛰면 안 되는 거 몰라? 몸도 안 좋으면서 자꾸 어딜-.”
“인쇄소에서 불이 났대요. 안에 에릭이 있을지도 몰라요.”
“일단 여기서 기다려. 어차피 사람들도 대피 중이니까 기다리면 만날 수 있을 거야.”
“에릭이 어디에 있을 줄 알고요? 가만히 손 놓고 기다리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한데? 어차피 들어가 봤자 할 수 있는 것도 없잖아! 당신 몸 하나 챙기지 못하면서 뭘 하겠다고!”
캐롤라인은 말하는 것을 멈추고 프레져를 노려봤다.
그가 하는 말 중 틀린 말은 없었다. 그는 언제나 이성적인 판단만 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러나 캐롤라인은 그의 끔찍할 정도로 이성적인 면모가 너무도 싫었다.
“내가 그걸 몰라서 이러는 것 같아요?”
“…….”
“내가, 사람들이 그걸 모르는 멍청이라서 불 속에 뛰어드는 줄 알아요? 아니에요.”
무리해 나서 봤자 도움은커녕 방해만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처해서 불길에 뛰어들고 물에 몸을 던진다.
“걱정이 돼서 그러는 거라고요! 그 사람이 소중해서. 그 소중한 사람이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내가 다칠 걸 알면서도 뛰어드는 거라고요!”
걱정이 돼서. 소중한 사람이 잘못될까 봐. 주위가 부산스러운데 캐롤라인의 목소리만 선명히 들렸다. 캐롤라인의 어깨를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빠져 나갔다.
캐롤라인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뛰쳐나갈 준비를 했다. 멀리서 소란이 인 건 그때였다.
“비키십쇼! 길 좀 터 주세요!”
소방대가 도착한 것이었다.
프레져는 안도감에 휘청거리는 캐롤라인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소방대원들은 근처의 수도관에 호스를 연결하고 모래를 날랐다. 지켜보던 사람들 역시 양동이에 물을 길어 오기 시작했다.
“보여? 당신이 나서지 않아도 이 일은 충분히 해결될 수 있어. 이건 소방대가 할 일이니까.”
“…….”
“사람은 각자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있는 사람에 맡기고 기다리는 게 나아. 설마 소방대에게 일거리를 늘려 주고 싶은 건 아닐 거 아냐!”
여전히 냉소적인 말이었다.
캐롤라인은 제 등을 받치고 있는 프레져를 매섭게 밀어냈다.
“당신은 그렇게 살아요. 그렇게 명분이나 따지면서 살다가 평생을 후회하라고요.”
“캐롤라인.”
“그 명분이 기어코 당신의 발목을 잡을 날이 올 거예요.”
“…….”
“당신이 재고 따지는 사이에 일은 일어나요.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고, 불행은 사람을 데리고 떠난다고요!”
캐롤라인은 흐릿해진 시야를 되돌리려 거칠게 눈물을 훔쳤다. 싸한 매연과 복받치는 감정 때문에 눈가가 말이 아니었다.
“그러면 당신은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는 슬픔,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겠죠.”
이상하게 말을 하는 내내 목이 메였다.
전부 연기 때문이야.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며 캐롤라인은 꿋꿋이 말을 이어 나갔다.
“그때 나설걸. 사람들이 말려도 뛰어들걸. 그러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열심히 노력해도 후회가 생기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얼마나 후회하게 될까요.”
“…….”
“난 그렇게 살기 싫거든요.”
“……겨우 그런 일로 결과가 쉽게 바뀌진 않아.”
그렇게 결론을 짓기엔 인과 관계가 너무 하찮지 않은가. 이는 무모한 짓을 정당화하려는 변명에 불과하다고, 프레져는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그럼 당신은 노르티움까지 왜 온 건데요?”
“…….”
프레져는 말문이 막혔다.
캐롤라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남편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내가 걱정돼서 왔다면서요. 당신은 의사도 아니잖아요. 당신이 온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텐데.”
“…….”
“왜 그 귀한 시간을 버려 가면서까지 나한테 온 거죠?”
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프레져는 대답하지 못했다.
캐롤라인의 말이 옳았다. 캐롤라인을 보살피는 건 하녀의 몫이고 그녀를 치료하는 건 의사의 몫이다. 온갖 노력을 해도 그녀가 죽는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프레져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만나 주지 않더라도 매일같이 그녀를 찾아갔다. 캐롤라인이 싫어할 것을 생각해 눈에 띄지 않게 따라다니기도 했다.
오로지 그녀가 죽지 않길 바라서.
“그 마음을 정말,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피이이-.
멀리서 호루라기 부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덧 화기는 차차 가라앉는 중이었고 불이 진압되며 나온 시꺼먼 연기가 하늘 높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부상자를 옮기겠습니다! 다들 비켜 주세요!”
이윽고 대원들이 들것을 옮기기 시작했다.
캐롤라인은 프레져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섰다. 거리를 벌리고 선 두 사람 사이로 들것에 탄 환자들이 실려 나갔다.
캐롤라인은 행렬 가까이 가 실려 가는 환자들의 얼굴을 살폈다. 프레져는 그런 캐롤라인을 말리지도 못하고 땅에 못 박힌 듯 서 있기만 했다.
“어머, 에릭!”
에릭을 먼저 발견한 건 마샤였다. 마샤는 눈물이 맺힌 얼굴로 에릭을 내려다봤다. 그의 얼굴엔 재가 범벅이었다.
“어쩌면 좋아, 에릭! 괜찮아요?”
“마샤……입니까?”
다행히 의식은 있는지 에릭은 마샤를 알아봤다. 하지만 온몸에 새카만 그을음이 묻어 있는 탓에 어디가 다쳤는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이후로 두어 명의 부상자가 더 나왔지만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환자들은 전부 노르티움 종합 병원으로 이송할 계획이니 그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소방대원들은 환자들을 안전하게 실은 뒤 마차를 출발시켰다. 잔여 불씨를 소강시키는 건 남은 대원들의 몫이었다.
“마샤, 얼른 병원으로 가자.”
“네.”
캐롤라인과 마샤는 서둘러 왔던 길을 돌아갔다. 주변 상황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던 모양인지 마부는 아직 자리를 떠나지 않은 상태였다.
“캐롤라인, 내 마차를 타고 가.”
프레져가 다급히 캐롤라인을 붙잡았다. 그러나 캐롤라인은 그를 본 체조차 하지 않고 마부에게 말을 걸었다.
“종합 병원으로 돌아갈게요. 출발해 주세요.”
“캐롤라인.”
“빨리요.”
캐롤라인은 망설임 없이 마차에 올라탔다. 마부가 두 사람을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마음이 뭔지 당신이 아는 날이 오려나 모르겠네요.”
캐롤라인이 남긴 말은 그 한마디가 다였다. 머지않아 마차는 프레져를 남겨 둔 채 자리를 떴다.
길 한복판에 우두커니 남겨진 프레져는 점점 작아지는 마차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만 봤다.
“그 마음…….”
그는 캐롤라인이 한 말을 계속해서 곱씹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그 마음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자신이 처음 궤도를 벗어난 짓을 했던 것은 캐롤라인이 도망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였다.
그녀를 잡기 위해 그는 순회공연이라는 말도 안 되는 프로젝트를 벌였다. 그 당시에야 합리적인 방법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이디나 웨즐이 노르티움을 떠나던 날, 캐롤라인을 찾아간 것도 충동적인 짓이었다. 그를 움직이게 만든 것은 가슴을 선득하게 만드는 불안감이었다.
그 불안의 다른 이름은…….
그래, 걱정. 걱정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 걱정을 이기지 못해 노르티움을 찾았다. 애원하는 로겐을 외면하면서까지 말이다.
‘일이 일인 만큼 판단이 흐려지신 것도 다 이해합니다.’
로겐의 말대로 자신은 캐롤라인에 한해서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몸이 그녀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애초에 캐롤라인은 자신에게 늘 예외였다.
“처음부터.”
그저 눈길이 갔기에 청혼했다. 그는 그 눈길이 실은 애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자신의 삶은 캐롤라인을 위주로 돌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분명 별 볼 일 없는 여자라고…….”
캐롤라인이 막 도망쳤을 때, 그리고 그가 그녀에 대해서 조금도 알지 못했을 때, 배신감에 분노한 그는 그녀가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했었다.
당신 따위 내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캐롤라인이 제 삶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녀가 별게 아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특별했기에 그녀는 제 삶의 유일한 예외가 되었다.
앞뒤 재지 않고 그녀에게 달려들 만큼.
캐롤라인은 프레져에게 너무도 소중한 사람이었다.
* * *
캐롤라인이 탄 마차는 공장 단지 외곽으로 나왔다. 그러자 소방대장으로 보이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휴고가 보였다. 소방대장은 휴고를 향해 깍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주변 말을 들어 보니까 소방대가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나 봐요.”
“그래?”
“소방대원의 수도 평소보다 많았고요. 높으신 분의 말이 아니면 이런 경우가 잘 없대요.”
상황을 보아하니 소방대가 빨리 도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휴고와 프레져 덕분인 모양이었다.
“그랬구나…….”
한숨을 머금은 말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머지않아 두 사람은 다시금 병원으로 돌아왔다.
스테파니에게 연통을 넣고, 에릭의 수술을 기다리다 보니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 있었다.
“에릭!”
퇴근 시간보다 일찍 찾아온 스테파니가 허겁지겁 병실 문을 벌컥 열었다. 그녀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사람은 에릭이 아닌 마샤였다.
“왔어?”
“에릭은?”
“저 여기 있습니다.”
마샤의 등 뒤로 손바닥이 쑥 솟아올랐다. 마샤가 몸을 비켜서자 침상에 누워 있는 에릭이 보였다. 오른쪽 다리에 붕대를 감은 탓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그게…….”
지친 에릭을 대신해 마샤가 명료하게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래된 인쇄기 하나가 과열됐는데 그 옆에 앉아 있던 에릭이 깜빡 존 탓에 과열된 인쇄기가 터지는 걸 알지 못했다고.
인쇄기가 폭발하며 종이에 불이 붙었고, 기계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에릭은 오른 다리에 화상을 입고 만 것이었다.
공장에는 전기를 끌어 올려 사용해야 하는 기계가 많았기에 화재 시 더 큰 위험이 닥칠 가능성이 있었다. 겨우 공장 절반을 날려 먹은 건 아주 운이 좋은 케이스라고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