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
폭탄처럼 던져진 말에 임원들은 모두 경악에 휩싸였다. 헛숨을 들이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럼 하이든 밀러가 그리 간 큰 짓을 벌일 수 있던 것도 다…….”
이제야 이 일련의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에 제럴드가 프레져를 싫어하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프레져는 왕립 극단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다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임원들 중 제럴드의 권유를 받은 사람이 없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어쩌면 이들도 더 권위 있는 자리를 얻기 위해 자신을 배신할지도 몰랐다.
‘처음부터 눈 밖에 난 로잘린 행스 같은 이라면 경계하기 쉬울 텐데.’
하이든 밀러처럼 조용히 있다 배신하는 사람이 없을 거라곤 장담할 수 없었다.
‘휴고도 아직 왕립 극단에 대해 알아낸 게 없다고 하니.’
패가 확실해지기 전까진 침묵을 지킬 필요가 있었다.
프레져는 밀고자 색출과 이번 증명 서류로 인해 조금 회복된 극단의 이미지, 앞으로 어떻게 일을 처리해야 할지 이야기를 한 후 회의를 끝마쳤다.
확실하지 않은 정보를 혼자 지고 있으려니 머리가 아팠다.
그는 임원들을 모두 내보낸 후에야 저택으로 돌아갔다. 뒤늦은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였다.
* * *
가주의 귀환에 사용인들은 부산을 떨었다. 평소였다면 한마디 했을 프레져도 달리 입을 열지 않았다.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용인들에게 짐을 풀라고 명령한 뒤 제 침실 쪽으로 걸어가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
“집이… 원래 이렇게 차가웠나?”
겨울이 다 됐으니 온도가 낮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방문한 저택은 유독 냉하게 느껴졌다.
프레져는 계단을 오르는 대신 벽난로 앞으로 가 섰다. 늘 검은 그을음이 묻어 있던 벽난로는 무척이나 깨끗했다.
“백작님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벽난로를 전부 청소했습니다. 날이 추워지면 장작을 더 많이 지피게 될 테니 미리 청소해 놓는 게 좋을 것 같아…….”
하인 하나가 횡설수설 설명을 늘어놓았다. 백작이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왜, 여름 전에도 마님께서 종종 장작을 때지 않으셨습니까. 월동 준비 전에 그걸 전부 치우느라…….”
“캐롤라인이?”
처음 듣는 얘기였기에 프레져는 살짝 미간을 좁힌 채 물었다. 그 표정을 오해한 하인은 이젠 벌벌 떨기 시작했다.
“올해에는 유독 추위를 많이 타셔서……. 죄송합니다. 미리 치웠어야 했는데.”
프레져는 늘 저택을 따뜻하게 만들었던 사람이 캐롤라인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사라진 겨울의 저택은 몹시 썰렁하다는 것도.
“사과는 됐다. 하던 일 마저 해라.”
프레져는 침실로 향하려던 걸음을 옮겨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잡념을 없애는 덴 일이 제일이었다.
제대로 된 휴식은커녕, 며칠째 마차와 기차를 타고 움직인 탓에 프레져의 얼굴은 피곤해 보였다. 살이 빠져 날렵해진 턱선과 움푹 꺼진 눈두덩 때문에 평소보다 날이 서 보였다.
사용인들은 짐을 정리하는 내내 가주의 기분을 살피느라 바빴다. 겨우 숨을 돌린 건 프레져가 집무실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나서였다.
혹 한 소리 듣기라도 할까, 하녀들은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속닥거렸다.
“왜 혼자 오신 거지? 분명 마님이랑 같이 돌아오신다 하지 않았어?”
“내 말이. 마님 방 청소한다고 그 고생을 했는데.”
바닥에 광을 내는 일을 했던 하녀가 어깨를 통통 두드리며 투덜거렸다.
하녀장 조앤은 돌아올 안주인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며 저택이 마르고 닳도록 청소를 시켰다. 정작 캐롤라인은 그리 깐깐한 편이 아닌데도.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설렁설렁 닦을걸.”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진짜 이상하네.”
여름 휴가를 떠났다던 캐롤라인은 가을이 끝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껏 이렇다 할 편지 한 통도 없었다.
“그 소문이 정말 사실인가 봐.”
“그러게. 플라이크에 계신다는 분이 사실 노르티움에 계셨다며?”
“헉, 진짜?”
“몰랐어? 왜 가십지에 말이야…….”
캐롤라인이 백작저를 도망친 거라는 소문은 프레져가 홀로 귀환하며 그럴듯한 사실로 자리 잡았다.
집사장 에드먼드는 쑥덕거리는 사용인들을 노기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의 눈총을 받은 사용인들은 허겁지겁 자리에서 흩어졌다.
캐롤라인이 어째서 함께 오지 않은 건지는 에드먼드조차 알지 못했다.
남몰래 한숨을 쉬던 에드먼드는 망설임 끝에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긴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프레져를 위해 차 한 잔을 바치기 위해서였다.
“각하, 들어가겠습니다.”
에드먼드는 노크를 한 뒤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업무를 보고 있을 줄 알았던 프레져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에드먼드는 프레져의 시선을 좇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프레져의 시선 끝에는 썩어 문드러진 것도 모자라 누런 물까지 고여 있는 어떤 물체가 있었다.
에드먼드는 저 물체가 정체가 썩은 아네모네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사실상 저 꽃이 원래 아네모네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젠 그와 조앤뿐이었다.
“치우는 걸 원치 않으시는 것 같아 내버려 뒀습니다만.”
프레져의 눈빛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 에드먼드가 고개를 조아렸다. 그도 그럴 것이 화병 안엔 희고 까만 벌레까지 잔뜩 끼어 있었다.
“보기 흉하다면 지금이라도 치우겠습니다.”
에드먼드는 화병이 놓인 테이블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벌레가 끓어서 그런지 가까이 가자 악취가 느껴졌다. 투명한 뚜껑을 덮어 놨다고는 하나 냄새를 막긴 역부족인 모양이었다.
“에드먼드.”
허공을 가르는 낮은 목소리에 에드먼드의 손이 멈칫했다. 혹 저 꽃을, 꽃을 빙자한 쓰레기를 치우지 말라고 할까 염려가 됐기 때문이었다. 제 주인은 유독 이상한 곳에서 고집을 부리곤 했으니.
그러나 프레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의 우려와는 다른 것이었다.
“시든 꽃은…… 어떻게 하면 다시 살아나나.”
프레져는 화병 안 물에 설탕을 타던 캐롤라인을 떠올리며 물었다. 이렇게 하면 꽃이 오래 간다고 덧붙였던 것 같기도 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질문에 당황한 것도 잠시, 유능한 집사인 에드먼드는 의문을 금방 가라앉혔다. 그는 늘 그래 왔듯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살아 있는 꽃은 물과 햇빛만 있어도 잘 삽니다만, 병에 걸렸다면 약을 치는 것이 가장 좋겠지요. 하지만 이렇게 뿌리가 꺾인 꽃은…….”
에드먼드는 꽃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물체를 내려다보았다. 물때와 벌레가 잔뜩 낀 물 위에 녹조처럼 둥둥 떠 있는 아네모네를.
“방법이 없지요.”
대답을 들은 프레져의 손끝이 움찔거렸으나 에드먼드는 보지 못했다.
“꽃의 생명은 꺾인 순간 끝이 납니다. 뿌리가 있다면 어떻게든 다시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뿌리가 없다면 불가능하겠지요. 화병에 꽂힌 관상화들처럼 말입니다.”
“……그래도 오래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진 않나. 물에 설탕이나 식초를 타는 것처럼.”
“각하, 그건 버티는 방법일 뿐입니다.”
“…….”
“뿌리와 흙을 잃어버린 식물은 살지 못합니다. 그저 시들기 전까지 버티는 것이지요.”
꽃을 죽게 만드는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꽃의 아름다움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에드먼드는 문득 꽃이 가엾다는 생각을 했다. 그저 들판에 피어 있다면 살 수 있을 것을, 가까이서 보겠다는 욕심에 의해 꺾인다는 것이.
“요즘 젊은 영애들 사이에서는 꽃을 그대로 말리는 놀이가 유행이라고 합니다. 뿌리 없는 꽃을 가장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이지요.”
“……말라비틀어진 꽃이 뭐가 아름답다고.”
생기도 향기도 없이 바짝 마른 꽃은 만지는 순간 가루처럼 바스라질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각하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에드먼드는 프레져의 어깨 너머에 있는 너른 정원을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꽃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게 가장 아름다운 법이니까요.”
늦가을의 건조한 공기 속에서도 살아남은 꽃 몇 송이가 있었다. 이름 모를 풀꽃들은 바람에 휘청이면서도 슬며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프레져는 푸른 풀밭과 대비되는 시꺼먼 아네모네를 응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갖다 버려라.”
그러곤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서류를 꺼내 펼쳤다.
“저 화병도 같이.”
“알겠습니다.”
에드먼드가 반색하며 대답했다. 저 흉물을 드디어 치울 수 있다는 사실이 어지간히 반가운 모양이었다.
“그리고 화병은…… 똑같은 걸로 사서 두도록 해.”
투명한 크리스털 화병은 캐롤라인이 좋아하는 물건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벌레가 꼈던 걸 굳이 다시 쓸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같은 물건이라면 새것인 편이 더 좋을 테니까.
* * *
제럴드는 욕조에 반쯤 드러누운 채 보좌관이 갖다준 보고서를 읽는 중이었다.
하이든 밀러의 고백은 예상만큼이나 시시하기 짝이 없었다.
프레져는 단원들에게 강압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귀족’인 자신을 평민과 같은 취급 했다고 했다. 대체로 기존 폭로자들과 비슷한 내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프레져 헌티드가 관객들 앞에서 직접 머리를 숙인 게 화제가 되며 하이든 밀러의 폭로는 저 아래로 묻혀 버렸다.
제럴드에겐 지금 상황을 역전할 수 있는 한 방이 필요했다. 헌티드하우스의 관객들을 포함해, 단원들까지 프레져에게서 등 돌리게 할 확실한 한 방이.
그랬던 그가 캐롤라인의 병에 대해 알게 된 건 남부 공연이 끝난 지 사흘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 여자가 죽을병에 걸렸다고?”
보고서를 읽던 제럴드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보고서에는 일찍이 전해 들었던 것보다 더욱 상세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노르티움 병원의 이사장이 직접 제공한 의료 기록입니다. 정보에 거짓은 없습니다.”
보고서 하단엔 이 모든 기록이 사실임을 증명한다는 이사장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왕명은 아니었으나 왕족의 청을 거절할 수 있는 이는 몇 없었다. 적자를 밀어내고 권력을 얻고 있는 왕자의 부탁을 빙자한 명령이라면 더더욱.
노르티움 종합 병원의 이사장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캐롤라인 헌티드에 대한 서류를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
“허어.”
제럴드는 젖은 손을 대충 닦곤 페이지를 넘겼다. 병원 측의 정보에 의하면 헌티드 백작 부인은 앞으로 일 년밖에 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노르티움에 있던 거였어.”
프레져는 자기가 한 말은 무조건 지키는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이 장모가 아프다는 이유로 공표한 일정을 바꿀 리 없었다.
“처음부터 낌새를 눈치챘어야 하는데.”
제럴드는 어려운 의학 용어가 쓰여진 부분을 흐린 눈으로 넘겼다. 휘리릭 보고서를 넘기던 손은 병원 방문 일자가 기록된 페이지에서야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