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캐롤라인은 병원 밖 인적이 드문 길로 프레져를 이끌었다. 앞서 걷는 캐롤라인의 뒤를 프레져가 두어 걸음 떨어진 채 따라 걸었다.
두 사람은 걷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프레져는 도저히 입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아서, 캐롤라인은 이 상황이 허무하기 짝이 없어서였다.
이제 구경거리가 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제 이름을 부름으로써 모든 게 끝나 버렸다.
캐롤라인은 자신이 앞으로 일 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기구한 운명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동정을 받는 건 이제 지긋지긋했다.
새롭게 만난 사람들 앞에서는 웃고 싶었다. 일 년밖에 살지 못하는 불쌍한 인간이 아니라 남편의 사랑도 받지 못한 가엾은 여자가 아니라…….
“당신은 참 재주도 좋아요. 이렇게 기가 막힌 타이밍에 다 나타나고.”
캐롤라인은 프레져 쪽에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베카의 충격받은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역시 극단 대표씩이나 되는 사람은 다른가 봐요.”
연극이었다면 평론가들이 박수를 쳤을 장면이었다. 등장만으로도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다니.
“일부러 그런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너무 괘씸해서?”
“…….”
“당신이 준 재산도 전부 팔아 버리고 심지어 도망쳤으니까.”
“…….”
“정말 그래요?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봐요!”
결국 언성이 높아졌다. 차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한 캐롤라인은 프레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당신이 망쳤잖아요! 책임은 못 질 망정 무슨 말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애써 참아 보려 했건만 자제되지가 않았다. 위태롭게 버티고 있던 둑이 터지자 프레져를 향한 원망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항상 나를 망치는 건 당신이에요. 전부 당신 때문이라고요!”
프레져는 평범한 시골 소녀의 삶을 망쳤고, 병원에서의 평화로운 생활까지 망쳤다.
자신을 파괴하는 건 오로지 프레져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프레져는 캐롤라인의 책망 앞에서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지난 밤의 환청이 겹쳐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네가 또 망쳤구나.’
그가 애써 부정하고 있던 사실에 캐롤라인이 낙인을 찍었다.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결국 자신은 모든 걸 망쳐 버리고 마는 존재였다.
“내가 말했잖아요. 이제 당신 안 기다린다고. 당신이 없어야 내 마음이 편하다고. 그런데 왜 온 거예요? 대체 왜?”
마지막 문장은 거의 울부짖는 것에 가까웠다. 분노와 설움을 이기지 못한 몸이 오들오들 떨려 오기 시작했다.
캐롤라인은 화가 났다. 제 모든 것을 망쳐 놓고도 저리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있는 게, 꼭 벽을 보고 얘기하던 것 같던 지난날을 떠올리게 했다.
“캐롤, 캐롤라인, 나는…….”
프레져는 몇 번이나 입을 뻐끔거린 후에야 겨우 목소리를 내었다. 입 밖으로 흘러나온 말들은 제대로 된 문장이 되지 못한 채 허공에서 부서졌다.
그는 꼭 목소리를 내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캐롤라인은 그제야 눈앞에 선 사내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마치 급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 헐레벌떡 뛰어온 사람처럼.
그가 이리 정신을 놓고 찾아올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다 알고 왔구나.’
이에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는 희망마저 사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찬물을 맞은 듯, 열이 올랐던 속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 가십지를 봤군요.”
“…….”
침묵은 긍정이었다.
“그게 그렇게 부끄러웠어요? 연락도 없이 덜컥 찾아올 만큼?”
캐롤라인이 보다 차가워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 소리 하려고 온 거잖아요. 도대체 행동거지를 어떻게 했길래 그딴 가십지에 헌티드의 이름이 오르냐고.”
프레져의 입이 멍청하게 벌어졌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밭은 숨이 새어 나왔다.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기분이었다. 머리가 멍해져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캐롤라인이 설마 저런 말을 할 줄은 몰라서였다.
‘아내에게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순간 콘월 후작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사람들의 눈에 자신은 어떻게 보였을까. 대체 어떤 모습이었기에 캐롤라인마저도 저런 태도를 보이는 걸까.
초조해진 프레져는 캐롤라인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나는, 나는 당신이 걱정돼서 온 거야.”
“…….”
“책임 같은 건 따져 물을 생각도 없었어. 나는 그저…….”
프레져는 붕어처럼 입을 몇 번이나 달싹인 후에야 말을 이었다.
“그 망할 소문처럼, 정말, 정말 당신이…….”
프레져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감히 뒷말을 뱉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프레져는 떨리는 눈으로 캐롤라인을 응시했다. 야윈 그녀의 얼굴 위로 매일같이 꿨던 꿈이 겹쳐 보였다.
파랗게 질려 있던 얼굴, 차가운 몸, 아래로 축 늘어진 머리카락, 카펫을 흥건히 적시는 붉은 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절대, 절대 그럴 리 없어.”
프레져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머리를 침범하는 잔상들을 떨치기 위함이었다.
그는 염원에 가까운 말들을 중얼거리며 캐롤라인의 손목을 붙들었다.
“내 눈앞에 있잖아. 이렇게 멀쩡히 있잖아. 내 손에 잡히는데 당신이 사라질 리가…….”
온기가 닿은 건 찰나였다. 가느다란 손목은 프레져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그의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프레져는 멍한 얼굴로 비어 버린 제 손을 응시했다.
“당신 눈엔 내가 멀쩡해 보여요?”
캐롤라인의 말에 프레져는 아래에 떨궜던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퉁퉁 부은 캐롤라인의 발목이었다. 복사뼈의 위치조차 알 수 없게 부어 버린 발목은 두꺼운 스타킹으로도 가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다음으로 보인 것은 손이었다. 번갈아 가며 혹사당한 양 손등엔 주삿바늘 자국이 잔뜩이었다.
그 흔적을 애써 외면하고자 프레져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는 마침내 캐롤라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했다.
부은 몸과는 달리 얼굴엔 살이 하나도 없었다. 푹 꺼진 눈두덩과 패인 볼은 흡사 해골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혈색 없는 입술은 잔뜩 갈라져 있었다.
프레져는 손을 들어 올려 캐롤라인의 뺨을 매만졌다. 이번만큼은 캐롤라인도 그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실로 오랜만에 만져 보는 그녀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손에 닿는 촉감은 이전과 달랐다. 손가락에 닿는 피부가 거칠었다.
마치 살아 있는 송장처럼.
“아…….”
이제 프레져는 인정해야 했다. 애써 외면해 왔던 것을 봐야만 했다.
그녀가 죽는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캐롤라인은 그의 눈에 들어차는 현실을 보며 입을 열었다.
“걱정은요, 이런 걸 아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예요.”
상대의 변화를 눈치채는 것은 관심에서 나온다. 애정이 깃든 눈으로 상대를 바라봐야만 상대의 변화를 알아챌 수 있다.
걱정은 관심의 연장선이다. 상대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은 걱정을 할 수 없다.
“그러니 당신은 나를 걱정할 자격이 없어요.”
식탁에 올라오는 음식의 종류가 바뀐 것도, 평소보다 수면 시간이 늘어난 것도, 유독 추위를 많이 탄다는 것도,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다면 알 수 있었을 텐데.
프레져는 그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프레져, 나는 멀쩡하지 않아요.”
캐롤라인은 프레져의 손을 끌어 제 가슴께에 올렸다. 그가 불규칙하게 뛰는 심장을 느낄 수 있도록.
“여기에 문제가 있어요.”
“…….”
“그래서 일 년밖에 살지 못한대요.”
캐롤라인의 가슴을 짚은 손이 움찔거렸다.
“어쩌면 일 년도 못 살 수도 있고요.”
“……그만해.”
“남은 일 년도 그리 편하게 보내진 못할 거예요. 통증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니까요.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아프지 않게 죽길 바라는 게 다겠죠.”
“…그만 말해. 제발.”
프레져가 애원하듯 말했다. 그러나 캐롤라인은 멈추지 않았다.
“알고 싶어서 온 거잖아요. 그럼 끝까지 들어야죠.”
“캐롤라인!”
“손쓸 방법이 없어요. 약으로도 수술로도 나을 수 없대요. 나는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고통을 두려워하며 죽기만을 기다리게 될 거예요.”
“그만! 제발 그만!”
프레져는 손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 소리쳤다. 그녀의 죽음에 대한 말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왜 당신이 그런 표정을 해요? 죽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난데.”
캐롤라인은 하얗게 질린 프레져의 얼굴을 보며 조소했다.
“누가 보면 당신이 나를 엄청 아끼는 줄 알겠어요.”
대체 언제부터 날 걱정했다고.
캐롤라인은 발작적으로 몸을 떠는 프레져를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이 관심과 걱정을 조금만 더 일찍 받았더라면 현실이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저 냉혈한 인간에게도 정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기도 했다.
“죽는 게 참 대단하긴 한가 봐요. 당신의 그런 얼굴도 보고.”
“네가 죽는 걸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말하지 마!”
프레져가 캐롤라인의 어깨를 쥔 채 소리쳤다. 이렇게 고성을 지르는 모습은 처음이라 캐롤라인은 조금 당황했다.
맞닿은 어깨를 타고 프레져의 요동치는 감정이 전해져 왔다. 그걸 느끼자 희한하게도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자신은 생각 이상으로 저 남자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던 걸지도 몰랐다.
“지금 웃음이 나와? 당신이 죽어. 죽는다고!”
가녀린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캐롤라인은 그 고통이 기꺼웠다.
저 남자도 상처를 입는구나.
그에게 상처를 입힐 사람은 나뿐이구나.
“죽는 게 뭐가 대수라고요. 당신 곁에 살았던 때를 생각하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지경이에요.”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 그를 상처입히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이 그에게 잊혀지지 않는 악몽으로 남길 원했다.
당신 때문에 나는 너무 힘들었으니까.
당신이 아파 봤자 내 반의 반만큼도 고통스럽지 않을 테니까.
“당신과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불행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