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다뉴, 거기서 뭐 해?”
모아의 물음에 울타리 앞에 쪼그리고 있던 남자아이가 고개를 돌렸다. 다뉴의 오동통한 뺨에는 창살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으휴, 이 좁은 데 볼따구를 얼마나 밀어 넣고 있었으면. 이리 와!”
모아가 다뉴를 일으켜 세웠다. 그래도 2살 누나라고, 3살짜리 아기 앞에서는 제법 의젓한 모습을 보이는 모아였다.
모아는 엄지손가락으로 다뉴의 뺨을 벅벅 문질렀다. 창살 자국이 지워지는 대신 볼엔 붉은 자국이 남았다. 다뉴는 복숭아처럼 붉어진 제 볼을 주물럭거리며 다시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다뉴, 여기가 좋아? 왜 그러고 있어?”
모아가 다뉴를 따라 몸을 숙였다. 또래보다 말 배우는 속도가 더딘 다뉴는 바깥 풍경을 멍하니 보다가 입을 뗐다.
“저기.”
아이의 짧뚱한 손가락이 먼발치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가리켰다.
“바께 무서운 아저씨 이써.”
“뭐어?”
“사자들이야.”
무서운 아저씨라니!
입이 떠억 벌어진 모아는 재빨리 눈동자를 굴리기 시작했다. 나무 뒤로 시선을 옮기니 다뉴의 말대로 사자처럼 어마어마한 덩치를 가진 남자 둘이 보였다.
“사냥감을 보구 이써. 아이 무셔야.”
무섭다는 말과는 달리 다뉴는 시종일관 남자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모아는 보육원 쪽을 바라보며 무어라 중얼거리는 남자들을 보다 입을 열었다.
“다뉴, 저건 무서운 아저씨가 아니라…….”
“웅?”
“잘생긴 아저씨인데?”
“우웅?”
다뉴가 창살 사이에 얼굴을 댄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볼살에 파묻힌 이목구비가 짓눌렸다.
평소였다면 ‘안 돼! 지지야!’ 하고 다뉴를 말렸겠지만 모아는…….
“다뉴, 저런 사람은 미남이라고 하는 거야.”
“니남?”
“따라 해 봐. 미남.”
“미이-남.”
“잘했어.”
모아가 다뉴의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칭찬에 기분이 좋은 듯, 아이는 배시시 웃었다.
“근데 쬐끔 눈사람처럼 생기긴 했다.”
“눈짜람?”
“세상에서 제일 차가운 사람은 눈사람이니까.”
아이들은 알 수 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한참을 쪼그려 있었다. 두 아이가 몸을 일으킨 것은 남자들이 자리를 떴을 무렵이었다.
모아는 다뉴를 번쩍 들어 올려 자신이 끌고 온 장난감 박스 안에 앉혔다. 박스 앞쪽엔 손잡이가 달려 있고 아래엔 바퀴가 달려 있어 끌고 다닐 수 있는 구조였다. 모아는 다뉴를 실은 박스를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세상에 모아, 동생을 박스에 넣어서 데려오면 어떡해!”
“다뉴, 너는 뭘 했기에 옷이 흙투성이니?”
순식간에 꼬질꼬질해진 두 아이를 본 어른들은 경악했다.
“손톱을 보니까 흙에 손댄 것 같진 않은데. 다뉴, 저번처럼 또 흙 파먹다 걸리면 엄마한테 혼나잖아.”
캐롤라인이 다뉴의 손을 물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흙 안 먹었어.”
조용히 눈만 깜빡이고 있는 다뉴를 대신해 입을 연 건 모아였다.
“우리 눈사람 보고 왔는데. 그치, 다뉴?”
“아냐. 사자야. 크와앙 사자.”
두 아이는 그 이후로 눈사람과 사자에 대한 열변을 토했다. 그 대화를 듣고 있는 어른들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길 한복판에 웬 사자?”
“눈이라면 진작에 다 녹았을 텐데?”
앞으로 보육원에 자주 찾아올 두 남자의 정체는 모아와 다뉴만의 비밀이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초대를 받은 귀족들은 국내 최고의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을 듣기 위해 왕성으로 모여들었다. 이번엔 이례적으로 안젤라 골드가 노래 세 곡을 부를 예정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 참, 내가 왜 바쁜 시간을 쪼개 가면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정말 미안합니다, 안젤라 양.”
로겐이 안젤라에게 쩔쩔매며 사과했다. 안젤라는 로겐을 흘겨보다 거울로 고개를 돌렸다.
“보타이나 제대로 매요.”
로겐은 그제야 제 흰 보타이가 삐뚤어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아, 감사합니다. 정신이 없어서.”
오늘은 몇 주 전부터 준비한 왕성 음악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몇 년간 음악회 준비를 맡아 온 프레져와 달리 로겐은 이를 맡아 본 경험이 없었다. 헌티드 가문의 주인이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제럴드는 로겐을 신뢰하지 못했고 두 사람 사이엔 제대로 된 회의 한 번 이뤄진 적이 없었다. 제럴드가 자신이 내키는 대로 일을 처리하면 로겐에게 일방적인 통보가 내려지는 식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왕실에 미운털까지 박히다니.’
로겐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안젤라에게 긴급 구조 요청을 보냈다. 왕성 음악회에 참석해 노래를 세 곡만 불러 달라는 간곡한 청이었다.
때마침 안젤라는 봉사 활동을 끝내고 개인 교사에게 노래 교습을 받던 참이었다.
‘설마 노래만 부르고 꺼지라는 건 아니죠?’
‘왜 말을 그리 섭섭하게-.’
‘적어도 어떻게 된 상황인지 설명은 해 줘야 하지 않겠어요? 물론 보나 마나 백작 부인과 연관되어 있을 게 뻔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