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프레져가 왕성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가 발행되었다. 한 자선 행사에서 그가 난동을 부렸다는 내용이었다.
목격자는 여럿이었으나 사건의 내막을 아는 사람은 프레져와 콘월 후작 둘뿐이었다.
콘월 후작 본인이 피해를 입었다며 직접 나서니 상황은 프레져에게 불리한 쪽으로 기울었다. 프레져 측에서 달리 반박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 반박을 안 하는 것보다는 못 하는 것 쪽에 가까웠다. 프레져의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건 로겐 한 사람뿐이기 때문이었다.
이성을 잃은 프레져를 노르티움으로 홀로 보낼 수는 없었기에 휴고가 그의 뒤를 따랐다.
휴고와 로겐을 제외하곤 현재 상황을 아는 이는 없으니 뒷일은 자연히 로겐의 몫이 된 것이었다.
“……그래서 대표님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진 제가 음악회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헌티드하우스의 업무부터 시작해 왕성 음악회 준비, 그리고 헌티드 백작가의 업무까지 순식간에 엄청난 양의 일을 떠맡게 된 로겐의 얼굴은 퀭했다.
“관련된 논의는 전부 저와 나누시면 됩니다.”
로겐이 제럴드에게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완벽한 귀족식 인사였으나 제럴드의 눈빛은 탐탁지 않아 보였다.
“대대로 헌티드 가문이 맡아 하던 일을, 헌티드가 아닌 사람과 논하란 말인가?”
“면목이 없습니다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프레져가 노르티움으로 향했다는 이야기는 휴고와 로겐, 에드먼드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이를 제럴드에게 사실대로 고할 순 없기에 출장을 핑계로 말을 지어낸 참이었다.
“그날 자리를 엉망으로 만들고 뛰쳐나간 것도, 그 이후에 연락 한 통 없던 것도 나는 이해해 줬네. 그런데 내 이해에 돌아온 답이 이리 무책임할 줄은 몰랐군.”
“정말 송구합니다. 마님과 관련된 이야기엔 유독 민감하신지라…….”
“헌티드 백작이 아내 얘기에 민감하다라… 별 우스운 소리를 다 듣는군.”
제럴드는 로겐을 훑어보며 실소했다.
“그렇게 아내를 끼고 사는 사람이 어떻게 죽을병에 걸린 건 몰랐는지.”
“…….”
“내가 아니었으면 영원히 몰랐을 거 아닌가? 그런 주제에 아내에게 껌뻑 죽고 못 사는 시늉이라니, 우스워.”
로겐은 무어라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수그렸다. 이번만큼은 제럴드의 말이 틀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캐롤라인이 투병 사실을 숨겼든 숨기지 않았든, 이건 분명히 프레져의 잘못이었다.
“뭐, 일단은 알겠네. 자네 도움 없이 내 능력껏 진행하도록 하지.”
“네?”
“자네는 헌티드 가문의 일원이 아닐 뿐더러, 왕성 음악회를 준비해 본 이력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 자네가 어떻게 내게 도움이 되겠나.”
“…….”
“음악회야 예년과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될 테니 큰 문제야 없겠고, 자네는 단원들이 실수하지 않도록 연습이나 부지런히 시키게. 지시할 게 생기면 다시 부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제럴드의 말에 틀린 것도 없었거니와, 감히 왕자의 말에 토를 달 수는 없었다. 게다가 제럴드는 지금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제럴드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눈을 감고 있기까지 했다. 결국 로겐은 다음을 기약하며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달칵.
티 룸 문이 닫히는 소릴 듣고 나서야 제럴드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출장은 개뿔.”
혼자 남겨진 제럴드는 꼿꼿하게 펴고 있던 허리를 무너뜨렸다. 왕족식 앉는 자세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짜증스럽게 허리를 두드리는 제럴드의 얼굴에서 왕자의 공손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보나 마나 노르티움으로 간 거겠지.”
제럴드는 찻잔에 반쯤 남아 있던 차를 한 번에 들이켰다. 그의 시선은 며칠 전 프레져가 앉아 있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티 룸의 테이블과 카펫은 이미 다른 것으로 바꾼 지 오래였다. 프레져의 피에 절은 물건을 그대로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설마하니 정말 모르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무관심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프레져가 아내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곧 죽는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한 지붕 아래서 같이 먹고 산 사람의 건강조차 모르다니……. 게다가 남은 시간이 고작 일 년이라면 분명 아픈 티가 났을 텐데.
무엇보다 캐롤라인이 프레져에게 제 상태를 숨겼다는 것이 가장 의아했다.
남편이라면 목을 매던 여자가 아니던가.
“어쩌면 부부 사이가 생각보다 소원했던 걸지도 모르겠군.”
제럴드는 그날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프레져를 떠올렸다. 피를 질질 흘리던 것도 모자라 넋이 나간 사람처럼 다리를 비틀거리던 것도.
“그리 무심했던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달라지는 건가.”
제 몸이 아픈 줄도 모른 채 뛰쳐나가던 뒷모습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가지고 있던 악감정마저 누그러질 정도로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불쌍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프레져를 봐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좋은 기회지.”
헌티드 백작의 평판을 깎을 수 있는 것도 모자라 헌티드하우스에 충성적인 평민 단원들을 끌어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닌가.
제럴드는 옷매무새를 정돈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왕을 만나러 가기 위함이었다.
* * *
프레져는 캐롤라인의 집 가까이에 방을 얻었다. 도시 중심에 있는 호텔은 캐롤라인의 집에서 제법 거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급하게 얻은 방이라 그런지 그리 좋진 않았지만 제법 넓고 바닥도 깨끗했다.
있는 가구라곤 책상과 침대, 옷장 하나가 전부였으나 이는 프레져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웬만한 고급 가구가 아니고서야 찝찝해서 사용하지 않는 프레져에겐 차라리 이편이 나았다. 애초에 가져온 짐도 없었으니 달리 정리할 것도 없었다.
“대표님, 입으실 옷과 신발을 사 왔습니다.”
양손 가득 짐 가방을 든 휴고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인근 번화가에서 프레져가 사용할 물건들을 사 온 참이었다.
“말씀하신 책과 잉크도 더 사 왔습니다.”
“옆에 내려 둬.”
프레져가 대충 턱짓으로 대답했다.
그의 책상엔 캐롤라인의 진료 기록과 의사들의 소견서, 남편의 권한으로 받아 온 진료 일정표가 쌓여 있었다.
책상 오른편엔 의학 정보가 실린 신문이 잔뜩이었다. 심장병 치료에서 가장 저명한 의사를 찾기 위함이었다.
프레져의 까칠한 얼굴을 본 휴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조금 전 로겐 님과 전화를 하고 왔습니다.”
노르티움에 도착한 이후 두 번째로 거는 통화였다. 도착한 당일 날 한 번 전화를 한 이후 정신이 없어서 그동안 연락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캐롤라인이 일 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로겐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치료할 방법이 없다고 했을 때는 침음만 흘릴 뿐이었다.
그러나 로겐은 극단의 부대표였고 프레져 못지않은 경영인이었다.
‘업무를 맡기는 건…… 아직 어려울 것 같지?’
프레져가 자선 행사에서 난동을 부렸다는 기사 때문에 애써 쌓아 올린 신뢰도가 바닥이 나고 있었다. 극단의 임원들은 프레져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냐며 매일같이 성을 냈다.
당장 왕성 음악회는 고사하고, 프레져가 왕성에서 난리 치고 온 탓에 상황 수습이 굉장히 어려워져 있기까지 했다.
“수도의 일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조심스레 운을 뗐으나 프레져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휴고는 용기를 내 다시 입을 열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전하께서도 이해를 하신다 하셨지만, 많이 노하신 것 같습니다.”
“…….”
“그리고 베버리 상단이 우리 쪽과 거래를 끊었습니다.”
“뭐?”
“아무래도 왕실과 거래를 튼 모양입니다.”
이번 안건에는 프레져도 즉각 반응했다.
베버리 상단은 목재 가공을 주 업으로 하는 상단으로, 특히 목관 악기의 질이 우수하기로 유명했다.
그들이 목관 악기 독점 판매 계약을 맺은 기업은 헌티드하우스가 유일했다. 악기의 질도 질이지만,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랬던 상단이 왕실에 악기를 납품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뚜렷했다.
“왕실 장인들이 만든 악기로는 부족하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왕실에 고용된 궁정 연주가들은 소수였다. 그들은 모두 왕실의 장인들이 제작하는 악기를 받아 썼기에 상단의 물건을 받을 일이 없었다.
“왕실 극단에서 쓸 악기가 필요한 것이겠죠. 헌티드하우스보단 왕실과 손을 잡는 게 베버리 상단 쪽에도 더 이득일 테고요.”
“…….”
“헌티드하우스에 공급을 끊는 대가로 왕실과 손을 잡은 거라면 충분히 말이 됩니다.”
비단 악기 하나만의 문제라면 이리 머리가 아프지도 않을 텐데.
로겐에게 들은 말을 떠올리자 휴고는 머리가 아파 왔다.
“이미 무대 감독은 왕실 쪽에 넘어간 모양입니다.”
“결국 그 알량한 말에 넘어갔다는 말이지.”
“다른 단원들은 모르겠지만, 2왕자 쪽에서 안젤라 양에게 계속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안젤라의 반응은?”
“지금은 봉사 활동에 집중하느라 대응하지 않고 있고요.”
비수기는 안젤라에게 이미지 세탁의 계절이나 다름없었다.
“다름 아닌 왕실의 권유인데 넘어가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휴고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말했다. 캐롤라인이 불쌍한 건 어쩔 수 없지만 극단의 일은 해결해야 했다.
“대표님, 지금 극단 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으신 거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당장 연말 음악회와 왕실 극단 건은 해결을-.”
“나보고 지금 수도로 돌아가라는 거냐?”
날카로운 기세로 말을 끊는 프레져에 휴고는 움찔했다.
“내가 없는 동안 캐롤라인에게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
“혼자 버티게 만든 건 지금까지로 충분했다. 캐롤라인이 낫기 전까지 수도로 돌아가는 일은 없어.”
“……죄송합니다.”
“알겠으면 두 번 말하게 하지 말아라.”
그깟 왕실 음악회가 어떻게 되든 알 바가 아니었다. 권위와 존경을 잃은 왕실을 위해 일하는 것도 이젠 의미 없었다.
무엇보다 헌티드하우스엔 인재가 많았다. 제럴드 따위가 벌이는 일은 자신이 없어도 충분히 수습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내 업무는 전부 로겐 혼자 보고 있나?”
“네. 지금은 그렇습니다.”
“임원들 중 소수에게만 상황을 알리고 업무를 분담시키라고 전해.”
“마님의 시한부 사실도…… 알릴까요?”
듣고 싶지 않은 단어의 등장에 프레져의 눈에 시린 기운이 서렸다. 휴고는 제가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캐롤라인은 안 죽어. 절대.”
프레져가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흡사 짐승이 목을 긁는 것 같은 소리였다.
“시한부, 그딴 건 애초에 있지도 않은 일이야. 알겠어?”
“……네. 죄송합니다.”
“그냥 캐롤은 많이 아픈 거야. 설령 죽는다 해도 내가 살려.”
책상을 세게 짚은 탓에 뚜껑이 열린 잉크병이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프레져는 다 쓴 종이로 흐르는 잉크를 닦았다. 책상과 손바닥에 시꺼먼 잉크가 묻었다.
“기밀 유지해서 잘 전하겠습니다.”
휴고는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방에서 빠져나갔다. 로겐의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지만 이 정도로 결과를 받아 낸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손에 묻은 잉크를 신경질적으로 닦던 프레져는 문이 닫히는 소리에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순간 의자가 뒤로 밀리며 끼익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름 끼치는 소음에 프레져는 하고 있던 모든 행동을 멈췄다.
“……아니야. 이번엔 아니야.”
저택을 벗어났으니 환청이 들릴 리는 없다. 그런데 왜 이리 불안한 것일까.
프레져는 부러 더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종이를 소리 나게 넘기고 품 안의 회중시계를 꺼냈다 집어넣길 반복했다.
결국 참지 못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걸쳐 입었다.
“어차피 곧 캐롤라인이 병원에 갈 시간이니까.”
필요 없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며 프레져는 썰렁한 방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