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71)화 (71/156)

#71

퇴원한 캐롤라인은 클리브의 소개를 받아 나이젤 간호 대학의 학장, 다이앤 리도맥 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클리브가 미리 말을 전해 둔 덕에 리도맥 교수는 보육원의 운영 계획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내부 수리만 하면 되는 건물이라 내년 1월이면 공사가 끝날 거예요. 학생들이 일하게 될 의무실은 건물 1층 끝에 있고…….”

캐롤라인은 건물 설계도까지 펼쳐가며 보육원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학생들의 근로 시간과 업무, 이에 따른 보수 등을 적은 계약서도 함께였다.

“되도록이면 아이들을 좋아하는 학생으로 선별해 주셨으면 해요.”

캐롤라인이 배운 사업이라곤 부모님의 구둣방에서 보고 들은 것이 전부였다. 남편이 왕국의 제일가는 사업가라는 사실이 민망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프레져는 일과 관련된 자리에 캐롤라인을 부른 적 없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하는 비즈니스를 성공적으로 끝마치기 위해 캐롤라인은 많은 것들을 연습했다. 발음이 뭉개지지 않게 또박또박 말하는 법이라든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대처하는 방법이라든지…….

클리브는 상부상조라고 했지만, 캐롤라인은 자신이 신세를 지는 것이란 생각을 거둘 수 없었다.

도움을 요청하는 입장이라면 정중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기에 캐롤라인은 양치질을 하면서도 거울을 보며 표정을 다듬었다.

“생각보다 구체적인 계획이네요. 아주 마음에 들어요.”

노력이 빛을 발했는지 리도맥 교수는 매우 만족스럽게 말했다.

“취지도 좋고, 시설도 좋고. 무엇보다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기본적인 교육이 준비돼 있단 점이 좋네요. 자리를 잡으면 직원을 늘려서 더 많은 환아들을 받아도 좋을 것 같아요.”

“과찬이세요.”

난생처음 받아 보는 종류의 칭찬에 캐롤라인의 뺨이 발그레 물들었다. 클리브는 그런 캐롤라인을 힐끗 바라보다 자신을 주시하고 있던 리도맥 교수와 눈이 마주쳤다.

“흐음.”

클리브는 다급히 계약서 위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리도맥 교수는 흥미로운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보육원에서 일할 학생들은 내가 임의로 뽑도록 할게요. 내가 의료 봉사를 많이 다녀 보기도 했고, 사람 보는 눈도 꽤 있는 편이거든요.”

“네, 저도 제 안목보단 교수님의 판단을 믿어요.”

캐롤라인의 야무진 대답에 리도맥 교수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이야기를 마친 두 사람은 계약서 위에 서로의 서명을 마쳤다.

오른쪽엔 나이젤 간호 대학 학장의 서명이, 왼쪽엔…….

“이디나캐롤 보육원장, 캐롤라인 헌티드.”

어머니의 뜻에 자신의 노력이 합쳐진 이름, 그 값진 결과물을 마주한 캐롤라인이 볼이 방긋 솟아올랐다.

리도맥은 뭉게구름처럼 포근한 미소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흰 털이 달린 동물같이 보송보송한 얼굴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뭐라도 하나 더 쥐여 주고 싶은 충동을 들게 했다.

‘클리브가 데려온 아가씬데, 뭐 더 해 줄 것 없나.’

그러다 그녀는 캐롤라인이 교정 곳곳을 신기한 눈으로 두리번거리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여기까지 온 김에 학교를 구경하고 가는 건 어때요?”

“그래도 되나요?”

“그럼요, 딱히 재밌는 건 없지만요.”

좋은 제안이었는지 캐롤라인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바로 승낙할 것이라는 리도맥의 예상과는 달리 캐롤라인은 잠시 머뭇거렸다. 클리브의 귀한 시간을 뺏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됐기 때문이었다.

‘이미 신세를 너무 많이 졌는데.’

게다가 그는 그레타로 돌아갈 준비도 해야 하지 않나.

“전 좋아요.”

머뭇거리는 캐롤라인의 대답을 채 간 사람은 클리브였다.

“오랜만에 대학 시절 생각도 나고 재밌겠네요. 요즘 학생들은 어떻게 공부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그는 부러 경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 캐롤라인이 안 되려나요? 바쁘다면 어쩔 수 없고요.”

“그럴 리가요!”

혹 마음을 바꾸기라도 할까, 캐롤라인은 짐을 챙겨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이젤에서 가장 활기찬 곳을 소개해 주도록 하죠.”

리도맥 교수는 젊은 두 남녀를 향해 흐뭇하게 웃어 보인 뒤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 * *

캐롤라인은 복도에 서서 창 너머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강의실에 앉아 있는 수많은 학생들이 창문을 통해 보였다.

그들은 교수가 칠판에 적는 것들을 열심히 따라 적고 있었고, 몇몇 학생들은 종종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반짝거리는 눈에는 총기가 넘쳤다.

‘다들 정말 열심히 사는구나. 멋지다.’

캐롤라인이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리도맥 교수와 클리브는 먼발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해가 서쪽에서 뜨는 줄 알았다. 클리브 네가 여자를 다 데려오다니.”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리도맥은 클리브의 어깨를 팔꿈치로 지르며 웃었다. 그녀는 클리브의 아버지인 니콜라스 헤이오스의 대학 동기이자 오랜 친우로, 클리브의 성장 과정을 지켜본 어른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일에 미쳐 약혼도 마다했던 애가.”

제 아버지를 닮아 직업 정신이 투철했던 청년은 이 나이가 되도록 약혼자가 없었다.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을 뿐더러, 쉴 틈 없이 바쁜 남편을 좋아할 여자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리도맥은 그의 속내를 알고 있었다.

클리브는 의료 봉사를 하느라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고, 그 탓에 일 년 이상 그레타에 머문 적이 없었다.

일 년이라는 시간은 새로운 인연을 만들기에 모자람이 없는 시간이었으나, 하릴없는 기다림을 버티게 해 줄 만큼은 되지 못했다.

클리브는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는 말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이를 기약 없는 기다림 속에 방치하고 싶지 않아 했다.

샤를리즈는 그놈의 봉사를 그만 다니면 되지 않느냐 언성을 높였지만 클리브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에게 사랑보다 중요한 것은 더 많은 이들을 살리는 일이었기에.

의학은 약자를 위한 희생과 헌신을 통해 이뤄진다는, 마리아 병원의 창립자인 마리아 헤이오스의 신념을 그대로 물려받은 청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참에 잘해 보렴. 보기 좋으니까.”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세월 참 빠르구나. 과한 염분 섭취는 고혈압을 유발한다고 잔소리하던 꼬맹이가 그새 이렇게 커서는……. 3대7 가르마에 까만 뿔테 안경을 쓰고는 말이다.”

싱글벙글 웃고 있던 리도맥의 얼굴은 어느새 아련하게 바뀌어 있었다. 11살 무렵의 클리브를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교수님, 정말 그런 게 아니라…….”

클리브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고 캐롤라인이 있는 쪽을 응시했다. 다행히 캐롤라인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강의실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클리브는 잠시 말을 고르다 한숨을 쉬었다. 그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캐롤라인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입니다.”

그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았다. 리도맥의 만면에 잔뜩 피어 있던 미소 역시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정말이니?”

“네.”

“젊은 아가씨가 참… 안됐구나.”

캐롤라인을 응시하던 주름진 눈매가 축 늘어졌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자에게 마음을 품게 된 이도 가여웠지만, 무엇보다 가장 불쌍한 건 세상을 떠나게 될 사람이었다.

보육원에 대해 설명할 때 유독 빛났던 캐롤라인의 눈을 봤기에 더욱 안타깝기도 했다.

“그렇게 예쁘게 빛나는 눈은 오랜만이었는데 말이지.”

“…….”

“어디에 문제가 있다니?”

“……선천적으로 심장 기형을 타고났습니다. 판막이 제 기능을 못 하고 있어요.”

“그런데 아직까지 살아 있다고?”

리도맥은 말을 골라 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캐롤라인의 경우는 희귀했다.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사례가 없을 텐데.”

“기적이긴 하지만, 그래서 더 치료가 어렵죠. 교수님 말씀대로 선례가 없으니까요.”

잔인한 현실을 설명하는 클리브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치료 방법을 연구할 겁니다. 리거웰 박사님의 수술을 더 연구해 보면 새로운 치료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서 연구에 참여하기로 한 거구나. 헌티드 양을 위해.”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클리브가 슬쩍 시선을 피했으나 리도맥은 아니었다. 그녀는 안타까운 사랑에 빠진 남자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최선을 다해, 힘이 닿는 데까지 연구해 보렴. 그런 마음이 사람을 살리는 법이니까.”

“그래야죠.”

“죽지 않고 꼭 살아서, 좋은 인연으로 발전할 수 있으면 더욱 좋겠지.”

이번 농담은 분위기를 풀기 위해 한 것이었다. 그 목적을 알기에 클리브도 무어라 받아치는 대신 바람 빠진 웃음을 지었다.

“치료가 잘된다고 해도 교수님이 생각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캐롤라인은 기혼자거든요.”

“뭐, 기혼?”

생각지도 못한 말에 리도맥의 눈이 커다래졌다. 비단 그녀가 기혼여성이라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었다.

“잠깐만, 헌티드라고 했지?”

문득 오늘 아침에 우연히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헌티드, 캐롤라인 헌티드…….”

정확도가 3할에 불과한 삼류 가십지는 학생들 사이에서 초유의 관심사였다.

리도맥 교수는 그레타 사람인 관계로 글랜포드의 사정에 어두웠으나, 프레져 헌티드라는 인물이 얼마나 유명한지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학생들은 분명 헌티드 백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백작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클리브, 혹시 저 아가씨가… 헌티드 백작 부인이니?”

날카로운 질문에 클리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부정 대신 순순히 시인하는 것을 선택했다.

“비밀에 부치려고 노력 중이긴 한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

“교수님?”

리도맥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 들었던 이야기를 복기하느라 정신이 없는 탓이었다.

“교수님, 왜 그러십니까?”

한 번 더 재촉이 있고서야 리도맥은 뻣뻣하게 굳은 몸을 돌렸다. 그러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클리브.”

“네?”

“가십지에 헌티드 양, 아니, 헌티드 백작 부인에 대한 이야기가 돌고 있는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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