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프레져가 수도로 돌아오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저택과 오페라하우스에 전화기를 들이는 일이었다. 쓸데없이 단단하고 느려 터진 고철 덩어리가 제법 유용하다는 사실을 이젠 인정해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고철의 가장 큰 장점은 빌에게서 노르티움의 소식을 바로 전달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별다른 연락은 없었지만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이로써 수도에 단 10대뿐이던 전화기는 프레져 헌티드라는 거물의 등장으로 인해 12대로 늘어나게 되었다.
“오늘 헌티드하우스의 이름으로 고아원 열 곳에 기부금을 전달했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 기사로 확인할 수 있으실 겁니다.”
“소송은?”
“로잘린 행스와 하이든 밀러 건은 마쳤습니다만, 신문사를 상대로 건 소송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회사를 상대로 건 소송인 만큼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습니다.”
“느려. 더 빨리 처리되게끔 해.”
프레져는 무심하게 대답하며 서류 위에 도장을 찍었다.
에폭시 사와 은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았던 밀고자들을 해고한다는 내용의 서류였다. 프레져의 끝없는 압박과 감시 끝에 찾아낸 결과였다.
프레져는 낮이건 밤이건 가릴 것 없이 일했고 직원들에게도 가혹한 수준의 업무량이 주어졌다. 극단의 이미지를 복구하기 위해선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안젤라는 다가올 겨울을 맞이해 봉사 활동을 시작했다. 두 얼굴의 가수라는 오명을 벗기 위한 발악이었다.
“안젤라 감시 잘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뒤로는 제럴드와 연락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그 어떤 노력도 프레져에겐 진정성 있게 다가오지 못했다.
단원들의 변절과 캐롤라인의 도망을 겪은 프레져에게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불신의 씨앗으로 보일 뿐이었다.
“왕립 극단은 어떻게 되고 있지?”
“이틀 전 2왕자께서 휴링턴 예술학교에 방문하셨다 합니다. 현재 알아낸 정보는 이것 하나뿐입니다.”
“휴링턴?”
프레져가 쥐고 있던 펜을 놓은 채 되물었다.
휴링턴 예술학교는 글랜포드 최고의 예술학교였다. 그중에서도 성악과와 무용과의 명성이 대단했다.
왕국 역사상 최고의 가수라는 극찬을 받는 안젤라 골드 역시 이곳의 성악과 출신이었으니.
“네, 음악과 학생들의 수업을 지켜보셨다 합니다. 이후에는 교수들과 대화를 나누다 떠나셨고요.”
“하필 음악과라.”
헌티드 가문은 휴링턴 예술학교 음악과에 매년 거액의 장학금을 기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은 헌티드하우스의 단원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속이 대충 보이는군.”
감히 제가 쌓은 탑에 발을 올리려 하다니. 참으로 추잡하고 얄팍한 수작이 아닐 수 없었다.
프레져는 책상 한 켠에 세워져 있는 달력을 응시했다.
곧 있으면 연말을 맞이해 궁정 음악회가 열릴 것이었다. 늘 그렇듯 이 음악회의 준비는 헌티드 가문의 주인이 맡게 될 테고.
“본인한테 직접 물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프레져가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 중얼거렸다. 저 웃음의 의미를 아는 휴고는 남몰래 마른침을 삼켰다.
“보고 끝났으면 나가 봐.”
“…알겠습니다.”
휴고가 나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문이 열렸다. 뒤이어 들어온 사람은 에드먼드였다.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능력껏 처리하기 곤란한 일이라…….”
프레져는 무어라 대꾸하는 대신 손을 내밀었다. 군말 말고 용건이나 내놓으라는 뜻이었다.
에드먼드는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조심하며 명단 하나를 건넸다.
“마님 앞으로 잡혀 있는 교육입니다. 원래는 다음 주부터 시작될 예정이었습니다만…….”
프레져는 저택의 그 누구에게도 캐롤라인의 부재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간 크게 먼저 물어보는 이도 없었다. 가주의 기분이 그 어느 때보다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안주인만 기다리며 손을 놓고 있는 사용인들을 위해 에드먼드가 총대를 멘 것이었다.
“말씀해 주시면 일정을 수정하겠습니다.”
프레져는 에드먼드가 건넨 명단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어떤 요일에 무슨 수업이 몇 시간씩 있는지 상세히 적혀 있었고, 맨 오른쪽에는 교육을 담당하는 가정 교사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명단은 슬쩍 보아도 제법 길었다. 부족한 점을 발견할 때마다 하나둘씩 붙이기 시작한 가정 교사의 수는 어느덧 열 명을 넘어가고 있었다. 분야도 제각각이었다.
“캐롤라인이 아직도 사교댄스를 못 추나?”
프레져가 미간을 좁힌 채 물었다. 춤추는 자세가 뻣뻣하길래 시작한 교육이었다. 연회에서 추는 사교댄스는 귀족의 필수 덕목이기에 교육이 불가피했다.
“담당 교사의 말에 의하면 왈츠와 폭스트롯은 곧잘 추신다고 합니다.”
“……그렇군.”
학습 현장을 본 적이 없으니 진척도를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그가 해 준 것이라곤 그녀가 완벽함을 학습할 수 있도록 사람을 갖다 붙이는 것뿐이었다.
“배우는 게 꽤 많네.”
그렇게 시작된 것들이 지금에 이르러 종이 한 장을 가득 채울 정도가 되었다.
프레져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캐롤라인이 왕국의 역사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은 어떤 곡인지… 알고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전부 무기한 연기해.”
“알겠습니다.”
“춤과 승마는 명단에서 빼도록. 캐롤은 몸이 좋지 않으니까.”
“……네?”
프레져의 말에 주름진 노인의 눈꺼풀이 크게 들썩거렸다.
“호, 혹시 마님께서 편찮으신 겁니까?”
“반응을 보니 자네도 몰랐나 보군.”
프레져가 픽 웃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손바닥에 의해 한꺼풀 벗겨진 얼굴은 이전보다 좀 더 선명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애초에 이 저택에 알고 있는 사람이 있긴 할까.”
처음엔 사용인들을 쥐 잡듯 잡을 생각이었다. 어떻게 된 게 안주인의 몸조차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냐며 벌을 내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에겐 면목이랄 것이 없었다.
남편인 자신도 몰랐다. 작정하고 숨긴 일을 한낱 사용인들이 어떻게 알아차린단 말인가. 심지어 캐롤라인의 어머니인 이디나 웨즐도 모르는 눈치였다.
“대체 어디가 편찮으시기에… 그것보다 빨리 모셔 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에드먼드가 답지 않게 부산을 떨었다. 보기 드문 충신인 그는 주인 내외의 건강에 몹시 민감하게 반응했다.
“일단은 켄달 선생님께 말을 전해 놓겠습니다. 그 전에 침구와 실내복을 먼저 바꾸는 게…….”
프레져는 횡설수설 말하는 에드먼드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형체를 알 수 없었던 감정은 에드먼드의 반응을 보고 나서야 확실히 윤곽을 드러냈다.
이 너절한 감정의 정체는 안도감이었다.
그는 자신이 캐롤라인에 대해 이만큼이나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내의 이면을 발견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자신보다 캐롤라인을 잘 알고 있을까 봐, 캐롤라인이 속인 사람은 오로지 자기 하나뿐일까 봐 두려웠다.
그러나,
‘아무도 모른다.’
그걸 알아차리자 비로소 안도가 되었다.
나만 몰랐던 게 아니라, 당신이 나만 쏙 빼놓은 게 아니라.
그래도 당신의 병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이 저택에서 나뿐이라.
참으로 졸렬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 프레져를 안도하게 만들었다.
“……알려져서 좋을 것 없으니 소란 피우지 마라. 믿을 수 있는 이들만 시켜 조용히 준비해.”
“네, 네.”
“돌아오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테니 그때까지 완벽하게 준비하고.”
“알겠습니다.”
정작 캐롤라인이 어디가 아픈지는 듣지도 못한 채 에드먼드는 허둥지둥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프레져는 테이블 위에 놓인 크리스털 화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며칠 전 갖다 버린 물건과 똑같은 것이었다.
“죽은 꽃도 버리고 화병도 새걸로 사 왔으니까.”
새것처럼 깨끗한 보금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
* * *
캐롤라인의 퇴원이 얼마 남지 않은 날이었다. 초겨울치곤 날이 무척 좋았으나 임상 실험실의 분위기는 더없이 어둡기만 했다. 갑작스레 병이 악화된 아이 하나가 어제 세상을 떴기 때문이었다.
병원에서 숨을 거둔지라 소식은 빠르게 전해졌다. 임상 실험을 시작하고 처음 겪는 죽음에 실험실의 모든 이들이 쉬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오늘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이만 돌아가서 쉬도록 해요.”
치료의 끝을 알리는 클리브의 얼굴은 초췌했다. 그는 아이의 마지막 순간을 눈앞에서 지켜본 사람이기도 했다.
클리브에게 죽음은 익숙한 것이었으나 어린아이들의 죽음은 겪을 때마다 적응이 되지 않았다. 특히 정을 많이 준 아이라 그런지 더욱 힘들었다.
“선생님, 있잖아요.”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리던 모아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항상 명랑했던 아이는 침울한 분위기에 답지 않게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테오는 이제 안 오는 거예요?”
“…….”
천진한 질문은 오히려 어른들의 눈물을 부추겼다. 때로는 의도치 않은 순수함이 더욱 슬프게 느껴지는 법이었다.
“영영 안 온대요?”
“……응. 너무 먼 곳으로 가서 이젠 못 올 거 같대.”
클리브가 힘겹게 대답했다.
“치, 우리 집에 놀러 오기로 했으면서…….”
모아가 제 가방을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아이의 가방엔 함께 나눠 먹기 위해 가져왔던 쿠키가 들어 있었다. 죽음이라는 개념은 다섯 살 아이가 이해하기엔 너무도 어려운 것이었다.
“미리 말해 주고 가지.”
“혼자서만 여행을 가다니. 치사해, 테오!”
“나도 여행 좋아하는데!”
모아의 질문을 시작으로 아이들이 입을 삐죽이기 시작했다.
테오가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난 것이라 알고 있는 아이들은 섭섭함을 숨기지 않았다.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의 아이들은 입을 꾹 다문 채 눈물만 글썽였다. 모두의 시선이 텅 비어 있는 테오의 자리에 향해 있었다.
캐롤라인을 비롯한 실험실 사람들은 테오의 장례식에 참여하지 못했다. 아픈 사람들에게 부정한 기운을 주기 싫다는 부모의 뜻이었다.
그들은 그저 기도로 아들의 마지막 길을 추모해 달라 말할 뿐이었다. 어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떠난 아이에게 애도를 표하는 것뿐이었다.
클리브는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후에도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선생님.”
캐롤라인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클리브에게 다가섰다. 함부로 위로하는 것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매우 힘들어 보였다.
“날이 추워요. 곧 난방이 꺼질테니까 연구실로 돌아가서 쉬세요.”
“그래야겠네요.”
클리브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캐롤라인은 팔에 걸쳐 놓았던 담요를 펴 클리브의 어깨에 덮었다.
그제야 클리브는 웃었다. 그래 봤자 사막의 모래처럼 버석한 미소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