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75)화 (75/156)

#75

“캐롤라인, 왔어요?”

흰 가운을 입지 않은 클리브는 사복 차림이었다. 베이지색 팬츠에 품이 큰 셔츠를 입고 있는 클리브는 평소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이리 편안한 복장을 하고 있는 클리브는 처음이라, 캐롤라인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요? 이상해요?”

“아니요. 그냥… 되게 색달라서요.”

“이상하단 말을 돌려서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럴 리가요. 아주 근사하다는 뜻이에요.”

포스스 웃음을 터트린 캐롤라인은 클리브의 맞은편에 가 앉았다.

진작 짐을 비운 탓에 연구실 안은 썰렁하기 짝이 없었다. 록하드와 함께 쓰는 곳이라고는 해도 클리브의 짐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탓이었다.

캐롤라인은 겨울 햇살이 내려앉은 연구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이곳에 찾아오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클리브 선생님은 안 계실 테니까.’

캐롤라인은 클리브 덕에 많은 것을 얻었다. 처음엔 절망하지 않는 법을 배웠고 그다음엔 타인과 쉽게 가까워지는 법을, 마지막으론 보육원에 대한 도움까지 받았다.

환자와 의사의 관계를 떠나서 클리브는 캐롤라인에게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감사했어요, 선생님.”

그래서 캐롤라인은 진심을 담아 감사를 전했다.

“그동안 감사했고, 앞으로도 감사할 거예요. 선생님이 가시는 곳마다 축복이 있기를 기도할게요.”

“왜 그렇게 말해요, 캐롤라인. 다시는 못 볼 사람처럼.”

“…….”

“나 영영 가는 거 아니에요. 다시 글랜포드로 돌아올 거예요.”

“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영영 떠나 버릴 사람인걸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작별의 순간까지 우울한 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또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아서 캐롤라인은 그저 웃었다.

“다시 만났을 땐 우리 둘 다 행복하게 웃고 있었으면 좋겠네요.”

고통도, 죽음에 대한 공포도 느끼지 않고 그저 행복하게.

“선생님께는 정말 근사한 선물을 드리고 싶었는데, 뭘 드려야 할지 고민하다 보니 벌써 오늘이 되어 버린 거 있죠?”

캐롤라인은 가방에서 선물 상자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열어 봐도 돼요?”

“그럼요, 대단한 건 아니지만요.”

상자 안에는 황동으로 만든 고래 모형이 들어 있었다. 뚜껑을 들어 올리자 자장가를 닮은 음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오르골이네요?”

부드러운 햇빛이 감도는 연구실 안에 잔잔한 선율이 울려 퍼졌다. 캐롤라인은 솟았다 가라앉길 반복하는 고래를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플라이크에 갔을 때 산 거예요. 태어나 처음으로 고래를 봤는데 너무 신기하고 아름다웠거든요.”

프레져 없이 여행을 간 것은 처음이었다. 남에게 얽매여 있지 않고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움직이는 것은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설레고 즐거운 일이었다.

“바다는 어렸을 때 딱 두 번 가본 게 전부였거든요. 나이를 먹고 본 바다는 제가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더라고요.”

바다는 얼마나 넓고 갈매기는 얼마나 많던지, 또 햇빛은 얼마나 뜨거운지.

“난 왜 이 좋은 것들을 모르고 살았는지…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죽을 때가 되어 세상의 아름다움을 알아 버린 게 너무도 억울했다.

로우밸리의 시골 아가씨였다면 달랐을까, 하는 후회도 들었다.

“깊은 바닷속에서 헤엄치다가, 또 물 위로도 올라왔다가.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고래가 너무 부럽던 거 있죠? 이건 그래서 산 거예요.”

그녀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진 동물은 이 세상 어떤 생명체보다 아름다웠다. 다시는 볼 수 없을 테니 모형이라도 옆에 두고 싶었다.

“이렇게 귀한 걸 저한테 줘도 되는 겁니까?”

“네, 선생님은 제게 고래보다도 귀한 사람이니까요.”

싱긋 웃으며 답하는 캐롤라인에 클리브는 고래 오르골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예로부터 고래는 행운을 상징하는 동물이었죠. 장수하는 동물이기도 하고요.”

“그건 몰랐네요.”

“그러니 캐롤라인도 고래처럼 아주 오래 행복할 겁니다. 내가 이 오르골을 아주 소중히 간직할 테니까요.”

“감사해요.”

오르골에서 흘러나오던 음악 소리가 끝났다.

연구실엔 정적이 흘렀다.

“캐롤라인, 뭐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클리브는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그녀가 불편해할 수도 있는 질문이기 때문이었다.

“얼마든지요.”

“어째서… 헌티드 백작과 결혼한 겁니까?”

“…….”

캐롤라인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클리브는 멋쩍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역시 곤란한 질문이었군요.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사랑했거든요.”

“…….”

“사랑했어요, 그 사람을.”

캐롤라인은 움직임을 멈춘 고래 모형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처음 백작저에 갔던 날, 나는 그 사람을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연못 옆에 잔뜩 피어 있던 푸른 수국, 우산을 쓴 채 부슬비 속에 서 있던 너른 등.

당신을 기다렸다며 손을 내미는 남자를 어떻게 마다할 수 있을까.

“섣부른 행동이었죠. 오롯이 내 선택이니 남 탓을 할 수도 없고요.”

캐롤라인은 시선을 돌려 깃털 구름이 떠 있는 하늘을 응시했다. 백작저에 처음 갔던 날과는 달리, 하늘은 몹시도 맑았다.

“이혼할 생각은…… 있습니까?”

예상치 못한 말에 캐롤라인은 고개를 돌렸다. 멈춰 있던 오르골을 보고 있던 클리브는 어느덧 캐롤라인을 보고 있었다.

“캐롤라인이 원한다면 내가 도와주겠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게 말해 줘요.”

클리브는 할 수만 있다면 캐롤라인에게서 프레져를 완전히 떼어 놓고 싶었다.

그러나 프레져를 떠올릴 때마다 짓는 그녀의 표정이 클리브를 뒤로 물러서게 만들었다. 그 표정을 무어라 정의 내릴 순 없었으나, 클리브는 그게 쉽게 정리되지 않을 감정임을 알았다.

“저도 잘 모르겠네요. 그 사람을 사랑하는지, 아닌지.”

역시나 캐롤라인은 모호한 대답을 했다.

“죽을 만큼 미운데, 또 그 사람이 죽는다 생각하면 눈물이 날 것 같고. 꼴도 보기 싫은데 영영 못 본다고 생각하면 아쉬울 것 같고.”

남들이 듣는다면 미련하다고 손가락질할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캐롤라인은 제 마음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미련한 감정이라 사람들이 이걸 미련이라고 부르나 봐요.”

캐롤라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클리브 역시 그녀를 따라 옅은 미소를 지어 보았다. 캐롤라인이 민망하지 않도록 보인 배려였다.

“신경 써 주셨는데 이런 대답밖에 못 해서 죄송해요, 선생님.”

“아닙니다. 나는 또 캐롤라인이 얼마 살지도 못할 거 이혼을 왜 하냐고 할까 봐 내심 겁먹었거든요.”

클리브는 부러 농담조로 이야기했다. 아직 그녀의 마음에 그가 들어갈 자리는 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혼을 할지 말지 잘 고민해 봐요. 새로운 수술법이 성공하게 되면 캐롤라인은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네, 그럴게요.”

캐롤라인이 다가올 봄만큼이나 따사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그때까지 몸 건강히 잘 지내요, 캐롤라인.”

“네. 선생님도 잘 지내세요.”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웃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차마 뱉지 못한 많은 말들이 서로의 명치끝에 아릿하게 남아 있었다.

* * *

프레져는 그날 오후 바로 북부로 향했다. 제대로 된 짐조차 꾸리지 않은 채였다.

속이 타는 프레져를 아는지 모르는지, 레닐 강을 건널 즈음부터 눈이 오기 시작했다. 강을 건너던 배는 아주 느리게 나아갔고, 북부 땅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눈발이 거세져 있었다.

그러나 프레져는 멈춰 서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동안 캐롤라인은 비교적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몇 번의 호흡곤란이 있었으나 이겨 낼 수 있을 정도였다.

“브리오, 나 왔어.”

퇴원한 캐롤라인은 병원에 방문할 때마다 꼭 브리오에게 들렀다. 혼자 병원에 남아 있는 쓸쓸함이 어떤 건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모아도 같이 와써!”

모아가 캐롤라인의 뒤에서 빼꼼 얼굴을 드러냈다. 베카는 일이 생겨 캐롤라인에게 아이를 맡기고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모아가 동화책도 가져왔어. 같이 읽자!”

이빨 요정이 등장하는 이야기의 동화책은 이미 영구치가 다 자란 브리오가 읽기에는 지나치게 유치한 내용이었으나, 소년은 내색하지 않았다. 책을 절반쯤 읽었을 때는 모아의 요구에 맞춰 이빨 요정을 연기하기까지 했다.

‘조용해 가지고선 은근 이런 건 빼지 않고 잘한다니까.’

캐롤라인은 남몰래 입을 가리고 웃었다.

머지않아 베카가 돌아오고, 문진 시간이 찾아온 브리오를 위해 세 사람은 자리를 비켰다. 캐롤라인은 모아의 손에 달랑달랑 흔들리며 복도를 걸어갔다.

“베카가 모아를 두고 자리를 비우다니. 많이 급한 일이었나 봐요.”

“패트릭이 급하게 연락을 보내서요.”

베카는 아직까지 진정이 되지 않았는지 초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캐롤라인은 걱정이 되었으나 묻지 않는 것이 예의인 것 같아 말을 아꼈다. 그래도 다시 돌아온 걸 보니 안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참, 보육원 완공이 생각보다 일찍 될 것 같아요. 2월이면 아이들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정말요?”

베카의 얼굴이 화악 밝아졌다.

캐롤라인은 보육원에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자마자 바로 임상 실험실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생각보다 건물이 넓어서 실험실 아이들 말고 다른 환아들도 받아 볼까 고민 중이에요. 물론 운영 상황을 보고 결정해야겠지만요.”

“좋은 생각이네요.”

캐롤라인과 베카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엊그제 눈이 한바탕 내려서 그런지 병원엔 유독 사람들이 많았다. 진료 대기석이 꽉 찬 탓에 벽에 기대 서 있는 사람들도 여럿 보였다.

‘저건…….’

한 남자가 읽고 있는 물건을 발견한 캐롤라인은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조잡한 표지의 타블로이드지는 캐롤라인에 대한 가십이 실렸던 것이었다.

“이번 호는 별로 재미없다.”

“그래?”

“어, 헌티드 백작 부인이 시한부라는 건 말곤 볼 거 없어.”

킬킬거리던 남자는 읽던 가십지를 쓰레기통에 처박은 뒤 제 무리로 돌아갔다.

“캐롤라인, 왜 그래요?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요?”

“아, 아니에요. 잘못 봤나 봐요.”

캐롤라인은 베카와 모아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빨리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은 캐롤라인의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엄마, 시한부가 뭐야?”

모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을 해 왔기 때문이다.

“……좋은 뜻은 아니야.”

병과 생명에 대해선 누구보다 예민한 베카는 대답을 피했다. 하지만 호기심 많은 다섯 살은 포기하지 않았다.

“왜? 왜 안 좋은 건데? 나쁜 사람이라는 뜻이야? 응?”

계속되는 물음표 공격에 베카가 체념한 듯 입을 열었다.

“……살 수 있는 날이 정해져 있는 사람을 말해. 병에 걸려서 오래 살지 못하는 사람들.”

“되게 슬픈 거네?”

“그치. 불쌍하기도 하고.”

“그럼 백작 부인이라는 아줌마는 엄청 슬프고 불쌍한 사람이구나아.”

모아의 천진한 목소리가 캐롤라인의 가슴을 후볐다. 그러나 캐롤라인이 걸음을 멈춘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출입문이 열리는 순간,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사랑했고, 원망해 마지않았던 남자.

“캐롤라인.”

프레져는 한겨울의 냉기를 묻힌 채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올 한 해 신문에 가장 많이 실린 남자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캐롤라인 헌티드.”

그 이름이 프레져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캐롤라인은 주저앉고 싶어졌다.

왜 하필 지금 이 순간에 나타난 건지.

캐롤라인은 장막처럼 얼굴을 가리고 있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드러난 그녀의 얼굴엔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표정이 걸려 있었다.

“당신은 정말…… 끝까지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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