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85)화 (85/156)

#85

─ 지금 이거 다 대표님이 벌려 놓으신 일입니다. 제대로 수습도 안 하고 가신 것도 대표님이고요! 어떻게든 무마해 보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사람한테 그 말은 좀 심하신 거 아닙니까?

프레져의 수하라고 한들, 그는 귀족이고 부대표였다. 귀족으로서 지켜야 할 자존심이 있고, 부대표로서 져야 할 책임이 있었다.

“캐롤라인이 어떤 상태인지 듣지 못했나? 부대표는 내가 피치 못할 사정에 처했을 때 내 자리를 대신하라고 준 자리다. 그걸 알면 똑바로 일을 해야-.”

─ 솔직히 말씀드릴까요? 대표님이 언제부터 마님을 그렇게 챙기셨습니까?

로겐이 프레져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러곤 속에 담아 둔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 아픈 사람을 어떻게 두고 가냐고요? 그럼 지금까지는 어떻게 지내 오셨는데요? 여태껏 모르고 잘 살지 않으셨습니까?

“…….”

─ 마님의 상황은 다 이해합니다. 가족으로서 보필하는 게 도리죠. 일이 일인 만큼 판단이 흐려지신 것도 다 이해합니다.

내가?

프레져 헌티드가 판단력이 흐려져?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남에게 제 문제점을 지적받는 건 콘월 후작과 제럴드만으로 충분했다.

캐롤라인에 관한 것이라면 모를까, 이 프레져 헌티드가, 다름 아닌 일에 관한 판단력이 흐려질 리 없지 않은가.

전화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려 했으나 그보다 로겐이 더 빨랐다.

─ 그런데 여태껏 무신경하게 지내다 이제 와 마님을 보살피겠다 하는 게 저로선 정말 당황스럽습니다. 그걸 이유로 극단에 눈길 한 번 주시지 않는 것도요.

정곡을 찌르는 말에 프레져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꿋꿋이 목소리를 내었다. 자신은 잘못되지 않았다 주장하고 싶었다.

“……극단은 얼마든지 다시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사람 목숨은 아니지 않나.”

─ 맞는 말이긴 하지만 제 눈엔 극단도 만만치 않은 위기로 보입니다.

전화기 너머로 푹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후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몇 번 더 들린 후에야 로겐은 입을 열었다.

─ 옛날엔 그 자신감이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표님의 자신감을 보고 여기까지 왔고요.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대표님은 그냥 오만하신 거였어요. 심지어 당장 눈앞의 위기도 구분하지 못하시고. 지금은 책임 전가까지 하고 계시고요.

“…….”

─ 그냥 안 오시는 걸로 알고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어디 오합지졸 직원들이 어디까지 하나 지켜보십쇼.

그것을 마지막으로 전화는 끊겼다.

프레져는 멍한 얼굴로 끊긴 전화를 바라봤다.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휴고만이 어쩔 줄 몰라 할 뿐이었다.

“대표님, 극단의 일은 어떻게-.”

“바뀐 건 없어. 캐롤라인에게로 돌아간다.”

“…….”

휴고는 침묵했다.

헌티드하우스의 직원으로서 그도 프레져가 내린 결정이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너는 수시로 헌티드하우스에 연통을 넣어라. 관련된 기사가 나오면 꼼꼼히 확인하고.”

“……알겠습니다.”

* * *

열 감기를 앓은 날을 기점으로 캐롤라인의 몸은 눈에 띄게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기침병에 걸린 사람처럼 콜록거리는 날이 잦아졌다. 기침 자체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기침과 함께 흉통이 동반된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흉통은 이전보다 더 잦고 거세게 일었다. 갈비뼈가 부서질 것 같은 고통과 함께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얼굴이 빨개지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덕분에 마샤를 포함한 세 사람 역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셋 중에서 의학 지식이 가장 풍부한 에릭은 하루에 네 시간도 자지 못하고 출근하는 날이 잦았다.

“입원을 해야 할까요?”

마샤가 혈액 순환이 되지 않아 창백해진 캐롤라인의 손을 주무르며 물었다. 홉킨스 박사를 바라보는 얼굴이 자못 심각했다.

“의료진이 상주하고 있으니 위험한 상황은 넘길 수 있겠지만, 사실 입원을 한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겁니다.”

쓸 수 있는 약물은 이미 다 썼다. 병원에 있는 장비로 확인할 수 있는 건 이상 반응뿐이었다. 물론 이에 대처하는 건 전부 의료진의 몫이었고.

“저번에도 말했지만 심장을 열어 보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지요.”

그리고 그 일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캐롤라인은 얼마 전 그레타로 떠난 클리브를 떠올렸다. 지금쯤이면 진작에 그레타에 도착해 수술 연구에 참여하고 있겠지.

“아직 그레타에서 소식은 없죠?”

“네, 연구가 시작된 지 몇 달 되지 않았으니까요. 헤이오스 선생이 합류한 것도 최근이고요.”

역시, 아직은 무리겠지.

캐롤라인의 어깨가 처지는 것을 본 홉킨스 박사는 눈치껏 화두를 바꿨다.

“일단 본인이 입원을 원치 않고, 또 입원을 한다고 해서 달리 할 수 있는 게 있는 것도 아니니 권유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집에서 돌보는 게 힘들어진다면 병원에 맡기는 편이 나을 겁니다.”

“네.”

“온도 변화가 급격한 곳은 되도록 피하시고요. 날이 추우니 특히 주의하셔야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해요.”

진료를 마친 캐롤라인은 마샤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으로 나오자 복도 제일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프레져가 보였다. 요 며칠 안 보이나 싶더니, 최근 들어 저렇게 쥐새끼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대놓고 따라붙는 것보다 낫기야 하지만.’

프레져가 워낙 유명인이어야지. 불필요한 관심을 받는 건 저번으로 족했다.

캐롤라인은 프레져 쪽을 흘끗 쳐다보다 마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 진료도 일찍 끝났는데 오랜만에 둘이서 외식이라도 할까?”

“오늘은 날이 포근하긴 한데……. 나가도 괜찮으시겠어요?”

“이 정도는 괜찮아. 왜,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숲이 나오잖아. 그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에 가자. 오랜만에 짭조름한 게 먹고 싶네.”

“그거 좋네요. 아, 마침 에릭이 일하는 곳도 그 근처잖아요.”

“그래?”

“네, 호이큰 숲으로 가는 길목에 공장 지대가 있어요. 이렇게 된 거 에릭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갈까요?”

“좋지.”

캐롤라인은 앞장서 걷는 마샤를 따라 걸었다. 만일 프레져가 레스토랑까지 따라온다면 이번에야말로 붙잡고 한 소리 할 생각이었다.

머지않아 마차가 출발했다.

캐롤라인은 뒤에 따라오는 이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창밖으로 고개를 뺐다가 마부에게 한 소리 듣고는 고개를 집어넣었다.

어느덧 마차는 근처의 공장 지대에 진입했다. 아쉬운 대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공장 지대 너머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는 게 보였다.

“공장 쪽이라 그런가? 확실히 매연이 많네.”

“그러게요. 도시 중심은 그렇게 맑았는데 말이죠. 외곽에 왔다고 공기가 순식간에 달라지네요.”

바깥을 살피던 마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멀지 않은 곳에 숲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공기가 매캐했다.

마부가 두 사람에게 말을 건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무렵이었다.

“연기가 너무 세서 못 지나가겠구먼! 바로 목적지인 호이큰 숲으로 가면 안 되겠소?”

“인쇄소 쪽에 일행이 있어서요. 꼭 들러야 하는데…… 그 정도로 매연이 심하나요?”

“원래는 이렇게 심하지 않은데. 보아하니 불이 난 게 아닌가 싶소만.”

“네?”

캐롤라인과 마샤는 화들짝 놀랐다. 마차는 오 분도 채 가지 못하고 길목에 멈춰 섰다.

“도저히 안 되겠구려. 인쇄소 단지를 지나가는 건 무리야.”

캐롤라인과 마샤가 멈춘 김에 담배를 태우고 있는 마부를 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캐롤라인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얼굴을 확 찌푸렸다. 매캐한 연기에 눈이 따가웠기 때문이었다. 담배 연기 때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공기가 탁해진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저쪽에서 불이 난 것 같군.”

마부가 가리킨 곳은 마차가 멈춘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가까이서 보니 멀리서 봤을 때와 차원이 다른 시꺼먼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저쪽이면…… 그래, 인쇄소 쪽이군.”

“인쇄소요?”

캐롤라인과 마샤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마부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황급히 말을 바꿨다. 두 사람이 인쇄소에 들러 달라고 했던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불이 나긴 했지만 그리 큰불은 아닌 듯한데……. 종이가 많은 곳이라 위험하겠군. 그래도 일하는 사람들이 소방대를 불렀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구려.”

이후로도 마부가 몇 마디를 덧붙였지만 두 사람의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캐롤라인과 마샤의 머릿속엔 오직 한 사람의 얼굴만 떠올랐다.

“에릭.”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곳에 있는 수많은 인쇄소 중 에릭이 있는 곳에서 불이 났을 확률은 적지만…….

“아저씨, 인쇄 단지 쪽으로 가 주세요. 빨리요!”

“지금 저길 들어가자는 거요? 아까 안 된다고 하지 않았소. 나는 위험한 건 딱 질색이오!”

“돈은 두 배, 아니, 세 배로 드릴게요! 정확히 어느 쪽에서 불이 났는지 확인만 할 테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 정 그렇게 가고 싶으면 알아서들 걸어가시든지. 나는 못 가오!”

마부의 호통에 캐롤라인은 발을 동동 굴렀다. 물론 그녀도 불이 난 곳까지 걸어가는 위험한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간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다만 에릭이 무사한지는 확인해야 했다. 연기가 나는 규모도 적고 아직 열기도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불이 번지진 않은 것 같은데.

“이 정도 규모면 금방 소방대가 올 거요! 자꾸 그러면 그냥 두고 가겠소!”

그때 인근에서 작업용 앞치마를 두른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개중엔 에릭과 같은 디자인의 앞치마를 입은 이들도 있었다. 얼굴에 잿가루를 묻힌 채 기침을 하는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

캐롤라인과 마샤는 다급히 그들을 붙잡았다.

“저 불 어디서 나는 거예요?”

“우리 공장에서 난 거요.”

“네?”

“그래도 너무 걱정은 마쇼. 그리 큰불이 아니니 금방 진압될 거요.”

“사람은 다 빠져나왔나요?”

“안에 아직 사람이 있긴 한데…… 이보시오!”

일꾼의 말이 끝나기도 전, 캐롤라인은 마샤의 손을 붙잡고 연기가 솟아오르는 곳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마님, 뛰시면 안 돼요!”

“저기에 에릭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래도 일단은 저분 말처럼 소방대를 기다리는 게…….”

캐롤라인은 뛰기 시작한 지 삼십 초도 채 되지 않아 자리에 멈춰 섰다. 갑자기 뛴 것도 모자라 놀라기까지 한 탓에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붙잡은 건 힘줄이 불거진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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