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84)화 (84/156)

#84

“젠장, 젠장!”

로겐은 오페라하우스로 돌아오는 내내 머리를 거칠게 쥐어뜯었다.

원래대로라면 12시는 헌티드하우스가 공연을 선보였어야 할 시간이었다.

지난해와의 작별과 새해와의 인사를 전하는 그 상징적인 시간대를 상의도 없이 다른 이에게 넘기다니!

로겐과 헌티드하우스의 단원들은 제럴드에게 아무것도 전달받지 못한 상태였기에 충격은 배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헌티드하우스를 밀어내는 이유야 뻔했다. 원래 주인공은 소리 소문 없이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니까.

“왕립 극단이야. 분명해.”

오케스트라 연주만 선보였다면 그저 악단이겠거니, 하고 말았을 일이었다. 문제는 악단과 함께 등장한 무용수들에 있었다.

춤엔 대부분 서사가 있었다. 무용수들은 극의 서사와 분위기를 춤으로 풀어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서사와 춤, 음악이 함께 있는 예술은 ‘극’뿐이었다.

“그들을 통해 극을 올리려는 거야. 헌티드하우스에 대적할 만한 극을…….”

게다가 남부 공연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던 주범, 하이든 밀러가 나타나지 않았던가!

하이든 밀러가 헌티드하우스를 배신하는 것을 대가로 왕립 극단의 수석무용수 자리를 제안받았다는 것은 조사 끝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의 등장만 봐도 이번 일이 의미하는 바는 자명했다.

물론 국왕은 영악한 사람이었고 제럴드의 입에서 직접적으로 ‘왕립 극단’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국왕의 이름으로 공표해 버리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럴드의 입에서 나온 ‘새로운 시작’이라는 단어와 뒤에서 그를 지긋이 지켜보고 있던 국왕은 자리에 있던 이들에게 상상의 여지를 주기 충분했다.

게다가 이를 귀족들 앞에 선보였다는 말은 이미 출범 준비가 끝났다는 말이 아닌가.

“이 일을 어떻게…… 하, 일단은 대표님께 전화부터 해야겠군.”

로겐은 마차에서 내린 뒤 곧장 전화실로 향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뜻밖의 손님들로 인해 가로막히고 말았다.

“다, 다들 연락도 없이 웬일이십니까……? 그것도 이 시간에…….”

헌티드하우스의 임원진 몇 명과 대주주들이 오페라하우스의 로비에 서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위협적인 기운을 내뿜으며 로겐에게 다가갔다.

“음악회에서 있었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 있었고요.”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논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심상치 않은 기세에 로겐의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아, 안 그래도 내일 일찍 연락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오늘은 시간도 늦었으니 내일-.”

“지금이 여유 부릴 때입니까?”

긴급 상황인 걸 알기에 새벽 세 시에 가까운 시간임에도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일단 회의실로 올라가시죠.”

결국 로겐은 임원들을 회의실로 이끌었다.

자리에 앉으려던 크렘 백작은 비어 있는 상석을 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헌티드 백작은 어디 가셨습니까?”

“……출장으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왕성 음악회가 있는데 출장을 갔다고요?”

“아주 급한 일이 생기셔서요.”

“당장 데려오세요.”

예상치 못한 요구에 로겐이 고개를 앞으로 쭉 뺐다.

“지금 당장 도착하진 못해도 출발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한시가 급한 일이니 당장 연통을 넣으세요. 전화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지요.”

“대, 대표님이 머물고 계신 곳엔 전화기가 없습니다. 내일 아침에 근처의 관공서로 전화를 해 연락을 기다리는 편이-.”

“애초에 출장을 가신 게 맞긴 합니까?”

정곡을 찌르는 질문은 뎀버트 준남작에게서 나왔다. 그는 프레져가 해야 할 경영 업무를 대신 보고 있는 이들 중 하나였다.

“대표님은 저희에게 일을 맡기기 전에 미리 말씀을 주십니다. 그런데 저희는 북부에 출장이 잡혀 있다는 얘기를 사전에 들은 적도 없을 뿐더러, 고지받은 사항도 없었습니다.”

그의 말에 동의하는 듯 일을 나눠 받은 다른 경영진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지금 북부와 연계된 사업이 하나도 없는데 갑자기 무슨 출장입니까?”

“갑작스레 정해진 출장이라 그리 의심하시는 것 같은데 대표님은 정말 일하러 가신 겁니다.”

“그럼 언제 돌아오십니까?”

뎀버트 준남작의 예리한 눈엔 의심이 가득했다.

“지금 당장은 어려울 것 같고 아마…… 이번 달 안에는…….”

“처음에는 12월 말에 오실 거라 하셨지요. 일주일 전에는 1월 초라 하셨고요. 그런데 이번에는 1월 달 안에라……. 애초에 기간이 너무 두루뭉술하지 않습니까?”

“…….”

“출장은 핑계군요.”

도장을 찍듯 뱉은 말에 회의장은 혼란에 휩싸였다. 중요한 시기에 멋대로 자리를 비운 대표에 대한 책망이 쏟아졌다.

“지금이 어떤 시기인데 자리를 비운답니까? 대표로서 가져야 할 책임이 있지!”

“관객들 앞에 머리를 숙이면 뭐 합니까! 이미지 좀 회복하라고 보낸 자선 행사장에서는 난동을 부리고, 음악회에도 자리를 비워 왕실의 미움을 사는데!”

“일은 본인이 망쳐 놓고 수습은 우리더러 하라는 겁니까?”

점잖은 이들마저도 목소리를 높였다. 프레져에 대한 구설수가 연일 끊이질 않고 상단과 작가들도 계약을 끊고 있는 지금, 왕립 극단까지 나온다면 정말 큰일이었다.

“하이든 밀러가 거기 있는 걸 보셨으니 부대표님께서도 잘 아시겠군요. 왕립 극단이 출범되면 우리 쪽 단원 중에서도 분명 왕립 극단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자들이 나올 겁니다!”

“이번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헌티드 백작에게 똑똑히 전하세요!”

“……알겠습니다.”

로겐은 피곤한 낯으로 긴급회의를 끝낼 수밖에 없었다.

* * *

“대표님, 시청에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급히 말하는 휴고에 넥타이를 매던 프레져의 손이 멈칫했다.

“로겐 님께서 최대한 빨리 연락 주라는 전신을 남기셨더군요. 꽤 급한 일인 모양입니다.”

“내가 재촉하는 일 없도록 하라고 일렀을 텐데.”

“대표님께서 없으면 안 되는 중요한 일이라 하셔서…….”

“나 하나 없다고 제대로 안 돌아가면 그게 길거리 노점상이 아니면 뭐지?”

답하는 프레져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대표가 없다고 무너지는 단체는 기업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건 우두머리가 경영을 엉망으로 했거나 직원들이 오합지졸이라는 뜻인데.

“다들 일을 어떻게 하는 건지.”

자신이 잘못했을 리는 없으니 이는 분명 직원들 잘못이었다. 프레져 헌티드는 일에 있어선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으므로.

프레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창문 너머를 바라봤다. 몸이 안 좋아지기라도 한 건지 캐롤라인은 며칠째 집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휴고가 창문을 막아서며 말했다. 휴고의 몸에 가려진 탓에 캐롤라인의 집이 보이지 않았다.

“비켜.”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오늘 새벽에 연락이 온 거면 정말 급한 일이라는 뜻인데…….”

휴고가 혀로 입술을 축였다. 초조함에 입술이 바싹 말라 왔다.

“왕성 음악회가 열렸던 게 바로 어제이지 않습니까. 간단한 상황 보고 정도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시청이면 여기서 그리 멀지도 않습니다. 마님 쪽은 빌이 잘 주시하고 있으니 문제가 생기면 바로 연락을 줄 겁니다.”

평민에 고아 출신인 것도 모자라 프레져에게 구제까지 받은 휴고가 프레져의 앞을 막아서는 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무모하게라도 행동해야 했다.

“앞장 서.”

호소 끝에 프레져에게서 허락이 떨어졌다. 휴고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프레져를 노르티움 시청으로 이끌었다.

평소처럼 기웃거리는 시청 직원들을 뒤로하고 프레져는 헌티드하우스에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이번엔 대기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연결음이 끊기자마자 튀어나온 건 로겐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 대표님! 드디어 목소리를 듣는군요.

“무슨 일인지 최대한 간략히 설명해.”

─ 결국 왕립 극단이 출범됐습니다. 왕성 음악회에서요.

“…….”

─ 저희가 공연을 할 시간이 아닌데 다짜고짜 연주를 시작하라더군요. 이상하다 싶었는데 왕립 극단을 선보일 줄은…….

로겐이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줄줄이 설명했다. 하이든 밀러가 왕실 측 무용수로 등장했다는 것부터 분노한 임원진이 오페라하우스에 찾아왔다는 말까지 모두 빠짐없이.

─ 대표님, 이젠 한계입니다. 마님 쪽 상황은 안타깝지만 이제는 정말…… 돌아오셔야 합니다.

프레져가 돌아오지 않으면 파업을 하겠다고 한 경영진이 한둘이 아니었다. 센그릭에 오페라 극장을 가지고 있는 투자자 하나는 다시는 헌티드하우스에게 극장을 내주지 않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안젤라 역시 헌티드하우스를 위해 노래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들의 말이 단순한 겁주기가 아니라는 것을 로겐은 알고 있었다. 이것은 분명 마지막 경고였다.

더 늦기 전에 대표로서의 소명을 다하라는 경고.

─ 제발 얼굴이라도 한 번 비쳐 주세요. 그것만으로 임원진들은 진정될 겁니다. 나머지 일들은 차차 처리하면 되니까요.

로겐은 프레져의 앞에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캐롤라인에게라도 애원하고 싶었다.

제발 우리 대표님 좀 노르티움에서 내쫓아 달라고.

“안 돼.”

그러나 프레져는 로겐의 간절한 애원마저 외면했다.

─ 대표님!

“내가 없는 사이에 캐롤라인이 어떻게 될 줄 알고. 절대 안 돼.”

─ 이번 문제만 해결하고 다시 만나면 되지 않습니까! 마님을 수도로 모셔 와도 되는 일이고요!

“아픈 사람보고 그 먼 거리를 이동하라는 거냐?”

치료할 방법을 찾는 것만으로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수도로 돌아가는 건 시간 낭비였다.

“우리가 전에 없던 위기를 맞이한 건 맞다. 그러나 헌티드하우스는 겨우 그 정도로 무너지지 않아.”

무엇보다 프레져에겐 제 업적이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공든 탑에 흠집이 나는 건 몹시 거슬리지만…….’

그 흠집들이 제 탑을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고결하게 나고 자란, 실패를 모르는 대귀족 프레져 헌티드의 사고방식이었다.

─ 대표님,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정말 안 돼요. 다른 건 몰라도 내부 분열만큼은 막아야 한단 말입니다!

수많은 국가들이 내전으로 인해 몰락의 길을 걸었다. 외부의 공격은 내부 분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헌티드하우스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모름지기 기둥이 무너진 건물은 주저앉기 마련이니.

─ 오셔서 내부만 정리해 주십쇼, 제발. 그러면 나머지 일은 제가 전부-.

“오합지졸이군.”

─ …….

“애초에 나 하나 없다고 회사가 돌아가지 않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네놈들의 업무 능력이 얼마나 바닥인지 잘 알겠어.”

평소와 다름없는 오만함에 예민함까지 더한 프레져는 기어코 로겐이 마지막으로 붙잡고 있던 인내심을 건드리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