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60)화 (60/156)

#60

“흐앙, 선생님이 아파!”

“선생님, 피가 펑펑이야!”

종이 위에 떨어진 선혈을 본 아이들이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록하드는 황급히 클리브를 연구실로 이끌었다.

“대체 요즘 왜 그러시는 거예요? 꼭 정신이 어디에 팔린 사람처럼 구시네.”

록하드가 클리브의 손을 치료하며 툴툴거렸다.

“틈만 나면 멍을 때리시지 않나, 잘 보고 있던 신문을 갑자기 찢어 버리지 않나…….”

프레져의 인성에 대한 기사만 아니었다면 멀쩡한 신문을 구기는 짓 따위 하진 않았을 테다. 클리브는 그런 것까지 구태여 설명하지 않았다.

“이대로 있다간 애들 울리기만 하겠어요. 차라리 밖에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오세요.”

록하드는 그렇게 말하며 종이봉투 몇 개를 꺼냈다.

“이게 뭐야?”

“이번에 개발한 신약이요. 니콜라이 선생님께서 말씀 없으셨어요?”

“아.”

그러고 보니 편지에 그런 내용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록하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약을 분류했다. 그러곤 종이봉투 위에 환자들의 이름과 병실 호수를 썼다.

“입원 등의 이유로 이번 임상 실험에 참여하지 못한 환자들 몫이에요. 친절하게 병실 위치까지 적어 놨으니까 배달해 주고 오세요.”

“우리가 언제부터 배달을 했다고?”

“선생님을 위해 신설된 서비스입니다.”

록하드는 문을 열어 클리브의 등을 떠밀었다. 툴툴거리던 클리브는 종이봉투에 적힌 이름을 보곤 군말 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캐롤라인은 병실 안으로 들어선 사람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클리브가 품 안에 종이봉투를 가득 안은 채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약이 나와서요. 배달해 주려고 왔어요.”

클리브가 캐롤라인의 이름이 적힌 봉투를 흔들며 말했다.

“임상 실험 결과를 토대로 만든 거예요. 검증된 약이니 걱정하지 않고 먹어도 돼요. 물론 부작용이 아예 없진 않겠지만요.”

“와, 신기하네요.”

“뭐가요?”

“그냥… 제 참여가 새로운 약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됐다는 사실이요.”

캐롤라인이 볼을 긁으며 멋쩍게 말했다.

“도움이 아니에요. 이건 캐롤라인이 만든 거나 다름없죠.”

현대 의학은 임상학을 기반으로 발전했다. 이는 환자들이 없다면 발전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네요.”

뻣뻣했던 표정은 금세 부드럽게 풀렸다. 클리브는 배시시 웃는 캐롤라인을 멍하니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몸은 좀 어때요?”

“음, 보기 싫은 얼굴이 사라지니까 좀 괜찮아진 것 같기도 해요.”

캐롤라인의 입에서 나온 말치곤 제법 과격한 표현이었다. 이에 클리브는 프레져가 캐롤라인을 떠났다는 것을 알아챘다.

“캐롤라인을… 두고 갔어요?”

“네. 급한 일이 생겼대요.”

급한 일이라면 신문에서 연일 떠들고 있는 폭로 때문이겠지.

극단 이미지에 큰 타격이 생긴 일은 맞으나 그게 아픈 아내를 두고 떠날 이유가 되는지 클리브는 알 수 없었다.

“딱히 새삼스럽진 않아요. 자주 있었던 일이니까요.”

캐롤라인은 일부러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클리브의 눈엔 그녀가 아무렇지 않아 보이려 애쓰고 있는 게 보였다.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저 가녀린 환자는 지금까지 남편에게 의지해 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의지하지 않을 거다.

그렇다고 고향에 돌아가지도 않을 것 같았다. 아픈 어머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하니.

노르티움에 홀로 남겨진 캐롤라인이 어떻게 곪아 갈지 눈에 선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화가 치밀었다.

아내의 건강보단 일이 먼저인 남자, 아내의 몸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방치한 남자, 아내의 안부보단 이성 문제를 먼저 묻는 남자.

프레져는 이 모든 불행의 씨앗이나 다름없었다.

목구멍까지 뻗치는 열에 클리브는 조금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캐롤라인, 나랑 그레타로 갈래요?”

“네?”

캐롤라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레타는 갑자기 왜… 아니, 제가 선생님이랑 거길…….”

클리브는 곧장 후회했으나 이왕 입을 연 거 끝까지 말을 잇기로 했다.

“기사를 봐서 알겠지만, 많은 의사들이 심장 개복술의 심화 연구에 참여하기로 했어요.”

캐롤라인은 듣고 있다는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연구에 참여했으면 좋겠다는 권유를 받았고요.”

클리브는 잠시 호흡을 고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 연구하고 있어요. 기존 수술법의 여러 문제점들을 해결하면 사람의 몸에도 안전하게 쓸 수 있을 때가 올 거예요. 그러니까…….”

목소리는 점차 작아지고 말꼬리는 늘어졌다. 호기롭게 입을 열긴 했지만 말하면서도 확신이 없었다.

클리브는 다급히 다른 이유를 생각해냈다.

“그레타엔 노르티움보다 좋은 장비가 많잖아요. 치료의 질도 훨씬 높을 거라고 자부해요.”

“네.”

“어쩌면…….”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몰라요. 이 말만은 뱉을 수가 없어 클리브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가망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주제에 시한부 환자를 상대로 뭘 하고 있는 건지.

“선생님.”

캐롤라인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레타까지는 기차를 타고 가야 하죠?”

“네? 네. 마리아 병원까지는 여기서 일주일 정도 걸릴 거예요.”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라 클리브는 말을 더듬었다.

“그 길목엔 커다란 산맥이 있고요.”

“…….”

“산맥에 선로를 뚫어 두긴 했지만 길은 여전히 험하죠. 기차가 많이 흔들릴 거예요.”

저는 그걸 버틸 체력이 없어요.

그렇게 덧붙이는 캐롤라인에 클리브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쉽게 성공할 수술이 아니라는 거.”

개복, 혈액 및 산소공급, 변형, 교체, 봉합. 이외에도 수많은 단어들이 있었으나 캐롤라인은 전부 기억하지 못했다. 그만큼 많은 난제를 해결해야 할 수술이었다.

그래도 하나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성공한다 해도 제 몸이 그때까지 버텨 줄진… 잘 모르겠네요.”

“…미안합니다.”

그녀의 몸이 견디지 못할 거란 사실도, 그렇게 쉽게 성공할 실험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는데.

왜 그리 충동적으로 말이 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자괴감과 자책감이 동시에 들었다.

“그렇게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이렇게 마음 써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걸요.”

캐롤라인이 클리브의 팔을 조심스레 두드리며 말했다.

환자한테 두둔을 받고 있는 의사라니. 이 상황이 한심하고 우습기 짝이 없었다. 클리브는 속으로 조소를 삼켰다.

“저는 여기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어요.”

“할 수 있는 일이요?”

“동시에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고요.”

“어떤 일인지 물어봐도 돼요?”

“음, 비밀이긴 한데 특별히 선생님께만 말해 줄게요. 환아들을 위한 보육원을 세울 계획인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화가 흘러갔다.

그러나 클리브는 알고 있었다. 캐롤라인이 일부러 말을 돌려 준 것을.

클리브는 순순히 그 흐름에 편승했지만 속은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은 캐롤라인을 살릴 생각으로만 가득했다.

클리브는 이대로 제 환자를, 캐롤라인이라는 사람을 포기할 수 없었다.

* * *

림홀 오페라 극장 앞, 안젤라 골드는 제 얼굴이 그려진 입간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슥, 손가락을 문지르자 붉은 과즙이 닦여 나왔다. 관객들의 토마토 투척은 입간판에 그려진 안젤라의 얼굴도 피해 갈 수 없었다.

왼쪽 뺨과 턱 끝에 튄 것은 꽤 오래되어 굳은 모양인지 잘 닦이지도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을 꼽으라면 이 이상의 테러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로잘린 행스.’

이 사건의 주범을 떠올린 안젤라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제 뒷욕을 하고 다니는 건 눈치채고 있었는데, 릴리의 편을 들었다고 이렇게 얌체처럼 돌아설 줄이야.

사실 릴리의 편을 들었다 하기도 우스웠다. 로잘린은 관악기 소리가 이상하다는 터무니없는 트집을 잡았고 안젤라는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듣기엔 멀쩡한데 로잘린에게만 이상하게 들리는 거면 귀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요? 내 생각엔 공연이 아니라 병원에 먼저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그 말 하나 때문에 극단의 실세는 안젤라라는 소문이 퍼졌다. 물론 아주 틀린 말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맹세코 부당한 권력을 휘두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로잘린의 말만 믿고 안젤라에게 돌을 아니, 토마토를 던졌다. 물어뜯는 걸 좋아하는 이들에게 사건의 진위여부는 중요치 않았다.

‘행스 가문을 귀족 명부에서 제외시켜야 속이 시원할 것 같은데.’

잘못을 저질렀다면 응당 그에 맞는 벌을 받아야 했다.

‘이게 비단 로잘린만의 잘못이라 할 수 있나?’

따지고 보면 모든 원인은 프레져에게 있었다.

매사 무뚝뚝하고 가끔 독선적인 성격은 그닥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귀족 단원들을 제 아랫사람 취급했다는 것에 있었다.

게다가 유독 성격이 모난 로잘린을 단원들 앞에서 면박 주기까지 했다.

‘여기까진 그래도 괜찮았지.’

근데 순회공연이라는 일을 벌여 놓고 자신은 일정에서 쏙 빠졌다. 아직까지 프레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안젤라 님, 제럴드 왕자 전하께서 꽃을 보내셨습니다.”

시종이 전한 소식에 안젤라의 고운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또요?”

“네. 내일 있을 마지막 공연도 잘 끝마치길 바란다 전하셨습니다.”

안젤라는 뚱한 표정으로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평소와는 달리 이번엔 안에 작은 크기의 카드가 들어 있었다.

안젤라는 호텔에 들어가자마자 꽃을 던지듯 내려 두었다. 손에 달랑 들려 있는 건 제럴드가 보낸 카드뿐이었다.

“이번엔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보내셨을까.”

언짢은 목소리와 함께 종이 위에 쓰여진 수려한 필기체가 드러났다.

「신설될 왕립 극단에 안젤라 골드 양을 모시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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