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아아, 핑거톤! 나는 당신을 너무 사랑했어요.”
버터플라이가 자결하기 직전의 장면이었다. 그녀는 제 믿음을 배반한 핑거톤에 슬퍼하고 있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해도 나는 당신을 사랑했어요. 이건 저 태양에 걸고 맹세하는 진실이에요.”
슬픔으로 인해 눈시울이 붉어졌으나 버터플라이는 결코 눈물 흘리지 않는다.
“난 참 바보처럼 살았어요.”
그러면서도 핑거톤을 책망하지 않는다. 한탄하는 건 자신의 미련함뿐이다.
‘옛날 사람들은 참 어려워요. 대체 뭘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어. 나도 한 백 년 전에 태어났다면 작가의 의도를 알았을까요?’
나비 부인을 처음 본 캐롤라인의 감상평이었다.
‘버터플라이도 이해 안 가는데 핑거톤은 더 이해가 안 가요. 자기가 먼저 버려 놓고 왜 저리 슬피 운담? 보란 듯이 본국에서 아내까지 데리고 돌아와 놓고는.’
프레져는 혼자 재잘재잘 떠드는 캐롤라인을 보며 픽 웃었다. 사실 속으론 동감하고 있었다.
버터플라이와 핑거톤은 어째서 저리 쌍으로 멍청한 건지.
사랑에 미친 버터플라이도 제정신은 아니었지만 가장 머저리 같은 사람은 핑거톤이였다. 그가 한 일 중 가장 머저리 같은 짓을 꼽으라면 단연 재미 좀 보겠다며 이국의 여자와 결혼한 것이었다.
모름지기 결혼이라 함은 서로에게 힘이 되거나 이해관계가 맞는 가문과 해야 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핑거톤이 버터플라이를 진심으로 사랑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외국에 사생아까지 만들다니. 나중에 그게 어떻게 발목을 잡을 줄도 모르고. 태어나서부터 귄위와 명예를 배운 프레져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저는 죽음이 복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가장 불쌍한 건 결국 죽은 사람이잖아요.’
‘그럼 당신은 버터플라이가 왜 죽었다고 생각하는데?’
예로부터 여자의 한은 무섭다는 말이 있었다. 핑거톤을 괴롭게 하기 위해 죽음을 택한 게 아니라면 대체 무어란 말인가.
‘자유롭고 싶어서 그랬을 거라 생각해요. 버터플라이는 나비잖아요.’
그러니까 훨훨 날아가고 싶었을 거예요.
툴툴거리며 말하던 캐롤라인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프레져는 무심결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화려한 조명 아래 나비의 날개옷을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나는 나비가 되어 날아갈 거예요.”
애초에 나비는 날기 위해 태어난 존재였다. 거미줄에 걸려 날지 못하는 삶은 나비에겐 곧 죽음과도 같다.
“어느 것에도 매여 있지 않고, 나비처럼 자유롭게 날아서…….”
프레져는 단도를 들고 있는 버터플라이를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버려진 쪽은 버터플라이가 아니라 핑거톤이라는 것을.
* * *
“웬 나비가?”
캐롤라인은 창밖을 날아다니는 나비를 의아한 눈으로 응시했다. 추운 겨울은 나비가 살 수 있는 계절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건데…….”
흰 날개에 연갈색 무늬를 가진 나비는 여태껏 본 적 없는 종류였다. 겨울바람을 즐기며 팔랑팔랑 날아다니던 나비는 마침내 나무 뒤로 사라졌다. 캐롤라인은 나비를 쫓던 시선을 신문으로 옮겼다.
병실 밖을 돌아다니다 보면 어김없이 마주치게 되는 소식이 있었다.
바로 헌티드하우스 이야기다.
캐롤라인은 병원 곳곳에 비치되어 있는 일간지를 통해 프레져가 필사적으로 숨기려 했던 사실을 알게 됐다.
“급한 일이라는 게 이거였구나.”
프레져에게 닥친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알프레도가 왜 그 난리를 치면서 프레져를 재촉했는지 이해가 갈 정도로.
그러자 미련하게도 조금, 아주 조금 신경이 쓰였다.
“……짜증을 내는 게 아니었는데.”
그때 화만 덜 냈더라면 이렇게까지 거슬리진 않을 텐데.
이건 프레져에게 미안해서가 아니다. 순간적인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추한 모습을 보인, 자신에 대한 한탄일 뿐이다.
“아니야. 다 자업자득이지, 뭐.”
캐롤라인은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신문 마지막 장에는 공익을 위한 제보를 기다린다는 신문사의 홍보 문구가 적혀 있었다.
캐롤라인은 그 문구를 가느다란 눈으로 응시했다.
“폭로 내용이 전부 사실이라면 프레져는 상종도 못 할 천하의 나쁜 놈인 셈인데.”
하지만 제가 아는 프레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세상이 규정한 법과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은 헌티드 백작의 고고한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했다.
캐롤라인이 인정하는 건 그가 독선적이고 오만하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프레져는 그래도 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노예제가 폐지됐어도 신분제는 살아 있었고, 그는 신분과 재산 그 모든 것들의 최상위에 서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프레져는 헌티드하우스의 명예를 목숨처럼 중요히 여기지 않는가. 그것에 미쳐 아내를 외롭게 방치하기까지 했으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거기까지 생각한 캐롤라인은 손으로 제 이마를 찰싹 때렸다.
“그건 모르는 거지.”
캐롤라인은 프레져가 단원들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아내가 일터까지 찾아오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니 신문에 실린 폭로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내 편은 없었으니까.’
문득 프레져와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으나 캐롤라인은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은 업보다. 무조건적으로 그를 믿는 건 그만할 때가 되었다.
그때 펼친 신문 위로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브리오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왔구나.”
끄덕.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브리오에 캐롤라인은 신문을 접어 제자리에 꽂았다.
요즘 캐롤라인은 하루에 두 번씩 브리오와 산책을 했다. 오래 걸어도 숨이 차지 않을 만큼 건강이 회복됐기 때문이었다.
도통 밖에 나갈 생각을 않던 브리오가 자진해서 재활실을 드나드는 것을 보며 소아외과 의사들은 먼발치에서 감격의 눈물을 훔쳤다. 여러모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캐롤라인은 넓은 재활실을 걷다 브리오에게 넌지시 물었다.
“브리오는 학교 다녀 봤어?”
도리도리.
“가정 교사는? 집에서 배운 적은 있어?”
끄덕끄덕.
규정대로라면 15살인 브리오는 진작 기본 교육을 수료했어야 했다. 학교 대신 가정 교사를 붙인 건 아이가 학교에 갈 수 있을 만큼 건강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저번에 말했던 거 있잖아. 차근차근 준비해 가고 있어. 들어 볼래?”
끄덕.
캐롤라인은 입원해 있는 동안 보육원 설립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얻기 위해 브리오와 대화를 나눴다. 물론 캐롤라인의 일방적인 독백에 가까웠으나 의사소통에 문제는 없었다.
“로넘 4번가에 있는 건물들이 괜찮나 봐. 그쪽은 치안도 좋고 잔디밭도 넓어서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을 거야.”
머릿속에만 있던 생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뼈대를 갖춰 갔다. 그러나 하나의 기관을 만드는 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쉬운 일이 아닐 거라는 건 예상했다. 하지만 사업처럼 재산을 불릴 명목도, 자선 단체처럼 무턱대고 봉사할 것도 아니니 비교적 어렵지 않을 거다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캐롤라인은 몇 안 되는 측근 중 가장 고학력자인 에릭에게 조언을 얻은 끝에 겨우 계획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아이들을 돌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환아들을 위한 시설이니까 의무실을 꼭 구비해야겠지. 보육 교사들도 기본적인 의학 지식은 갖추고 있어야 할 테고.”
위가 안 좋은 아이에겐 어떤 간식을 먹여야 하는지, 심장이 안 좋은 아이에겐 어떤 운동을 시켜야 하는지.
몸이 안 좋은 아이들은 바깥에 나가지 못했고, 그 탓에 사회화가 덜 되어 있었다. 어떤 놀이를 통해 아이들을 세상에 적응하게 할 수 있을지 아는 이가 필요했다.
아이들을 돌볼 사람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간단한 교육 능력과 함께 의학 지식을 갖춘 이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건 돈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이 부분이 제일 문제야. 다방면으로 깊은 지식을 갖춘 사람은 드무니까.”
“선생님들께 여쭤봐요.”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던 브리오의 입이 처음으로 열렸다.
“클리브 선생님이라든지.”
“흠…….”
캐롤라인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홉킨스 박사는 잘 모르겠지만 클리브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일단 전공이 소아외과고, 외국인이란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글랜포드에 인맥이 넓었다.
‘그러고 보니 프레져와 아는 사이였지.’
캐롤라인은 새삼 클리브가 제 예상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매일같이 봐서 그런가, 오히려 친숙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그건 클리브가 따스한 마음씨를 가졌기 때문이겠지.
수많은 환자 중 한 명에 불과한 자신에게 그레타로 함께 가자는 제안을 할 정도로 그는 다정하고 상냥했다.
“네 말대로 해 봐야겠다. 고마워, 브리오.”
결정을 내린 캐롤라인은 브리오를 향해 싱긋 웃었다. 아이는 그런 캐롤라인을 시큰둥하게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 * *
남부 공연이 끝나자마자 프레져를 포함한 단원들은 수도로 돌아왔다.
원래대로라면 단원들에게 포상 휴가를 줘야 했지만 프레져는 그러지 않았다. 배신자를 솎아 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이 팔자 좋게 쉴 때가 아니란 걸 알기에 단원들도 불평을 하진 않았다.
프레져는 연락이 있기 전까지 각자 집에서 쉬라는 지시만을 내렸다. 그가 단원들을 위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도의였다.
물론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할 거라는 경고를 덧붙이긴 했지만.
프레져는 여독을 풀 새도 없이 바로 이사 회의를 열었다. 외부로 유출되어선 안 되는 극비 사항이었기에, 모인 인원은 극단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극소수뿐이었다.
“전체적인 감상평은 나쁘지 않지만 비평가들의 평론이 좋지 않더군요.”
안 좋은 평가는 대부분 알프레도의 선에서 걸러졌으나 이 분야에서 유명한 비평가의 평론만큼은 막지 못했다.
결국 헌티드하우스는 ‘예고하지 않은 변화는 관객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는 독설을 받고 말았다.
로겐은 임원들의 말을 들으며 뇌물이라도 건넸어야 하는 건가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프레져의 사과가 관중들에게 진정성 있게 다가왔다는 것이었다.
“대표님께서 직접 관객들 앞에 사과하는 게 이리 효과가 좋을 줄은 몰랐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헌티드 백작이었다. 귀족 중의 대귀족이 고개를 숙일 줄은 몰랐기에 관객들은 모두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술렁였던 것은 잠시였다.
프레져의 행동에 감동을 받은 귀족들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관용을 베풀었다. 자리에 있던 평민들 역시 귀족에게 정중한 사과를 받을 줄 몰랐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대표님.”
“극단의 대표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고 사과하는 일은 드물지 않습니까.”
프레져의 고고한 자존심을 아는 임원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사실 고생이라 할 것도 없었다. 덕분에 에폭시 사에서 발행한 기사가 묻혔으니 이 정도면 이득을 봤다고 할 수 있었다.
그건 프레져도 아는 사실이기에 그는 한쪽 손을 들어 올려 임원들을 조용히 시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직 상황이 해결된 게 아닙니다.”
“맞습니다. 지금까지의 거짓 폭로들이 전부 에폭시 사에서 나오지 않았습니까? 배후엔 누가 있는지 알아내는 게 중요합니다.”
모인 이들 중 가장 나이가 지긋한 램버스 남작이 턱수염을 만지며 말했다.
프레져는 에폭시 사의 신문을 신경질적으로 넘기다 입을 열었다.
“에폭시 사의 배후엔 2왕자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