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캐롤라인을 집까지 데려다준 프레져는 열이 내린 걸 확인한 뒤에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을 나서기 전 미리 약을 먹어 둔 덕에 열은 금방 가라앉았다.
프레져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흉부외과 진료실에 들어갔다. 불청객의 등장에 이제 막 퇴근할 준비를 하고 있던 홉킨스 박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진료는 이미 마감됐습니다만.”
“아내의 의료 기록을 보려 왔습니다.”
오늘 프레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캐롤라인의 의료 기록을 확인할 생각이었다. 거절당한다면 병원장을 협박할 생각도 있었다.
“잠시만 기다리시죠.”
프레져의 예상과는 달리 홉킨스 박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에게 의료 기록을 공개해도 좋다는 캐롤라인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간호사에게 무어라 지시를 내린 뒤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어느새 진료실 안엔 해질녘 노을이 들어차 있었다.
홉킨스 박사는 서류를 몇 장 넘겨 보다 입을 열었다.
“기록을 확인하면 알게 되시겠지만, 지금 환자분의 상태가 많이 안 좋습니다.”
“…….”
“남은 시간이 일 년뿐이라는 말은 들었습니까?”
“……네.”
프레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 모습을 본 홉킨스 박사는 엄지로 눈썹 밑을 꾹 눌렀다. 그러곤 캐롤라인의 몸 상태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는 프레져에게 이를 설명해 주는 것도 언짢았다. 아내를 이 먼 북부에 홀로 방치해 둔 주제에 이제 와 나타나다니.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그의 사감일 뿐이었다. 홉킨스 박사는 평범한 노인이기 전에 의사였고, 캐롤라인의 주치의였다. 의사라면 마땅히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판단을 내릴 줄 알아야 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유명한 헌티드 백작이 아닌가.’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살리진 못하겠지만, 지금보다 양질의 치료 환경을 제공할 수 있을 터였다. 헌티드 가문의 재력은 설명하기도 입 아플 정도니.
좋은 환경에서 치료받다 보면 한두 달 정도 더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캐롤라인에게 행운이 찾아오길 바라며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관심을 갖는다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그래도 모르고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
“통증이 상당할 겁니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호흡 곤란을 호소하는 일도 잦고요.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옆에서 잘 돌봐 주기만 해도 숨은 트일 겁니다.”
프레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금 전 자신 때문에 몸이 상한 거라 소리치던 캐롤라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환자에게 무관심은 독입니다. 조금만 더 일찍 발견했으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겠죠.”
“…….”
“가족이면서 왜 이렇게 무관심했습니까?”
“나는…….”
프레져는 단 한 번도 캐롤라인에게 소홀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모두 다 갖다줬고, 그녀가 귀족으로서 우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했다.
권력이든 돈이든 명예든, 남들이 갖고 싶어 안달 내는 것을 전부 캐롤라인의 손에 쥐여 주려 애썼다.
자신은 그 세 가지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틀렸다며 고개를 저었다.
심지어 캐롤라인 본인마저도.
캐롤라인이 원하던 관심은 이런 종류가 아니었다는 것을 프레져는 이제야 알아차렸다.
정작 그는 캐롤라인의 뜻을 물어본 적이 없었다. 뭐든 그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판단했다.
“선생님, 가져왔습니다.”
간호사가 안으로 들어오며 대화는 중지되었다.
홉킨스는 간호사에게 받은 서류를 한 번 확인한 뒤 프레져에게 내밀었다.
“캐롤라인 헌티드 환자의 의료 기록입니다. 그동안 아내분이 어떻게 지냈는지는 여기에 다 적혀 있겠지요.”
그 두 마디가 끝이었다. 대충 눈인사를 건넨 홉킨스 박사는 의사 가운을 여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
진료실 밖으로 나온 프레져는 한숨을 쉬며 복도 옆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 확인하고 싶던 기록인데, 종이를 넘겨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프레져는 떨리는 손으로 서류 첫 장을 넘겼다.
제일 먼저 보인 건 오늘의 진료 기록과 처방전이었다. 의학 용어를 알지 못하니 무슨 약을 받아 간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덧붙여진 설명을 보아하니 감기에 걸린 듯했다.
“얼마나 몸이 약한 건지.”
30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감기에 걸린 거면 캐롤라인은 대체 얼마나 허약한 걸까.
흥분을 이기지 못해 캐롤라인에게 옷을 벗어 줄 생각도 하지 못한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프레져는 씁쓸함을 삼키며 종이를 넘겼다.
다음 장에 나타난 것은 사흘 전의 진료 기록이었다. 그다음 것은 일주일 전. 서류는 가장 최근의 진료 기록부터 역순으로 정리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임상 실험…….”
서류엔 시선을 끄는 단어들이 여럿 쓰여 있었다. 이를 마주한 프레져의 얼굴에는 표정이 점점 사라져 갔다.
캐롤라인은 참 많은 약을 먹고 있었고, 다양한 실험에 참여했으며, 항상 아팠다.
아프지 않은 날은 없었다. 덜 아프거나 더 아픈 날, 오로지 두 가지 경우만 존재할 뿐이었다.
「생존 확률 희박함. 1년 정도 살 수 있을 것으로 예측.」
노르티움 병원에 처음 온 날 받았던 진단이었다. 이를 읽은 프레져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활자들이 올가미가 되어 목을 옥좼다.
프레져는 손가락으로 종이 위에 쓰여진 일 년이라는 글자를 문질렀다. 잉크는 번지기만 할 뿐, 프레져가 외면하고 싶은 글자를 없애 주지는 않았다.
“겨우 일 년…….”
이제 남은 서류는 얄팍했다. 의료 기록은 캐롤라인이 처음으로 찾았던 병원인 험프리 종합 병원의 기록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우리 병원의 장비로는 진단이 어려움. 노르티움 종합 병원으로 옮겨 검진 요망.」
떨리는 눈이 최초의 기록을 마주했다.
「학계에 보고된 바 없는 특이한 경우라 치료가 어려울 것으로 예상됨.」
종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비 없는 악력에 의해 얄팍한 종이 모서리가 속절없이 구겨졌다.
「생존 기간 1년 6개월 정도로 예상.」
“안 돼…….”
손이 떨리는 탓에 글을 읽기가 어려웠다. 자제력을 잃은 손은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뿌예진 시야엔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프레져는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떴다. 맨 아래 칸에 적혀 있는 마지막 문장을 읽기 위해서였다.
어떤 끔찍한 말이 적혀 있을까. 프레져는 심호흡을 반복하며 종이 맨 아래로 시선을 옮겼다.
「산부인과 소견 이상 없음.」
“산부인과?”
그러나 마지막 칸에 적혀 있는 것은 프레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여태껏 흉부외과 소견만 나오다가 갑자기 왜?
프레져는 겨우 두 줄에 불과한 소견을 몇 번이고 반복해 읽었다. 자신이 제대로 읽고 있는 게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진료 기록이 잘못된 것 같은데…….”
「임신 아님.」
순간 프레져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눈에 담은 후에야 비로소 이해가 갔다.
사실 그녀가 산부인과에 찾아갈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설마 임신인 줄 알고……?”
캐롤라인은 자신이 임신을 한 줄 알고 병원에 갔던 것이었다.
설렘을 안고 온 캐롤라인을 기다리고 있던 건 가혹하기 짝이 없는 현실이었다. 그녀의 행복이 무참히 짓밟힌 것이었다.
프레져는 서류를 다시 살폈다.
산부인과에서 진료를 받았던 날은 4월 3일로 기록되어 있었다.
“4월 3일이면…….”
이때 프레져는 외국에 나가 있었다. 늘 그렇듯 일 때문이었다. 무려 한 달간의 긴 출장이었다.
아내가 끔찍한 절망을 안 채 돌아왔을 때도 그는 집에 없었다.
그뿐인가.
이 수많은 기록 속에서 프레져가 함께 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내의 시린 몸을 데워준 건 벽난로 하나뿐이었다.
그 따스한 봄에 벽이 까맣게 그을리도록 난로를 떼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캐롤라인이 지독한 절망에 삼켜질 동안 그는 아내가 병원에 다니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왜 말을 안 한 거야.”
귀띔이라도 해 주지. 그랬다면 적어도 당신을 혼자 보내진 않았을 텐데.
출장을 다녀온 후에라도 말해 줬다면 좋았을 텐데…….
프레져는 한 달간의 긴 출장을 마치고 돌아왔던 날을 떠올렸다.
출장을 마치고 저택에 돌아왔을 때 캐롤라인은 이른 저녁부터 자고 있었다.
오랜만에 집무실에서 밀린 업무를 처리하던 프레져는 캐롤라인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가정 교육을 미뤘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음 날, 한 달 만에 처음 갖는 식사 자리에서 프레져는 캐롤라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정 교육을 꽤나 미뤘던데.’
순간 고기를 자르던 캐롤라인의 손이 삐끗했다. 포크가 식기에 긁히며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기필코 캐롤라인을 책망하려 꺼낸 말은 아니었다.
‘피곤하면 몇 개 줄이도록 해. 너무 오래 미루진 말고.’
‘……정말요?’
‘하지만 예법 수업은 계속 듣는 게 좋겠어. 보아하니 식사 예절이 썩 좋은 것 같진 않아서.’
그 말에 캐롤라인은 들고 있던 식기를 놓았다. 그녀는 잘못 자른 탓에 접시 밖으로 튀어나온 채소를 보며 말했다.
‘다 나를 위해서니까요.’
생각해 보면 캐롤라인은 채소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날은 브로콜리를 먹고 있었던 걸까?
그때의 프레져는 그런 것에 의문을 가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
그 대화 이후 정확히 이틀 뒤부터 캐롤라인은 다시 가정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아픈 몸을 이끌어 춤을 추고, 예법도 다시 교육받았다.
이후로도 수많은 기회가 있었다. 아침 인사 자리에서, 식사 자리에서, 하다못해 잠들기 직전에도 프레져에겐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캐롤라인에게 묻지 않았다. 어째서 피곤해하냐고, 오늘은 왜 이리 말이 없냐고, 내가 없는 한 달 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묻지 않았다.
언젠가 행복은 사소한 것에서 온다고 말하던 캐롤라인이 떠올라 프레져는 종이에 얼굴을 묻었다. 좌절과 두려움을 홀로 짊어진 캐롤라인의 마음이 어떨지 감히 가늠이 되지 않았다.
“무관심…….”
프레져는 그 단어의 뜻을 이제야 이해했다. 자신은 캐롤라인이 정해 둔 마지노선을 넘은 것이었다.
“캐롤라인.”
프레져는 계속 아래를 보고 있던 탓에 뻣뻣해진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새 병원 복도엔 새벽의 어스름함이 찾아와 있었다. 겨울의 해는 몹시 짧은 탓에 어둠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캐롤라인, 캐롤라인…….”
프레져는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린 채 캐롤라인의 이름만을 하염없이 불렀다.
그녀가 자신에게서 도망친 이유를 알 것 같아서였다.
프레져는 머리를 움켜쥐며 기억을 더듬었다. 자신은 대체 언제부터 그녀를 망쳐 왔던 걸까.
‘시간을 되돌릴 수 있길 간절히 바랐어요.’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그때 당신 손을 잡으면 안 됐다고 수십 번을 후회했어요.’
어쩌면 그때부터였을까.
프레져는 캐롤라인이 처음으로 백작저에 오던 날을 떠올렸다.
설렘과 걱정이 공존하던 얼굴로 빗속을 걸어오던 여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