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70)화 (70/156)

#70

프레져가 악몽을 꾸고 환청을 듣는 날이 며칠째 반복되었다.

꼬박 이틀 밤을 지새운 그는 최악의 컨디션으로 오페라하우스에 향했다. 거목이라 불리는 손님들이 갑작스레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미리 언질을 주셨으면 더 좋은 차를 준비했을 텐데요.”

“괜찮습니다.”

나름 귀족가의 자제인 로겐도 눈앞의 사내들 앞에서는 진땀을 흘렸다. 자리에 앉은 두 명의 노신사는 헌티드하우스의 기둥이나 다름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헌티드하우스의 설립부터 함께해 극단에 막대한 지분을 가지고 있는 크렘 백작가의 가주와 유명 극작가인 프리시마 백작, 연륜과 권력을 가진 노인들은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엄청난 기백이 흘렀다.

“요즘 여러모로 말이 많더군요.”

로겐이 나간 뒤, 가장 먼저 입을 뗀 사람은 크렘 백작이였다.

“처음 순회공연을 기획했을 때 백작이 그랬었죠. 신분에 관계없이 많은 이들과 예술을 나누고 싶다고.”

크렘 백작은 높은 신분만큼이나 보수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프레져가 순회공연을 하겠다 선언했을 때 가장 크게 반대한 사람도 그였다.

“결국 백작의 말대로 됐군요. 젠트리는 물론, 거리의 부랑자들의 입에서까지 헌티드하우스의 이야기가 오르내리니 말입니다.”

크렘 백작은 헌티드하우스의 모든 시작에 제 가문이 있었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권위와 역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헌티드하우스의 명예를 곧 자신의 명예처럼 생각했다.

“애초에 귀족의 것을 젠트리와 나눈다는 것부터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프리시마 백작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는 헌티드하우스의 대표극 중 하나인 ‘남쪽의 연인들’을 쓴 유명 극작가이기도 했다.

“듣자 하니 내년 첫 공연으로 예정되어 있는 작품이 내 ‘남쪽의 연인들’이라지요?”

“그렇습니다.”

“이런 추문 속에서 내 작품을 선보이고 싶진 않군요.”

헌티드하우스는 ‘남쪽의 연인들’을 비롯한 프리시마 백작의 극본 세 개에 대한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다.

독점권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한 쪽 입장에서 불합리해 보일 수 있었으나, 그 실상은 아니었다.

헌티드하우스는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극단이었고, 극단이 독점권을 샀다는 것 자체가 작품성을 증명해 주는 지표가 돼 주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희소성을 가진 것에 열광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세상 오직 한 곳에서만 극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오페라 마니아들을 더욱 안달 나게 만들었다. 표값이 치솟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아무래도 독점 공연권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군요.”

오늘 프리시마 백작이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는 다름 아닌 독점권의 해지를 위함이었다.

“헌티드하우스와 독점 계약을 맺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으실 텐데요.”

자부심이 느껴지는 말이었으나 프리시마 백작은 코웃음을 쳤다.

“언제적 얘기를 하는 겁니까, 헌티드 백작.”

프레져의 자부심은 모두 과거의 영광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요즘 헌티드하우스에 대한 소문이 어떤지 모릅니까? 대중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고 다 끝난 줄 아나 본데, 당장 살롱에만 나가 보십시오. 불매 운동을 하자는 사람이 아직도 차고 넘칩니다!”

“겨우 소문에 불과합니다. 프리시마 백작께서는 근거 없는 이야기로 결정을 내리는 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나는 관객의 말을 따를 뿐입니다.”

사실 그가 계약 해지를 언급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예술계의 큰 손이라 불리는 투자자 하나가 헌티드하우스에서 손을 떼겠다는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었다.

그가 손잡은 새로운 투자처가 왕실과 관련이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이 어제였다. 헌티드하우스의 명예가 생각만큼 휘청이지 않으니 제럴드가 손을 쓴 것이었다.

확실하진 않으나 소수에게만 알려진 귀한 정보라는 말을 전해 들은 프리시마 백작은 이를 듣자마자 바로 헌티드하우스에 달려왔다.

프리시마 백작가는 왕실에 우호적인 가문이었고, 왕립 극단에 편입되기 위해선 위약금을 감수하더라도 헌티드하우스와의 계약을 끊는 것이 옳았다.

“나도 지금 당장 계약을 해지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이 계속 이어진다면… 아무래도 다시 논의를 해 봐야겠지요.”

그래도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기에 프리시마 백작은 여지를 두었다. 물론 이 뒤에 감춰진 일련의 상황을 프레져가 알 리 없었다.

그러나 프레져는 태어난 순간부터 헌티드하우스를 위해 살 것을 요구받았고, 다년간의 사업에서 기인한 예민한 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프리시마 백작에게 무언가 믿는 구석이 생겼다는 것을.

‘프리시마 백작도 왕립 극단과 손을 잡았나? 제럴드에게 전속 작가 자리라도 받기로 한 건가?’

합리적인 의심이 프레져의 속에 싹텄다.

“여태껏 많은 왕조가 몰락하고 새 나라가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몰락의 길을 걸었던 왕조는 모두 이전에 황금기를 누렸었지요.”

“헌티드하우스를 몰락 왕조 따위에 비교하시는 겁니까?”

“다를 게 있습니까?”

크렘 백작은 부러 냉정하게 말했다. 진정으로 극단을 아끼기에 프레져가 정신을 차렸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프레져의 의심은 극단을 진심으로 아끼는 크렘 백작에게도 튀었다.

“백작의 능력이 출중하다고 해서 우리가 무조건 받아들일 거란 오판은 마십시오. 내게 중요한 건 헌티드하우스 자체이지, 헌티드 가문이 아닙니다.”

크렘 백작의 진심 어린 충고는 프레져에겐 변절을 암시하는 것처럼 들렸다.

‘우린 서로의 편이 아니었던 거예요.’

순간 캐롤라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환청이었다. 신경 쇠약은 매번 이런 식으로 프레져를 좀먹었다.

업무에서 비롯한 피로와 캐롤라인에 대한 걱정, 계속되는 이명과 환청은 프레져가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 애초에 내 편은 하나도 없어.’

프레져는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떴다. 어느덧 프레져의 눈에 비친 크렘 백작은 배신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시야가 어지러웠다.

“앞으론 이사회의 말을 경청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이후로도 크렘 백작은 몇 마디를 더 했다. 프리시마 백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프레져는 두 사람의 말을 귀담아듣지 못했다. 시야가 어지러웠기 때문이었다.

앞에 있는 사람이 제대로 앉아 있는 것인지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온 세상이 일그러졌다.

“대표님, 괜찮으십니까?”

정신을 차렸을 때는 두 사람 모두 자리를 뜬 뒤였다.

“대체 무슨 소리를 들으셨길래…….”

걱정스레 중얼거리는 로겐을 보고 나서야 프레져는 제가 잠시 정신을 놨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휴식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프레져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창문을 열어 놔도 토기는 가시지 않았다.

슬슬 한계가 찾아올 즈음 마부가 도착을 알렸다. 프레져는 마차가 멈추자마자 허겁지겁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사용인들이 일렬로 서 인사했으나 이를 받아 줄 여유가 없었다.

“허억…….”

프레져는 캐롤라인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넓은 수도에서 프레져가 쉴 수 있는 곳은 이 작은 방이 유일했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원했던 캐롤라인의 향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주인의 부재가 길어진 탓이었다.

모든 것은 머무르지 않고 흘러갔다. 그것은 방 안에 갇혀 있던 공기도 마찬가지였다. 창문을 아무리 꽉 닫아도 틈이 존재하는 이상 공기는 바깥으로 새어 나가 버리기 마련이었다.

프레져에게서 나는 머스크 향이 침구에 겨우 남아 있던 잔향을 집어삼킨 지 오래였다.

결국 또 홀로 남은 것은 프레져였다.

“아니야.”

무엇이 아닌지도 몰랐다.

프레져는 의미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취객처럼 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이대로 주저앉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 그의 눈에 띈 것은 테라스 구석에 있는 안락의자였다. 보풀이 잔뜩 일어나 있어 프레져에게 고물 취급을 받았던 물건이었다.

캐롤라인의 흔적을 찾아 헤매던 프레져는 난생 처음으로 낡은 안락의자에 앉아 보았다.

의자에 밴 향기 같은 것은 없었다. 남아 있는 것이라곤 유독 팔걸이 쪽에 많이 올라온 보풀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 별것 아닌 흔적에 프레져는 진정이 되었다.

캐롤라인의 흔적이 이런 고물에라도 남아 있어서.

프레져는 손가락 끝에 닿는 거칠한 감촉을 느끼며 등받이 깊숙이 몸을 묻었다.

캐롤라인은 이 자리에 앉아 어떤 풍경을 보았을지 상상하자 거칠었던 호흡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심장 박동이 일정해졌을 무렵, 프레져는 감고 있던 눈을 느릿하게 떴다. 캐롤라인이 보았던 풍경은 어떤 것이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왜 의자를 이 방향으로 둔 거지?”

의자는 정원을 옆으로 두고 있는 탓에 정면에서는 본채 동관 건물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원엔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꽃이 있고 그 너머엔 넓은 숲이 있는데, 왜 이런 애매한 곳에 의자를 놔둔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는 아내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결국 프레져는 일을 하러 가기 위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새로운 풍경이 눈에 들어온 건 그때였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상체를 숙이자 비로소 캐롤라인이 보고 있던 것이 보였다.

“……나를 보고 있었구나.”

동관 창문 너머로 자신의 집무실이, 창문을 등지고 있는 제 자리가 보였다.

그녀의 자리에 앉아, 그녀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숙이니 그 사실이 보였다.

“보고 싶으면 찾아오면 될 것을.”

당신은 왜 이 먼발치에서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을까.

그러다 그는 문득 캐롤라인이 자신을 먼저 찾아온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도 자신이 눈을 돌리면 늘 시선이 닿는 곳에 있었다.

프레져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늘 제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는 것을.

무대 위의 배우를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관객처럼.

“나 때문이었나.”

생각해 보니 자신은 캐롤라인의 뒷모습도 본 적이 없었다.

늘 먼저 등을 돌리는 것은 자신이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깨닫자 피식, 마른 웃음이 나왔다.

캐롤라인이 제게 찾아오지 못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아서, 외로웠다던 그녀의 말이 이해가 돼서, 그리고 조금 쓸쓸해져서.

프레져는 주인 잃은 방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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