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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72)화 (72/156)

#72

연말은 나눔의 달이었다. 귀족들은 저들의 자비로움을 자랑하기 위해 크고 작은 자선 행사를 여느라 바빴다.

그건 기업과 자선 단체들도 마찬가지였다. 대외적으로 좋은 인상을 만들기엔 기부와 봉사만 한 것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글랜포드에서 가장 이미지 개선이 필요한 단체를 꼽으라면 단연 헌티드하우스라고 할 수 있었다. 프레져가 자선 행사에 참여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이었다.

“어찌 됐든 자선 행사도 먹고 마시는 자리가 아닙니까. 우리 쪽에서 행사를 열면 분명 안 좋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단원들의 고혈을 빨아먹은 사람이 자선 행사를 열다니!

이런 종류의 말이 나올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럴 바엔 차라리 남이 여는 행사에 참여하는 게 낫죠. 게다가 맹인들을 위한 자선 행사라니, 얼마나 보기 좋습니까.”

이번 자선 행사는 글랜포드 맹인 재단이 주최하는 행사로, 시각장애인에게 생활비 및 일자리를 만들어 준다는 목적으로 열린 것이었다.

이 행사는 프레져에게 여러모로 득이 되는 자리였다.

시력을 잃은 장모를 위해 맹인을 위한 자선 행사에 참여하는 사위라니. 참으로 감명 깊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연출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재단에 안경도 500개나 기부하기로 했고요. 금액이 상당할 테니 분명 기사로 보도될 겁니다. 게다가 바자회에 내놓을 물건들도 전부…….”

로겐은 자선 바자회에 내놓을 물건들을 확인하다 말고 혀를 내둘렀다.

큼지막한 핑크 진주가 달린 브로치부터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세공된 커프스단추까지.

눈이 아플 정도로 휘황찬란한 보석들은 모두 프레져의 물건이었다. 캐롤라인의 물건은 단 하나도 없음에도 그 양이 제법 많았다.

“세상에, 이 시계도 내놓으시게요? 이거 왕국에 딱 7개밖에 없는 건데…….”

“필요 없어.”

로겐이 호들갑을 떨며 말했으나 프레져는 심드렁하기만 했다.

저택에 차고 넘치는 보석들 따위 프레져에겐 의미 없는 것들이었다. 필요 없는 물건들을 바꿔 좋은 이미지를 살 수 있다면 그만큼 남는 장사도 없었다.

프레져는 무표정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봤다. 저 멀리 보이던 흰색 첨탑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기 보이는군요.”

로겐이 흰 첨탑을 가리키며 말했다. 행사가 열리는 장소는 저 첨탑이 있는 예배당인 모양이었다.

“대표님, 남들이 하는 이야기는 한 귀로 듣고 그냥 넘기십쇼. 다들 대표님 속을 뒤집으려고 하는 소리니까요.”

순회공연 이후 처음으로 참여하는 사교 행사였다. 다들 프레져가 얼마나 망가졌는지, 헌티드하우스가 얼마나 우스워졌는지를 확인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을 터였다.

프레져 헌티드가 어떤 위인인지 아는 사람들은 알아서 꼬리를 내리겠지만 간혹 분수를 모르고 설치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니.

“늘 그래 왔으니 걱정할 것 없다.”

“걱정을 안 하기엔…….”

요즘 대표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서요.

서늘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프레져에 로겐은 언제 말을 꺼냈냐는 듯 자연스럽게 입을 닫았다.

“벌써 다 왔네요.”

머지않아 마차가 멈춰 섰다.

프레져는 옷매무새를 다듬은 뒤 마차에서 내렸다.

예배당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 탓에 예배당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은 전부 걸어 들어오고 있는 프레져에게로 향했다.

연회색 코트에 검정색 가죽 장갑을 낀 프레져에게서는 군인 장교 같은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살이 빠진 탓에 얼굴 골격이 더 두드러진 탓도 있었다.

숨을 뱉을 때마다 나오는 희뿌연 입김이 신비로움을 더했다. 겨울이라 옷을 두껍게 입었음에도 그는 둔해 보이지 않았다. 고양잇과 맹수처럼 늘씬해 보일 뿐이었다.

그 남다른 아우라에 행사장은 일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헌티드 백작님.”

정적을 깬 건 맹인 재단의 이사장인 솔브 남작이었다.

“아닙니다. 좋은 자리에 초대해 주셨는데 당연히 와야지요.”

“하하, 영광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멈춰 있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것처럼 사람들은 그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은 프레져에게 고정된 채 떠날 줄을 몰랐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프레져의 이야기를 하느라 바빴다.

“뭔가 더 퇴폐적인 느낌이에요.”

젊은 영애 하나가 뺨을 붉히며 말했다.

“이따가 상황 봐서 말을 걸어 봐야겠어요.”

“어머, 영애. 헌티드 백작은 기혼자예요. 잊은 거 아니죠?”

“그거야 두고 볼 일이죠.”

당돌한 대답에 같은 무리의 여자들이 부채로 입을 가렸다. 그러나 이야기를 꺼낸 영애는 어깨를 으쓱인 채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다들 모르시나 본데요.”

평소였으면 감히 넘보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헌티드 백작의 위세가 예전과 같지 못한 것도 있지만, 며칠 전 가십지에서 봤던 이야기 때문도 있었다.

“헌티드 백작 부인이 죽을병에 걸렸대요.”

“네?”

놀란 여인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몇 달 전부터 몰래 치료를 받고 있었다나 봐요. 무슨 병인지 모르지만요.”

“영애는 평민들이나 보는 삼류 가십지를 믿는 건가요?”

“나름 신빙성이 있어 보이거든요.”

정확도가 떨어지는 가십지이긴 했으나 간혹 맞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그 가십이 사실이라면 백작가의 안주인 자리는 머지않아 비게 될 터였다.

“그렇다면 저에게도 승산이 있지 않겠어요?”

두어 명의 여인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무리를 빠져나갔다. 그러나 자리에 남아 눈을 빛내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헌티드 백작이 아내에게 무관심한 건 워낙 유명하잖아요. 아내가 죽으면 바로 재가를 할지도 몰라요.”

프레져를 바라보는 영애의 눈에 화르륵 불꽃이 튀었다. 이 가십을 알고 있는 이들 말고도 몇 명 더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백작.”

친왕파 귀족 중 하나인 콘월 후작이었다.

높은 이들의 비밀을 실은 삼류 가십지는 주로 하층민들이 보는 것이었으나 은밀히 이를 즐기는 귀족도 더러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콘월 후작이었다.

프레져는 인사를 하며 콘월 후작의 행색을 가볍게 훑어보았다. 환각제 중독에 빠졌다는 말이 사실인지 뒷짐 진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부인께서는 보이지 않는군요. 부부 동반으로 참석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요 며칠 날이 춥지 않았습니까. 감기에 걸려 오늘은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정말입니까?”

콘월 후작이 눈을 가늘게 뜬 채 프레져를 응시했다. 말의 진위 여부를 탐색하기 위함이었다.

“저번에도 감기라더니. 어째 헌티드 백작 부인께서는 잔병치레가 잦으신 모양입니다.”

“몸이 조금 약한 편이라 그럽니다.”

프레져는 욕지기가 치미는 것을 참으며 억지웃음을 만들어 냈다.

캐롤라인의 안부에 대해 이리 집요하게 물을 줄은 몰랐기에 더욱 짜증이 솟구쳤다.

“저런, 웨즐 대부인도 눈이 안 좋지 않습니까? 질병은 유전된다더니. 어미에 이어 딸까지 참 안타깝게 됐군요.”

“……그저 감기일 뿐입니다. 비약이 지나치시군요.”

이 정도가 프레져가 윗사람에게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였다. 부러 과장되게 말하는 후작에 프레져의 인내심은 점점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백작 부인은 감기를 몇 달째 앓고 그럽니까? 그렇다면 더욱 큰일일 텐데요.”

이젠 로겐까지 프레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로겐의 얼굴은 곧 터질 활화산 앞에 서 있는 사람처럼 초조해 보였다.

“백작, 이제 그만 솔직해지세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크게 웃던 후작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곤 기름이 번들번들한 얼굴을 프레져에게 들이밀었다.

“백작 부인이 죽을병에 걸렸다는 거, 내가 모를 줄 압니까?”

프레져의 얼굴에 간신히 걸려 있던 미소가 사라진 것은 그때부터였다.

“말이 지나칩니다, 후작.”

콘월 후작을 내려다보는 프레져의 얼굴엔 살기가 등등했다. 예의를 생략했다는 것은 그가 꽤 많이 화가 났다는 것을 알려 주는 증거였다.

“다른 건 다 넘어가 줄 수 있어도, 내 아내를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만은 봐주지 못합니다.”

“백작이 아내를 그토록 사랑하는 줄은 몰랐군요.”

“…….”

“연회 때마다 아내 말고 다른 사람과 있기에 나는 아내에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줄 알았잖습니까?”

머리를 가격하듯 내뱉어진 말에 프레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캐롤라인을 대하는 제 모습이 타인의 눈에 어떻게 비춰지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아내가 소외를 당해도 모른 척 가만히 있던 거겠지요.”

자신이 자리를 비운동안 캐롤라인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당연히 귀부인들과 친목을 쌓고 있겠거니 생각해왔다.

“나는 이참에 백작이 재가할 수 있도록 좋은 자리를 만들어 주려 했는데 말입니다.”

킬킬거리던 콘월 후작이 손을 뻗어 한 영애를 가리켰다. 조금 전, 프레져를 보며 얼굴을 붉혔던 영애였다.

“어차피 곧 안주인 자리가 빌 것 아닙니까?”

“…….”

“카반 영애가 백작에게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 왜, 언론은 카반 가문이 꽉 잡고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잘 구슬려 보면 어려움 없이 언론을 통제할-.”

쨍그랑!

콘월 후작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프레져가 떨어트린 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기 때문이었다.

프레져는 조각난 와인잔을 짓밟으며 후작에게 다가섰다. 할 수만 있다면 후작의 멱살을 잡아 깨진 유리 조각 위로 던져 버리고 싶었다.

‘못 할 것도 없지.’

콘월 후작은 약쟁이가 아니던가.

어차피 약에 취해 죽을 거라면 자신이 직접 죽여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 사회에 해가 되는 버러지만도 못한 것들은 죽여야 마땅했다. 당장 바닥의 유리 조각을 목에 갖다 대기만 해도…….

“대표님.”

로겐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프레져를 불렀다. 그러자 먹구름이 낀 듯 흐려져 있던 눈에 초점이 잡히기 시작했다. 잠시 놓았던 이성이 돌아오자 비로소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콘월 후작은 테이블에 몸을 반쯤 누운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고, 행사장 안의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인 채 프레져를 지켜보고 있었다.

손을 적시는 축축한 느낌에 프레져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손과 카펫에 붉은 와인이 피처럼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윽…….”

이에 프레져는 순간 어지럼증을 느꼈다. 끔찍한 장면을 본 것처럼 속이 메스꺼웠다.

프레져는 흐려지는 시야를 붙잡으려 어떻게든 눈에 힘을 주었다. 콘월 후작도 지지 않고 싶은 듯 턱을 치켜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프레져의 기세에 눌린 주변인들은 눈알만 대록대록 굴리며 서로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먼저 걸음을 옮긴 건 프레져였다. 프레져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저벅저벅 걸어 후작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어디서 들은 헛소린지 모르겠지만 후작, 그 입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소름 끼칠 정도로 낮은 목소리였다. 후작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음습하고 무거운 목소리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시꺼먼 독사가 온몸을 칭칭 감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는 약물로도 막아지지 않는 두려움이었다.

결국 후작은 주춤거리며 프레져에게서 물러났다.

“아, 아니면 아닌 거지. 무슨 성질을 이렇게……!”

“성질이라니요. 저는 실수로 잔을 깬 것뿐입니다만.”

프레져는 언제 정색을 했냐는 듯, 싱긋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러곤 손수건을 꺼내 흠뻑 젖은 손과 소매를 닦았다.

“저, 저!”

그 미소를 본 콘월 후작은 부아가 치밀었으나,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감히 프레져를 붙잡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뭐 하고 있나. 얼른 치우지 않고.”

먼발치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시종들이 프레져의 말에 허겁지겁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깨진 조각을 치우면서도 어떻게든 프레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프레져는 얼굴이 벌게진 콘월 후작을 뒤로한 채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소란이 한 차례 끝났음에도 사람들은 좀처럼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들은 프레져의 걸음을 따라 남은, 선혈처럼 붉은 와인 자국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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