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63)화 (63/156)

#63

“호외를 만들어 뿌리면 한 시간 안에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에폭시 사는 내일 조간신문을 통해 발표할 테니까요.”

“아직 극단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저희 쪽에서 먼저 언급하는 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아직 모르겠군요.”

그의 말에 반박한 사람은 휴고였다. 알프레도는 조심스레 입을 여는 휴고를 샐쭉한 눈으로 바라봤다.

“집단의 책임을 단원 한 명에게 지우려 한다, 이런 말이 나올 겁니다. 사람들 눈엔 헌티드하우스라는 거대한 권력이 약한 개인을 짓누르는 걸로 보일 테고요.”

대외적으로 단원들에 대한 프레져의 대우는 엉망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하이든 밀러의 도망은 ‘오죽 대우가 안 좋았으면 공연 당일 무용수가 도망을 가냐’는 말로 오르내릴 가능성이 컸다.

“선수를 치든 아니든, 헌티드하우스가 불리해지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럼, 이대로 손 놓고 있으라는 겁니까?”

“가장 피해가 적은 방법을 강구하자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방법이 대체 무어냐는 말입니다!”

알프레도가 휴고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로겐은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려 격양된 상황을 제지했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다시금 입을 연 사람은 프레져였다.

“휴고의 말대로다. 우리 입으로 퍼트리건, 에폭시 사를 통해 나오건, 우리에게 불리한 건 매한가지야.”

기대 이하의 무대에 관객들은 실망할 것이다. 게다가 이미 안 좋은 극단의 이미지마저 더욱 나빠지겠지.

연이은 악재에 프레져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가만히 있는 것보다야 뭐라도 하는 게 낫겠지.”

“그럼 역시 호외를-.”

“하지만 굳이 공연 전부터 초를 칠 필요는 없다.”

관객들에게 이를 미리 알려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무용수의 탈주를 알게 된 관객들은 어떻게든 부족한 점을 찾으려 눈에 불을 켜고 공연을 관람할 게 분명했다.

“우리 측 입장은 내일 아침 신문에 실릴 수 있게끔 준비해.”

썩 좋은 해결 방안은 아니었으나 당장 있을 마지막 공연을 추문 범벅으로 만들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진흙탕 논쟁이 될 거라면 순회공연이 모두 끝난 뒤, 에폭시 사와 동시에 기사를 터트리는 게 나았다.

그러면 대체된 독무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레 화제에서 제외될 것이었다. 독무가 어떻게 대체됐는지보다는 단원이 탈주했다는 사실이 더욱 자극적으로 다가올 테니까.

“우리가 낼 기사는 어쭙잖은 해명문이 아니다. 하이든 밀러의 잘못을 고발하는 것이니만큼 완강한 성격의 글이어야 해.”

“알겠습니다.”

자신을 보며 말하는 프레져에 알프레도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겐, 내가 말한 자료는 전부 준비됐나?”

“네. 수도로 돌아가면 바로 확인하실 수 있게끔 처리했습니다.”

프레져에겐 증거가 필요했다. 폭로 기사에 실린 내용은 모두 사실이 아니라는, 무엇보다 객관적이고 확실한 증거가.

그러기 위해선 그가 기부한 장학금이 어떻게 쓰였는지, 단원 채용 시험에 합격한 이들은 심사위원들에게 얼마의 점수를 받았는지, 단원들에게 얼마나 많은 급여와 복지를 줬는지에 대한 증빙 서류가 필요했다.

프레져는 이번 순회공연이 절대 강제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수도를 떠나기 전 단원들로부터 동의 서명까지 받아 둔 상태였다.

“불만이 있으면 나가면 된다고 했건만.”

물론 그 서명은 반강제적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고위 귀족인 것도 모자라 극단의 대표직을 맡은 사람이 내린 결정을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러나 이는 평생을 고귀하게만 자라 온 프레져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명하면, 아랫사람들은 따라야 했다.

하기 싫으면 나가라. 이게 프레져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였다. 직업이야 많으니 성에 차지 않는다면 다른 곳을 알아보면 될 테니까.

“발표 시기를 앞당겨야겠다. 내일 나오는 기사와 함께 발표할 수 있도록 해.”

“내일이라면 조간 신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시간이 촉박할 것 같은데요.”

“수도에 임원들이 남아 있지 않나. 정리해 둔 자료를 신문사에 전달하는 것쯤이야 쉽게 할 수 있겠지.”

“자택에 전화기가 있는 사람은… 로이드 자작뿐이니 그분께 전화해 말을 전하겠습니다.”

신호를 연결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요.

로겐은 그 말을 묵묵히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화를 쓰려면 호텔로 돌아가야 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프레져는 대답할 기운도 없어 대충 손을 휘적였다. 전화기 따위 느려 빠진 고철 덩어리라고 생각했는데, 조만간 헌티드하우스에도 하나 들여야겠다 생각하며.

“저, 대표님.”

막 문을 열려던 로겐이 문고리를 잡은 채 입을 열었다. 프레져를 포함한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로겐에게 향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기사가 아니라… 대표님께서 직접 나서시는 겁니다.”

“…….”

“아시죠?”

극단의 대표가 관객들 앞에 직접 고개를 숙이는 것. 작금의 상황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양해를 구하는 것.

그 공손한 대응만으로도 관객들은 화를 누그러뜨릴 터였다.

물론 프레져가 남에게 고개를 숙일 위인은 아니었지만.

“이제 진짜 가 보겠습니다.”

곧 문이 닫히고 로겐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알프레도 역시 신문사에 가겠다며 자리를 벗어났다.

잠시 고뇌하던 프레져는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후에 입을 열었다.

“일단 휴고, 너는 왕립 극단에 대해 알아봐라. 분명 제럴드 험프리와 연관이 있을 테니.”

“알겠습니다.”

“아직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니 말이 새어 나가지 않게 조심하고.”

헌티드하우스에서 이를 알고 있는 사람은 프레져와 안젤라, 로겐과 휴고가 유일했다. 제럴드가 몇 명의 사람들에게 이를 퍼트리고 다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그리고…….”

프레져는 피곤한 듯 연신 눈두덩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뜸을 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로겐의 말대로 해라.”

“……네?”

“커튼콜이 끝나면 내가 나서서 관객들에게 사과를 할 거다. 그러니 단상이라도 하나 마련해 둬.”

휴고는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연신 눈만 깜빡였다. 제가 들은 말이 진짜인지 가늠이 되지 않아서였다.

다른 이도 아닌 프레져 헌티드였다.

귀족 중의 귀족인 그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날이 오다니… 게다가 이번 공연엔 평민 관람객들도 다수 섞여 있지 않은가.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고 말고가 중요하겠나.”

프레져에게 가장 중요한 건 가문과 극단의 명예였다. 그는 무엇이 중요한지 판별하지 못할 정도로 아둔하지 않았다.

“그만큼 효과 좋은 방법은 없을 테니까.”

“……연출팀에 전해 두겠습니다.”

휴고는 짙은 그림자가 내려앉은 프레져의 얼굴을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걸음을 옮기려는 휴고를 멈춰 세운 건 낮게 가라앉다 못해 끝이 갈라진 목소리였다.

아직 지시할 게 남은 건가. 휴고는 의문을 품은 채 몸을 돌렸다.

“네, 말씀하십쇼.”

“…….”

정작 그를 불러 세운 프레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프레져는 뒤로 젖힌 얼굴 위에 손을 얹은 채 입을 열었다.

“노르티움에서는…… 별말 없나?”

이번에 입을 닫은 사람은 휴고였다. 휴고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어렸다. 캐롤라인이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을 뿐 달리 전할 말이 없기 때문이었다.

캐롤라인이 쾌차했다는 말은 어제 저녁에도 전한 것이었다.

“됐다, 나가 봐라.”

“죄송합니다.”

무엇이 미안한지도 모르겠는 사과를 남긴 채 휴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프레져는 손바닥으로 눈썹을 누르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노르티움엔 돌아가지 못하겠군.”

프레져의 혼잣말이 텅 빈 방 안을 울렸다. 꽃을 한 아름 안고 제게 오던 캐롤라인이 보고 싶었다.

* * *

이번 공연의 포토타임은 평소보다 특별했다. 평소처럼 안젤라만이 참여한 것이 아닌 대표를 포함한 감독들이 함께했기 때문이었다.

프레져가 안젤라와 함께 서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으나 감독들이 참여하는 경우는 전무했다.

오늘 극장 앞에 모인 이들은 평소의 배는 되어 보였다. 헌티드하우스에 쏟아지는 비난과 딱 비례하는 정도라면 이해가 쉬울까.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평소보다 경호를 강화하기까지 했다. 혹여 토마토와 계란이 얼굴로 날아오진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웃기는 촌극을 한다며 비난했지만 프레져로선 어쩔 수 없었다. 시각적인 자극은 그 어떤 것보다 효과가 뛰어나다는 사실에서 나온 일종의 전략이었다.

관심과 시선이 뒤섞인 속에서 공연은 시작되었다.

공연 직전에 일어난 변수에 긴장을 해서 그런지 신입 단원들이 종종 실수를 일으켰다.

관객들은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미한 실수였으나 예술 평론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눈치챌 만한 부분이었다. 무대 뒤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프레져는 이마를 짚었다.

하이든을 대신해 여자 무용수가 등장할 때는 극단의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관중들이 동요를 보이기 시작한 건 이 이후부터였다. 남자 무용수의 독무를 기대하고 온 이들이 이상함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있던 안무를 대체한 것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여자 무용수의 춤은 완벽했다.

게다가 관객의 대부분은 독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오페라에 조예가 깊은 이들도 ‘이번 공연에 독무가 있더라’ 정도만 알 뿐이지 어느 장면에서 독무가 등장하는지는 몰랐다.

문제는 헌티드하우스의 마니아층이 제법 두텁다는 것이었다.

명성 있는 극단답게 같은 공연을 몇 번씩 보는 마니아들이 존재했고, 이들은 이번 공연이 평소와 다르다는 점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공연 중이라 소란이 일지는 않았으나 객석을 주시하고 있는 프레져에겐 감지되는 동요였다.

“신문사에 입장문을 전달하고 왔습니다. 글랜포드 전역엔 어렵겠지만 적어도 남부 전체엔 퍼질 겁니다.”

작은 목소리로 말을 전하는 알프레도에 프레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공연 관람평은 대체로 안 좋을 거다. 알아서 잘 걸러라.”

“네.”

우여곡절을 겨우 넘긴 공연은 이제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프레져는 기둥에 등을 기댄 채 힘을 풀었다. 이번 투어의 마지막 공연이 끝났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풀렸다. 그러자 비로소 노랫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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