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제럴드는 발끈하고 싶지 않았다.
프레져의 우위에 서서 보다 오만한 얼굴로 프레져를 내려다보고 싶었다.
제럴드는 사생아였고 왕가에 늦게 입적된 탓에 상류층의 화술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먼저 말이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럴 리가요. 뭐든 처음은 미숙한 법이지 않습니까.”
제럴드의 속을 긁는 대답이었다. 분명 사생아인 자신을 비웃는 말이 맞는 것 같은데, 아니라 부정하니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모른 척 넘어가기엔 왕자로서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백작의 태도는 참으로 건방지군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백작이 왕자인 줄 알겠습니다?”
극단은 무너져 가고 아내는 죽어 가는데, 대체 뭘 믿고 저리 오만방자한 건지.
“백작의 처지를 생각하세요. 구설수에 휩싸여 무너져 가는 극단을 신경 써 주는 이가 국왕 폐하 말고 어디 있답니까?”
“구설수에 휩싸였다고 해도 헌티드는 헌티드입니다. 헌티드에 음악으로 견줄 수 있는 가문은 글랜포드에 없습니다.”
“전부 옛날이야기지요. 극단뿐만 아니라 가문에도 망조가 들었는데!”
망조라는 단어에 잔을 들어 올리던 프레져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며칠 전, 헌티드하우스를 몰락 왕조에 비유하던 크렘 백작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미세한 움직임을 본 제럴드의 얼굴엔 미소가 지어졌다. 저 고고한 자존심에 금을 냈다는 사실이 몹시도 유쾌했다.
저 얼굴을 보기 위해 삼류 가십지에 백작 부인에 대한 정보를 흘린 거였다.
온갖 음담패설 도는 가십지에 헌티드의 이름이 실리다니! 가장 천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입에서 제 가문이 놀아나고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분개할까.
그 반응이 너무나 궁금했다.
‘저 잘난 낯짝을 더 망쳐 놓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프레져 헌티드는 그 가십지를 봤을까? 봤다면 이렇게 태평하게 있을 수 없을 텐데.
‘아직 모르는 건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것을 보니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제 입으로 직접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백작 부인이 시한부 환자라는 사실을 내가 모를 줄 알았습니까? 그래서 이리 오만방자하게 구는 겁니까?”
제럴드의 얼굴에 비열한 미소가 걸렸다. 제 도발에 넘어갈 프레져를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 혹시 벌써 옆자리가 허해서 그런 겁니까? 하긴, 내조해 줄 사람이 일 년 후면 죽는다는데 그리 흔들리는 것도 당연하지요.”
“…….”
“미리 말을 하지 그랬습니까? 내가 좋은 재가 자리를 알아봐 줄 텐데 말입니다!”
분명 당황하겠지. 어쩌면 제가 경솔했다며 무릎을 꿇고 사죄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제럴드가 상상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프레져는 눈보라보다 차가운 얼굴로 제럴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과 달리, 테이블 아래에 둔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어제고 오늘이고 운이 없었다 생각하려 했다. 어제는 미친 약쟁이의 헛소리로, 오늘은 미친개가 발발거리는 것으로 치부하려 했다.
그러나 캐롤라인과 관련된 말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떨리는 손을 숨기는 것이 그가 유지할 수 있는 최대의 평정이었다.
“모름지기 할 말이 있고 해선 안 되는 말이 있습니다. 왕자 전하라 해도 제 아내의 목숨을 가늠하는 발언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가슴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프레져는 제럴드의 말을 부정하는 것을 선택했다.
안 좋은 말을 입 밖으로 뱉으면 그대로 일어난다 말하던 캐롤라인의 목소리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 행동으로 인해 죽음이 캐롤라인을 비켜 간다면 자신은 백 번이고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
“백작, 정말 모릅니까? 아니면 모른 척하는 겁니까?”
제럴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프레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그 정도 연기로 내가 넘어갈 거라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내가 직접 노르티움 병원에서 받아 온…….”
따지듯 말하던 제럴드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불안하게 떨리는 동공이 프레져의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작, 정말 모르는군요.”
그 한마디가 실낱처럼 남아 있던 마지막 희망을 모조리 사살했다.
“시한부…….”
그 단어의 의미를 깨닫는 데에만 한참이 걸렸다. 그 모든 의미를 이해하는 순간 온몸에 힘이 풀렸다.
쾅!
둔탁한 마찰음이 유리온실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갑작스레 일어선 프레져에 의자가 넘어간 것이었다.
테이블 위의 찻잔도 깨질 만큼의 소란이었으나 지금의 프레져에겐 들리지 않았다.
“시한부, 방금 시한부라고 했습니까?”
테이블 위에 손을 짚은 프레져가 제럴드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조각난 찻잔이 손바닥을 찔렀으나 그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구명줄이라도 찾는 듯, 손안에 있는 조각을 꽉 움켜쥐기까지 했다.
“대답해. 정말 내 아내가, 캐롤라인이…….”
일 년밖에 살지 못해?
차마 뱉지 못한 문장이 혀끝에서 맴돌았다.
“그, 그래요. 일 년밖에 살지 못합니다.”
제럴드가 말을 뱉는 순간 몸의 떨림마저 멎었다. 프레져는 숨을 쉬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삐- 하는 소리와 함께 이명이 들렸다. 이 세상의 모든 물체가 중력을 거스르고 부유하는 느낌이 들었다. 몸의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출입문 쪽에서 들려온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 소란을 들은 시종들이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흰 테이블보에 잔뜩 흩뿌려진 피에 시종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헌티드 백작, 대체 이게……!”
소란의 원인을 문책하려 했으나 프레져는 이미 자리를 비운 후였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엔 선명한 색의 피만이 가득 고여 있었다.
* * *
프레져는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몇 번이나 발을 헛디뎠다. 발목을 몇 번이나 접질렸으나 아픈 줄도 몰랐다. 그의 머릿속엔 어서 캐롤라인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오셨습니…….”
예상보다 이른 가주의 귀환에 사용인들이 당황했으나 프레져는 이를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는 길을 막는 것들을 던지듯 밀쳐 내며 전화실로 향했다.
떨리는 손이 몇 번이고 다이얼을 잘못 눌렀다. 시종을 시켜 가까스로 전화를 거는 데 성공했으나 노르티움 시청까지 연결되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수도에서 북부까지 신호를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젠장!”
프레져는 전화기를 던지듯 내려놓곤 다시 마차로 향했다. 그런 프레져를 발견한 건 때마침 저택으로 들어오던 로겐과 휴고였다.
겁에 질려 있는 사용인부터, 아직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말들. 넋이 나가 있는 대표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로겐은 허겁지겁 프레져에게로 달려갔다.
“대표님, 무슨 일이십니까!”
“지금 당장 노르티움에 가야 한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손은 왜 그 모양-.”
“놔!”
괴물 같은 힘으로 팔을 뿌리치는 프레져에 로겐은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이제 이곳에서 프레져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그와 비슷한 체격을 가진 휴고뿐이었다.
에드먼드가 사용인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휴고가 마차에 타려는 프레져를 붙잡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대표의 몸에 손을 댄 것이었다.
“대표님, 갑자기 노르티움이라니요. 마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마님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프레져의 몸에 스르륵 힘이 빠졌다. 프레져는 저항하는 대신 휴고의 옷깃을 잡고 매달렸다.
“캐롤라인이 죽는대.”
“…….”
“일 년도 살지 못하고 죽을 거래.”
“대체 그게 무슨…….”
“아프다고, 시한부라고…….”
충격적인 말에 프레져를 붙잡던 손이 떨어졌다.
막아 세우는 것이 더 이상 없건만 프레져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저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바닥에 무릎을 꿇을 뿐이었다. 깊게 찢어진 손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
“피가, 피가…….”
프레져는 제 피가 떨어진 흙바닥을 손으로 비볐다. 아무리 흙을 헤집어도 붉은 핏자국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선명해져 갔다.
“안 되는데, 죽으면 안 되는데…….”
프레져는 또다시 환영을 봤다.
새파래진 얼굴을 한 채 누워 있는 캐롤라인, 차가운 몸, 그녀를 적시는 붉은 피…….
‘결국엔 네가 다 망쳤구나.’
순간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청에 맞설 힘도, 감히 도망칠 면목도 없어서 프레져는 피 묻은 손으로 제 귀를 틀어막았다.
* * *
병원 복도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캐롤라인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환자 두 명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페라 가수 제논의 취미가 미소년 수집이래.”
“헐, 진짜? 헌티드 백작 부인이 시한부라는 소문보다 충격적이네.”
리도맥 교수가 말해 준 덕에 캐롤라인은 조금 더 일찍 자신에 대한 소문을 접할 수 있었다.
한 가십지에는 자신이 죽을병에 걸렸으며 일 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실이 적혀 있었다.
신빙성 없는 소문을 싣기로 유명한 잡지라곤 했지만 제 정보가 새어 나갔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쁘면서도 초조했다.
‘만일 엄마나 애런이 알게 된다면…….’
그 촌구석까지 가십지가 돌 일은 없었다. 그러나 발 없는 말은 바람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퍼지기 마련이었다.
사실 가장 신경이 쓰이는 건 프레져 쪽이었다.
‘그 사람이 그런 허접한 가십지를 볼 일은 없겠지만, 수도에 사는 이상 알게 될지도 몰라.’
그렇다면 또 한 소리를 듣게 될 수도 있었다. 대체 처신을 어떻게 했길래 저딴 가십지에 헌티드의 이름이 오르냐며.
‘내 걱정이 먼저일까, 아님 화를 내는 게 먼저일까?’
만약의 상황을 상상하자 씁쓸한 웃음이 지어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제 신분을 알아챌 일은 당연히 없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기에 캐롤라인은 목도리를 동여매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빠르게 임상 실험실로 향했다. 내일은 클리브가 그레타로 떠나는 날로,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기 때문이었다.
캐롤라인은 어제 임상 실험실에서 있던 작은 송별회를 떠올렸다. 꺼이꺼이 울던 아이들을 자상하게 달래 주던 클리브를.
인수인계는 끝마친 지 오래였으나, 실험실 아이들이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떠나는 날이 다 되도록 병원을 나서지 못한 것이었다.
“참 다정하신 분이지.”
덕분에 보육원 준비도 순조롭게 되어 가고 제 이야기가 가십지에 나돌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어제는 아이들 때문에 정신없어 제대로 말하지 못했지만, 오늘은 꼭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겠다 생각하며 캐롤라인은 클리브의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