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사이에 시간이 뜨는데?”
캐롤라인 헌티드가 노르티움 병원에 다니기 시작한 게 올해 여름. 그리고 프레져가 노르티움으로 향한 게 가을. 초진 기록과 프레져의 노르티움행에 약 2개월 정도의 공백이 존재했다.
“프레져 헌티드가 이전에 노르티움에 간 적 있나?”
“오페라 극장에 생긴 문제를 해결한다며 잠시 들른 적이 있습니다. 순회공연이 시작되기 직전인 것으로 압니다.”
“그럼 못해도 9월일 텐데.”
이전의 방문을 감안하더라도 캐롤라인의 초진 기록과는 날짜가 맞지 않았다.
“흠, 아내만 먼저 노르티움에 보냈나 보군.”
아내의 투병 사실을 숨기기 위해 그랬다 생각하면 이해가 갔다.
프레져 헌티드는 결점을 절대 드러내지 않는 사내이니까.
“기를 써서 숨기려고 했던 것 같은데. 미안하게 됐군.”
입 밖으로 나오는 말과는 달리, 제럴드의 입꼬리는 점점 올라갔다.
헌티드 백작이 아내에게 별다른 애정이 없는 것은 이미 유명했다. 하지만 아무도 이 사실을 특별히 여기지 않았다.
대부분의 귀족들이 그처럼 살아가기 때문이었다. 아내의 병쯤이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프레져 헌티드였다. 자존심이 왕에 견준다는 그 헌티드 백작.
“헌티드 백작이 홀아비가 된다니. 얼마나 우스운 일이야!”
가정사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만으로 그 고고한 자존심엔 흠집이 날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 사실을 꽁꽁 숨기려 했다. 그 행동 자체가 아내의 병환이 제 약점이라는 인정하는 꼴이었다.
왕국의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 약점을 들추면 어떻게 될까? 그는 제 약점을 감추기 위해 어디까지 내어줄까?
이를 빌미로 헌티드 백작과 거래를 할 수 있을 터였다. 극비로 부친 사안인 만큼 큰 이득을 얻어 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확실한 건 서열 정리를 제대로 할 수 있을 거란 점이었다. 헌티드 백작이 먼저 무릎을 꿇는다면 오만방자한 다른 귀족들도 알아서 머리를 조아릴 게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더없이 짜릿해졌다.
“그 하찮은 여자가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역시 작위를 주길 잘했다니까.
제럴드는 스스로를 칭찬하며 낄낄거렸다. 그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밀폐된 욕실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 * *
캐롤라인은 클리브의 연구실로 향하는 중이었다. 브리오의 말대로 클리브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연구실에 가까워지자 두 남자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닫혀 있어야 할 문이 조금 열려 있는 탓이었다.
“저 멀미 심한 거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못 갑니다.”
“부탁 좀 하자. 내가 네 일정까지 대신 소화할게.”
“아니, 가기 싫다니까요?”
말소리는 연구실에 가까워질수록 선명해졌다. 대화를 나누는 줄 알았는데 실랑이인 모양이었다.
캐롤라인은 들어갈까 말까 수십 번을 고민하다 마지못해 문을 두드렸다. 다 큰 어른들이 일터에서 싸우진 않겠지만, 만에 하나 다투는 거라면 중재할 필요가 있었다.
“선생님,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아, 캐롤라인.”
살짝 열린 문틈으로 빼꼼히 보이는 얼굴에 두 남자는 입씨름을 멈췄다. 록하드는 허공을 보며 딴청을 부리기도 했다. 이 상황을 들킨 것이 꽤나 머쓱한 모양이었다.
“제가 실례를 끼쳤을까요?”
“아닙니다. 캐롤라인이 온다고 해서 시간도 비워 놨는걸요.”
클리브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꺼냈다.
“그럼 저는 나가 보겠습니다. 두 분 편히 이야기 나누세요.”
록하드 역시 멋쩍게 웃으며 흰 가운을 몸에 걸쳤다.
“그리고 헤이오스 선생님.”
“그래.”
“어찌 됐든 저는 안 됩니다.”
“…….”
“다른 분 알아보세요. 물론 어렵겠지만요.”
록하드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쌩하니 연구실을 떠났다. 클리브의 한숨이 찻잔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캐롤라인은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날을 잘못 잡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시끄러웠죠? 미안해요.”
“아니에요. 제가 조금 일찍 찾아오긴 했잖아요.”
“물어볼 게 있다고 했죠? 캐롤라인이 먼저 나를 다 찾아오고. 대체 어떤 거예요?”
다행히 클리브가 먼저 본론을 꺼내 준 덕에 캐롤라인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아, 실은요…….”
그녀는 며칠 전부터 고르고 고른 말을 차분히 클리브 앞에 꺼내기 시작했다. 두근거리던 심장은 말을 이을수록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보육원에 대한 계획을 읊는 캐롤라인의 얼굴은 사뭇 진지했다.
“그런 계획이 있었군요.”
캐롤라인의 이야기를 들은 클리브는 팔짱을 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의과와 간호 대학의 학생들을 연계하면 될 것 같아요. 이 근처에 간호과가 있는 학교가 있으니까. 아이들에게 기본적인 교육을 하기에 모자람도 없고요.”
좋다, 싫다는 평도 없이 바로 해결책이 제시됐다. 주어진 문제에 가장 적합한 답을 찾아내는 건 클리브의 특기이자 취미였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우려의 말은 오히려 캐롤라인 쪽에서 나왔다. 클리브의 흔쾌한 협조에 놀란 것도 잠시, 너무 무리한 부탁을 한 건 아닌가 걱정이 됐기 때문이었다.
“그럼요. 마침 그쪽 간호과 교수님과 친분이 있어요. 취지가 좋은 일이니 부탁드리면 분명 협조해 주실 거예요.”
클리브는 그녀의 걱정이 기우라는 것을 알려 주듯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학생들도 실습이 필요해요. 의료 현장에 바로 투입되는 건 부담스러울 테니까.”
의학은 많은 학습량을 필요로 하는 분야였다. 그 탓에 의료진의 수는 늘 적었고, 학생들은 학교를 졸업함과 함께 바로 의료 현장에 투입됐다.
처음으로 환자를 맞닥뜨린 졸업생들은 실수를 하는 경우가 잦았다.
“병원만큼 일이 어렵지 않을 테니 학생들도 부담을 갖지 않는 선에서 예습할 수 있을 거예요. 특히 어린이들을 돌봐야 하는 소아과 학생들에게 굉장히 좋겠네요.”
“……하려고 나서는 사람이 있을까요?”
“엄청 많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봉급까지 넉넉히 챙겨 준다는데.
덧붙인 말을 듣고서야 캐롤라인은 미소를 지었다. 민폐가 아니라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클리브가 손가락으로 동전 모양을 만들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는 소리내어 웃기까지 했다.
“좋은 일이긴 하지만, 캐롤라인 무리하면 안 돼요. 본인이 환자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마세요.”
“그럼요. 어차피 제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가 전부인걸요.”
교육부터 경영까지 전부 그녀가 모르는 세계의 이야기였다. 초반만 에릭의 도움을 받아 운영하다 자신이 죽은 이후엔 마샤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프레져한테 잘 말하면 아직 처분하지 못한 부동산과 보석을 넘겨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 사람도 내가 많이 아프다는 걸 눈치챈 것 같으니까.’
그렇게 된다면 보육원 운영은 물론, 마샤와 스테파니, 에릭에게 더 많은 것을 남겨 줄 수 있겠지.
자신이 쓸 수 있는 건 돈이 전부라지만 그거라도 쓸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소중한 세 사람에게 남길 유산이 있고, 그중 일부를 아픈 아이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못내 뿌듯했다.
클리브는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웃는 캐롤라인을 의문스러운 얼굴로 쳐다보았다. 제가 가진 것을 모두 바쳐 큰일을 도모하는 그녀는 꼭…….
“……설마 죽을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죠?”
떠날 준비를 마친 망자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네?”
갑작스런 질문에 캐롤라인은 당황하고 말았다. 보육원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죽음에 대한 얘기라니.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꼭 자선사업가처럼 행동해요. 자신이 가진 걸 남은 이들과 세상을 위해 전부 두고 가려고 하죠.”
“…….”
“보육원을 세우는 데 한두 푼이 드는 것도 아니고. 가진 걸 다 써버린 다음엔 죽을 거예요?”
클리브의 물음에 캐롤라인의 입이 조가비처럼 다물렸다. 질문의 뜻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는 죽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있다면 최대한 오래 살아 보고 싶었다.
“……아무래도 정리가 필요한 것 같아서요.”
그러나 삶은 언제나 인간이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법이었다. 최선을 다해 저항해도 바꿀 수 없다면 받아들일 줄 알아야 했다.
“캐롤라인, 내가 말했잖아요. 우리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르티움에 모인 거라고.”
“저도 저를 포기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아무래도 그 방법을 찾는 데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요.”
캐롤라인은 몽상가가 아니었다. 그녀는 남은 생을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희망과 현실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는 건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캐롤라인.”
“그런데 선생님, 아까 보니 록하드 선생님과 다투시는 것 같던데, 무슨 이야길 하셨길래 그래요?”
캐롤라인은 분위기가 더 가라앉기 전에 말을 돌렸다. 애써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른 의사들은 모두 제게 현실을 보라 말하는데. 클리브만은 희망을 말해 줘서 고맙고, 아주 조금 미웠다.
“선생님이 제 고민을 해결해 주셨으니까 저도 선생님의 고민을 들어 드릴게요.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가슴 속에서 작게 움트는 희망은 늘 그녀를 서글프게 만들었다.
“……귀찮은 일을 떠맡기고 있었습니다.”
결국 클리브는 캐롤라인이 원하는 대로 이끌려 주었다. 감히 헤아릴 수도 없는 그녀의 마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연말 보고를 위해 그레타로 돌아가야 하는데, 저도 기차라면 지긋지긋하거든요.”
왜 하필 지금 당신을 만났을까.
클리브는 그 생각을 가슴 깊숙한 곳에 밀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그가 그레타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눈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