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짓씹듯 뱉은 말에 프레져의 입이 다물렸다. 어깨를 쥔 손에서 스르륵 힘이 빠져 나갔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길 간절히 바랐어요. 그때 당신 손을 잡으면 안 됐다고 수십 번을 후회했어요.”
일렁이는 눈동자를 본 캐롤라인은 알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여기서 더 망칠 수 있었으면.
그를 더 무너뜨릴 수 있었으면.
비틀린 욕망이 캐롤라인의 가슴 속에 솟아났다.
“당신이 밉고, 또 너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이 원망이 나조차도 감당이 안 돼서 나는 우리를 만나게 만든 신을 원망해요. 알아요?”
“…….”
“당신을 사랑한 걸 후회해.”
그 문장에 캐롤라인의 어깨를 짚고 있던 손이 툭 아래로 떨어졌다.
“당신을 사랑했던 그 모든 시간들이 너무 아까워요.”
그를 사랑했던 시간만 자그마치 3년이었다.
당신을 사랑했던 세월만큼만 더 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남은 시간이 1년이 아니라 3년이라면, 차라리 그렇다면 좋을 텐데.
속에 고여 있던 말을 전부 쏟아 낸 캐롤라인은 고개를 들어 프레져의 눈을 응시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처럼 깊고 푸르렀던 눈은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캐롤라인의 어깨를 내려다보는 프레져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그 공허함을 마주하자 캐롤라인의 가슴에 만족감이 차올랐다. 동시에 마음이 따끔거리기도 했다. 참으로 가학적인 기쁨이었다.
캐롤라인은 참지 않고 한마디를 더 뱉었다.
“더 미치겠는 건 뭔지 알아요? 당신을 사랑했던 걸 빼면 내 삶에 남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프레져 하나만을 바라봤던 어리석은 삶이었다. 삶에서 겨우 한 사람을 뺀 것뿐인데. 그를 도려낸 제 인생은 너무도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그 사실을 곱씹자 입 안이 썼다.
이렇게 보잘것없는 인생이라니.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건지.”
캐롤라인은 이게 자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프레져를 상처 주고 싶어 제 살을 들쑤시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죽어도 당신은 날 안 사랑하는데.”
갖은 애를 써도 프레져가 자신만큼 마음이 다치는 일은 없을 텐데.
그걸 깨닫자 맥이 탁 풀렸다.
“아니야. 당신은 안 죽어. 당신은 살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덤덤히 죽음을 말하는 캐롤라인에 프레져가 허겁지겁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캐롤라인이 무언가를 놓아 버린 사람처럼 말했기 때문이었다.
프레져의 눈엔 그녀가 놓은 것이 삶에 대한 의지처럼 보였다.
캐롤라인은 픽 바람 빠진 웃음을 뱉으며 말했다.
“아니요. 난 죽어요.”
이 와중에도 프레져는 사랑을 말하지 않았다. 그의 초점은 사랑이 아닌 오로지 ‘죽음’이라는 단어 하나에만 맞춰져 있을 뿐이었다.
그가 사랑을 모르는 이상, 악을 쓰고 난리를 친다 한들 프레져에게 자신보다 큰 상처는 입힐 수 없었다.
“제일 불쌍한 건 결국… 죽는 사람이거든.”
캐롤라인의 혼잣말이 뿌연 입김을 타고 퍼져 나갔다.
* * *
두 사람의 대화는 마샤가 나타남으로써 중단되었다.
베카와의 대화가 끝날 시간에 맞춰 캐롤라인을 데리러 온 마샤는 병원 입구에서 웬 남자 하나를 발견하곤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남자의 정체는 바로 휴고였기 때문이었다.
미처 놀랄 새도 없이 마샤는 허겁지겁 병원으로 뛰쳐 들어갔다. 병원 외곽을 몇 번이나 돈 후에야 그녀는 캐롤라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님!”
“마샤.”
꽤 오랫동안 밖에 있던 모양인지 캐롤라인의 몸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마샤의 등장에 긴장이 풀렸는지 캐롤라인은 그제야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것을 느꼈다. 설상가상으로 기침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날도 추운데, 대체 밖에서 뭘 하고 계셨던 거예요!”
경악한 마샤가 소리 지르듯 외쳤다. 마샤의 책망이 향한 쪽은 프레져였다.
귀족에게 소리를 지르는 평민이라니.
평소였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프레져는 넋이 나가 있는 탓에 마샤가 제게 무례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마님은 몸도 약하신데,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마샤가 꽁꽁 얼어붙은 캐롤라인의 손을 녹이며 말했다.
그리 오랜 시간 있던 것도 아닌데. 캐롤라인의 손은 혹한에 몇 시간 동안 방치되어 있던 사람처럼 새하얬다. 혈액 순환이 되지 않는 탓이었다.
프레져는 그제야 입고 있던 코트를 허둥지둥 벗었다. 캐롤라인에게 덮어 주기 위함이었다.
캐롤라인은 어깨에 옷감이 닿기도 전에 프레져의 손을 쳐 냈다. 프레져가 놓친 코트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마샤, 얼른 안으로 들어가자. 나 추워.”
“아, 네!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니까요.”
바닥에 떨어진 코트를 보며 놀란 것도 잠시, 마샤는 곧바로 캐롤라인을 건물 안으로 이끌었다.
“세상에, 손이 얼음장 같네. 일단 들어가서 홉킨스 박사님부터 뵙는 게 좋겠어요.”
마샤는 제 털옷을 벗어 캐롤라인의 몸에 덮었다. 프레져의 코트보다 훨씬 질 낮은 것이었으나 캐롤라인은 거부하지 않았다.
프레져는 점점 멀어져 가는 캐롤라인의 뒷모습을 보다 땅에 떨어진 제 코트 쪽으로 눈을 돌렸다. 눈이 덜 녹은 땅 위로 떨어진 코트엔 흙먼지가 잔뜩이었다.
그 코트를 집어 든 사람은 휴고였다.
“안 따라가십니까?”
휴고의 목소리가 멈춰 있던 프레져의 사고를 깨웠다.
“따라가셔야죠.”
“……그래. 그래야지.”
프레져는 그제야 캐롤라인을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캐롤라인은 마샤와 함께 흉부외과 진료실로 들어섰다.
오늘은 캐롤라인의 진료가 예정되어 있지 않았을 뿐더러, 대기 환자도 여럿이었다. 그 탓에 진료를 보지 못할 뻔했으나 마샤가 사정사정해 겨우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하고 죄송해요.”
마샤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캐롤라인을 홉킨스 박사 앞에 앉혔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그새 열이 올랐는지 캐롤라인의 몸은 뜨끈뜨끈했다.
“이대로 두면 꼼짝없이 열감기에 걸리겠군요.”
“밖에 좀 오래 계셨거든요.”
“내가 찬바람 조심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노르티움의 바람은 유독 차갑다고 말했을 텐데요.”
홉킨스 박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사과만 반복하는 마샤를 대신해 캐롤라인이 입을 열었다.
“남편이 찾아와서요.”
차트 위에 글씨를 써 내려가던 홉킨스 박사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남편이라면…….”
“맞아요. 선생님께서도 아시는 그 유명한 사람이요.”
“…….”
“제가 죽는다는 걸 어디서 알고 온 거 있죠.”
열이 올라 헤롱거리면서도 캐롤라인은 또박또박 말했다.
가만히 캐롤라인의 말을 듣던 홉킨스 박사는 다시금 차트에 진료 내용을 적기 시작했다.
“이미 복용하는 약이 많아서 여기서 약을 더 늘리면 몸에 무리가 갈 겁니다. 꼭 필요한 감기약은 최소한으로 처방해 주겠지만…….”
홉킨스 박사는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곤 툭 뱉듯 말을 이었다.
“정 힘들 것 같으면 입원을 해도 됩니다.”
무심하게 던져진 말에 캐롤라인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건 그녀 옆에 서 있던 마샤도 마찬가지였다.
캐롤라인이 고위험군 환자이긴 하나, 겨우 감기를 가지고 입원하는 환자는 드물었다.
“적어도 입원해 있는 동안은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할 수 있을 테니까요.”
홉킨스 박사는 캐롤라인에게서 프레져를 떼어 놓을 수 있는 정당한 방법을 권유하고 있는 거였다. 일종의 배려인 셈이었다.
“남들 눈에도 보이나 보네요.”
프레져와 자신의 관계가.
캐롤라인은 뜨끈해진 이마를 짚으며 피식 웃었다.
하긴, 아내가 아픈 것도 모르는 남편이라는 점만 봐도 다들 프레져가 어떤 사람인지 예측이 가능할 터였다.
홉킨스 박사는 구태여 그런 말까지 하진 않았다.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니 진료 기록을 보여 달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그 부분은 우리 병원 관계자들이 알아서 처신할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을 겁니다.”
다만 무심한 배려를 덧붙일 뿐이었다.
캐롤라인은 다시 진료에 집중하는 홉킨스를 보며 살풋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소소한 배려가 너무도 큰 위안이 됐기 때문이었다.
“아니요. 그건 이제 필요 없을 거 같아요. 남편은 제가 시한부라는 걸 알고 있거든요.”
어차피 제가 곧 죽는다는 건 음지의 문화를 접한 사람들이라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프레져가 노르티움까지 찾아온 마당에 숨길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 보여 줘도 괜찮아요. 차라리 본인 눈으로 직접 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네요.”
“……알겠습니다.”
“감사하지만 입원도 사양할게요. 병원에 하루 종일 박혀 있는 건 지긋지긋해서요.”
잠시 말이 없던 홉킨스 박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의 사생활에 개입하는 건 이 정도면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몇 종류의 약과 주의 사항을 처방받은 캐롤라인은 마샤의 외투에 감싸여 진료실을 빠져나갔다.
캐롤라인은 진료실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프레져와 마주쳤다.
“의사가 뭐라고 했지? 많이 안 좋은 건가?”
“비켜요.”
“집에 갈 거면 내 마차를 타고 가. 넓으니까 충분히-.”
“마샤, 가자.”
캐롤라인은 프레져의 말을 무시했다. 그쪽에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제발 신경 꺼요.”
“귀찮게 하려는 거 아니야. 집까지만 데려다주려고-.”
“아, 머리 아파.”
질끈, 눈을 감은 캐롤라인이 이마를 짚었다.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마샤는 프레져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캐롤라인을 부축해 병원을 나섰다.
건물 밖으로 나가자 아까보다 거세진 바람이 불어왔다.
살갗에 닿는 공기는 말도 안 되게 찬데, 캐롤라인의 속에서는 뜨거운 기운이 펄펄 끓고 있었다. 몸에 힘이 빠져 걷기도 어려웠다.
“마님, 조금만 더 가면 마차 정류소예요.”
“으응.”
“정 힘드시면 제가 얼른 가서… 어머, 마님!”
미처 말을 끝낼 새도 없었다. 마샤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던 손에 스르륵 힘이 풀리더니, 캐롤라인은 그만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마님, 마님!”
캐롤라인의 몸은 바닥에 닿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무너지는 그녀의 몸을 붙잡은 건 프레져였다.
프레져는 캐롤라인의 무릎 밑에 손을 넣고 그녀를 가뿐히 들어 올렸다.
“나 괜찮아. 참을 만… 해…….”
“열이 이렇게 나는데 무슨 소리야.”
프레져는 열에 취해 중얼거리는 캐롤라인을 다그쳤다. 열이 나는 건 둘째 치고, 품에 안긴 그녀의 몸이 너무도 가벼워 욕지기가 치밀었다.
“뭐 하나. 얼른 진료실까지 앞장서지 않고.”
프레져가 마샤를 향해 턱짓했다.
그런 프레져를 저지한 건 캐롤라인이었다.
“입원… 싫어.”
“입원하려는 거 아니야. 가서 의사만 다시 보려는 거야.”
프레져는 맹세코 그녀를 병실에 집어넣으려는 마음이 없었다.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병원보단 조용한 곳에 가 전문 의원을 부르는 게 더 나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거짓말. 싫어.”
정신을 잃은 것은 아닌지, 캐롤라인은 연신 고개를 휘저었다. 프레져는 이미 캐롤라인에게 신뢰를 잃은 지 오래였다.
“당신도, 주사랑 기계도…….”
“…….”
“전부 다… 싫어.”
너른 가슴에 둥그런 이마가 비벼졌다. 그 애처로운 몸짓에 프레져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저, 담당 선생님께서도 괜찮다고 했으니 집으로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아요. 집엔 저도 있고, 의료 지식에 해박한 에릭도 있으니까요.”
마샤가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
안 그래도 매일같이 약과 주사를 달고 사는 캐롤라인이었다. 저렇게 싫어하는 사람을 억지로 병실에 집어넣고 싶진 않았다.
결국 프레져는 졌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곤 제 재킷을 벗어 캐롤라인의 몸 위에 덮었다. 마샤 역시 부랴부랴 장갑과 목도리를 벗기 시작했다.
“휴고, 가서 마차를 이쪽으로 불러와라. 캐롤라인을 눕혀야 하니까 안에 담요부터 깔아 두고.”
“네.”
휴고는 헌티드 가문의 마차를 세워 둔 곳으로 헐레벌떡 뛰어갔다. 미리 두꺼운 이불을 준비해 둘 것을,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머지않아 마차가 도착하고 프레져는 캐롤라인을 안은 채 마차 위에 올라탔다.
평민으로 보이는 여자를 안아 든 귀족 남자가 헌티드 가문의 마차에 올라타자 주변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 관심을 무시한 프레져는 얇은 담요 위에 캐롤라인을 눕혔다. 그러곤 제 옷깃을 붙든 캐롤라인의 손을 떼기 위해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안 돼.”
힘없이 떨어져 나가던 캐롤라인의 손이 순간 프레져의 목을 껴안았다.
“나만 혼자 두고 가지 마…….”
그 춥고 넓은 곳에 또 나만 내버려 두고 가지 마.
캐롤라인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프레져의 목을 더 꽉 안았다.
“……그래. 어디 안 갈게.”
입술을 꽉 깨문 탓에 억눌린 목소리가 나왔다. 프레져는 제 목에 감긴 캐롤라인의 손을 마주 잡으며 마차에 올랐다.
“약속할게.”
“으응.”
캐롤라인은 프레져의 어깨에 무의식적으로 뺨을 부볐다. 열이 오른 볼에 차가운 옷감이 닿는 게 좋았다.
말발굽이 다그닥거리는 소리가 흐려지는 의식 너머로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