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캐롤라인과 클리브는 함께 연구실을 향해 걸었다. 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말도 흐르지 않았으나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클리브는 자책과 슬픔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캐롤라인은 테오에게 자신을 대입하는 끔찍한 상상을 멈출 수 있었다.
길을 절반쯤 걸어왔을 즈음, 색색의 종이가 달려 있는 커다란 전나무가 나왔다. 소아과 환자들의 소원을 걸어 놓은 소원 나무였다. 클리브는 그 나무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맨 아랫줄에서 두 번째 자리에 걸려 있는 게 테오의 소원입니다.”
캐롤라인은 클리브가 가리킨 쪽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노란색 종이에는 흰 털이 복슬복슬한 강아지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짧은 생을 모두 병원에서 보낸 아이는 글을 쓰고 읽을 줄 몰랐다.
“커다란 강아지랑 하루 종일 뛰어 놀고 싶다더군요. 원반도 던지고 놀면서요.”
“테오다운 꿈이네요.”
캐롤라인은 병원 복도를 우다다 달리다 어머니에게 혼이 나던 테오를 떠올렸다. 아버지의 손에 붙들린 채 허공에 팔다리를 휘저어 대던 것도.
“심장에 있는 불필요한 막만 제거하면 됐습니다.”
“…….”
“심장을 열고, 피가 돌 수 있게 길을 터 주기만 하면 됐습니다. 리거웰 박사가 성공했던 수술처럼요.”
하지만 상대는 원숭이가 아닌 인간이었다. 빠른 시간 내에 실수 없이 수술을 끝마칠 여건이 되지 않았다.
“그게 가능했다면 살았을 아이죠.”
“하지만 불가능했잖아요.”
“…….”
캐롤라인의 말에 클리브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선생님, 이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에요. 자책하지 마세요.”
무려 30년을 병원에서 일한 홉킨스 박사도 악몽을 꾸는 때가 종종 있다고 했다. 멀쩡히 살아 있던 환자가 싸늘하게 식어 가는 꿈을.
죽음 앞에서 초연한 척하기엔 클리브는 아직 너무도 젊고 미숙했다. 실험실 아이들을 조카처럼 돌봤던 탓도 컸다.
“소아과에 괜히 들어왔나 봐요.”
억눌린 목소리가 클리브의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아이들을 사랑해서 내린 선택이 스스로를 이리 힘들게 만들 줄은 몰랐다.
캐롤라인은 위로의 말을 건네는 대신 그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러곤 천천히 연구실이 있는 길목을 향해 나아갔다.
클리브는 캐롤라인을 따라 걷는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연구실까지 바래다준 캐롤라인이 자리를 뜬 후에야 얼굴을 들었다. 그러자 서류가 수북이 쌓여 있는 록하드의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록하드는 클리브의 설득에 이기지 못해 그레타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책상에 있는 서류는 전부 그들의 본 직장인 마리아 병원에 가져갈 것들이었다.
클리브는 책상에 대충 걸터앉은 채 보고서를 한 장 한 장 넘기기 시작했다.
병의 치료를 위해 동료 의사들과 연구했던 흔적이 종이 위에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판막의 교체가 필요한 경우 대체할 물질 필요. 인체에 무해한 금속이 존재하긴 하나, 인체에 삽입 후 봉합할 시 이물 반응을 일으키지 않을지는 미지수.」
거기엔 리거웰 박사의 수술법에 대한 고찰도 적혀 있었다. 캐롤라인처럼 심장 일부를 새로운 것으로 교체해야 하는 환자의 기준에서 수술법을 연구한 것이었다.
「…수술 시 혈액의 산소 공급 문제가 해결돼야 함. 이 문제가 해결된다면 기존의 선천성 심장병 환자들을 다수를 치료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됨.」
이는 캐롤라인 한 사람에게만 해당된 사항이 아니었다.
캐롤라인을 비롯해 더 많은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 제게 소중한 사람들을 살리고 다 나아가 모든 환자를 이롭게 할 방법.
그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서 그는 그레타로 돌아가야만 했다.
* * *
늦은 새벽, 잠들어 있던 프레져는 불현듯 눈을 떴다. 한밤중이라 그런지 사위가 어두웠다.
“……젠장.”
저택에 돌아온 이후부터는 늘 이랬다.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대부분이었고, 겨우 잠든다 해도 중간에 깨는 경우가 많았다. 잠에서 깼을 땐 온몸이 식은땀으로 범벅이었다.
대체 무슨 꿈을 꾼 건지는 프레져도 알지 못했다. 이루어 말할 수 없는 불쾌함에 발작하듯 눈을 떴을 때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댕-. 댕-.
그 이후엔 이렇게 건반이 눌리는 소리가 났다. 새벽에 피아노를 치는 사람은 없을 테니 전부 환청일 텐데.
댕-. 댕-.
프레져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귀를 틀어막았다. 간헐적으로 울리던 피아노 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고 있었다.
쾅!
순간 건반 여러 개가 동시에 눌리는 굉음이 들렸다.
프레져는 튕기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는 나이트가운을 걸칠 새도 없이 방을 뛰쳐나갔다. 실내화조차 신지 않은 채였다.
“허억, 헉.”
내쉬는 호흡이 거칠었다. 쉴 새 없이 달리던 그의 발이 멈춘 곳은 저택 1층 왼쪽 복도 끝이었다.
넓은 방 한 면이 전부 유리로 되어 있는 방 안엔 흔한 탁자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벽에 붙어 있던 벽난로 하나와 바닥에 깔린 러그가 가구의 전부였다.
“하…….”
프레져는 방이 빈 걸 확인하고 나서야 쓰러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얼굴을 팔에 묻은 채 호흡을 골랐다.
‘뭐 하고 있는 거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프레져는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피아노…….”
그저 고개를 들었을 뿐이었다.
텅 비어 있던 방 안엔 어느새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 한 대가 들어차 있었다.
긴 은발을 아무렇게나 풀어 헤친 여인은 의자 위에 앉아 미친 듯이 피아노를 두드리고 있었다.
보통의 속도로 시작된 연주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종국에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쉴 새 없이 휘몰아치던 음계는 여인이 피아노 위로 쓰러지며 끝이 났다.
쿠궁-.
여인의 이마가 건반에 눌리며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동시에 가느다란 팔과 머리카락이 아래로 추욱 늘어졌다.
페달을 밟고 있던 발이 붕 뜨는 걸 보고서야 프레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뭐 하고 있는 거냐 물었다.’
천둥 같은 목소리는 그 무렵 다시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번뜩이는 시퍼런 눈이 보였다.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는 프레져와 닮은 짙푸른 빛이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엔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결국 네가 다 망쳤구나.’
쓰아아,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프레져는 정신을 차렸다. 섬뜩한 기세를 뿜던 인영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아니야.”
프레져는 떨리는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희게 질린 얼굴은 새벽달보다도 창백했다.
“아무것도 망치지 않았어.”
한마디 말을 중얼거린 프레져는 허겁지겁 본채를 뛰쳐나가 별채로 향했다. 그러곤 복도 끝에 위치한 문을 잡아 뜯듯 열었다.
“하아…….”
피아노는 거기에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그 자리에 그대로.
눈앞의 물건이 실재한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 프레져는 피아노 앞 의자에 앉았다. 제가 본 게 모두 헛것이라는 것을 증명 받아야만 했다.
그는 손을 더듬거리며 피아노의 몸체를 훑었다. 서늘하고 딱딱한 촉감, 손끝에 닿는 건조한 먼지… 모두 환영이 아닌 실제의 것이었다.
프레져는 무거운 숨을 내뱉으며 피아노 덮개 위로 몸을 쓰러뜨렸다.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까닭이었다.
덮개 위에 엎드린 채 고개를 모로 뉘이자 탁상 위에 올려진 작은 화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꽃 한 송이 하나 꽂혀 있지 않은 빈 화병은 달빛을 받아 환히 빛나고 있었다.
프레져는 그제야 의자에 새겨진 윤곽이 어머니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당신이 왔다 갔구나.”
지난 2년 동안 이곳이 끔찍하지 않던 이유는 당신이 있어서였어.
프레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가만히 눈을 감았다. 겨울의 깊고도 긴 밤이 프레져의 등 위로 내려앉았다.
* * *
“너 그거 들었어?”
하녀 하나가 부지런히 액자를 닦으며 입을 열었다. 그 옆의 다른 하녀는 사다리에 오른 채 거대한 액자 틀을 닦고 있었다.
“뭐? 아, 백작님이 별채에서 주무시고 계셨다는 거?”
“너무 소름 끼치지 않니?”
이야기를 꺼낸 하녀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아침에 발견한 헌티드 백작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프레져의 부재를 처음 알아챈 사람은 아침 일찍 가주를 깨우러 갔던 에드먼드였다.
침실, 집무실, 다이닝 룸, 하다못해 오페라하우스에까지 연락을 했지만 프레져는 그 어떤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때아닌 숨바꼭질이 벌어진 건 이 때문이었다. 프레져는 저택을 뒤지던 사용인들에 의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멀쩡히 방에서 자던 사람이 왜 갑자기 별채에서 발견돼? 심지어 원래 별채 근처에는 가지도 않으셨잖아.”
“그러니까. 나는 피아노에 엎드려서 주무시고 계셨다는 게 제일 충격이다.”
프레져는 실내화조차 신지 않은 잠옷 차림이었다. 잠에서 깬 그는 본인이 이곳에 있는 이유조차 알지 못하는 듯했다.
“몽유병 아니야? 아님 귀신이라도 들린 건가?”
“그거 가능성 있다. 그 피아노가 예사 물건이니?”
별채에 보관 중이던 피아노는 원래 레이벨라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피아노 위에서 숨을 거뒀다는 이야기는 백작저에서 오래 일한 사용인들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데클렌이 내다 버리려 했던 것을 프레져가 설득해 별채에 두게 된 것이었다.
“마님께서도 편찮으시다 하고, 백작님은 귀신이라도 들린 사람처럼 구시고, 극단은 구설수에…. 망조가 보인다, 보여.”
“너는 그런 말을 선대 가주들 초상화 앞에서 하니? 간도 크다.”
액자 닦는 일을 마친 하녀들은 걸레를 담근 양동이를 들고 화랑을 빠져나갔다.
먼지가 모두 닦여 반들반들해진 액자 안에는 프레져처럼 짙푸른 눈에 검은 머리를 가진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초상화 아래는 순금으로 만들어진 근사한 명패가 걸려 있었다.
「데클렌 드 로더 헌티드」
지난밤 프레져를 괴롭혔던 망령의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