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캐롤라인은 뒤늦게 제 손이 이불을 빠져나왔다는 것을 자각했다. 다시 감추기엔 이미 늦어 있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프레져의 손을 뿌리치는 것이 전부였다.
“당신 꼴을 봐. 이게 괜찮은 사람의 몰골인지.”
평소보다 격양된 프레져의 목소리는 꼭 명령을 내리는 사령관 같아서, 캐롤라인은 그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침대 우측, 벽면에 비친 거울을 향해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거울 속엔 병색이 완연한 얼굴의 여자가 힘없이 앉아 있었다.
푸석푸석한 머리, 푹 꺼진 눈두덩, 혈색 없는 피부와 잔뜩 갈라진 입술까지.
여전히 아름다운 프레져와 달리 자신은 한없이 초라하기만 해서 캐롤라인은 서글퍼졌다.
“내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꼭 당신 같은 몰골을 하고 있었어.”
“…….”
“얼마나 아파 보이는지 이제 좀 감이 와?”
캐롤라인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거울을 보지 않은 거였는데.
아랫입술을 깨무는 캐롤라인을 보며 프레져는 한숨을 쉬었다.
환자 앞에서 이게 뭐 하는 건지. 괜찮다며 기를 쓰는 캐롤라인에 저도 모르게 언성이 커져 버렸다.
프레져는 조금 진정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괜찮다고 하지 말고 치료 받아. 내가 불편해서 이러는 거라면…, 난 어차피 곧 떠날 테니까.”
떠난다는 말에 캐롤라인의 목이 프레져가 있는 쪽으로 뻣뻣하게 돌아갔다.
“사실… 급한 일이 생겨서 잠시 남부로 떠나게 됐어.”
그 움직임을 보며 프레져는 캐롤라인이 오래된 고철 기계 같다고 생각했다.
온 힘을 다해 움직여도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감출 수 없는,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기계.
“오늘은 그 이야기를 전하러 온 거야. 당신은 날 꼴도 보기 싫어했으니까. 당분간 내가 없는 편이 당신한텐 차라리 낫겠지.”
프레져는 무심코 앞머리를 쓸어 넘기려다가 멈칫했다. 중요한 외출을 위해 그는 포마드로 머리를 말끔히 넘긴 상태였다.
‘떠나기 위해서였구나.’
캐롤라인은 단정한 모습의 프레져를 보며 탄식했다. 오랜만에 앞머리를 넘겼다 했더니.
프레져는 집에서건 밖에서건 늘 멀끔한 차림을 고수했다. 씻고 잘 때를 제외하곤 모두 정장 차림이었기에 캐롤라인은 그가 오늘 일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예측할 수 없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올 거야. 그러니까 남은 이야긴 그때 하지. 사람을 시켜 몸에 좋은 음식들을 보낼 테니까…….”
말을 길게 하는 프레져는 보기 드물었다. 그러나 캐롤라인에겐 그의 입에서 나온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또 떠나는구나.’
내가 앓아누워도, 병실에서 옴짝달싹 못 해도 결국 이 사람은 떠나는구나.
‘믿음을 주겠다고 말한 게 직전이면서.’
그 사실이 못내 서글펐다.
물론 프레져는 자신이 시한부라는 사실을 모르겠지만. 당신과는 말도 섞고 싶지 않다며 소리를 지른 건 자신이지만. 그래도 서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는 불가항력이었다. 아무리 마음을 단단하게 여며도 틈새로 찬바람이 들어왔다. 한기에 가슴이 시렸다.
“생각해 보니 당신이 쓰러졌던 것도 나랑 말다툼을 하던 중이었군. 역시 내가 없어야 회복이 더 빠르겠어.”
정말 그럴까? 이젠 스스로도 제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이 남자를 대체 어떻게 해야 제 속이 편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그래도 안 돌아오진 않을 거야. 열흘 정도. 길어야 2주일 테고.”
그 썰렁한 저택에서 기다릴 땐 언제 돌아오겠다는 말 한 번 해 준 적 없더니.
‘왜 이제 와서.’
가슴이 쓰라렸다. 동시에 허탈하고 씁쓸했다.
“정 힘들면… 가지 않고 당신 곁에 남도록 해 볼게.”
프레져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잡힌 일정은 인터뷰나 사진 촬영이 전부고 나머지는 다 서면 업무니까… 그래. 노르티움을 떠날 필요 없이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거야.”
“대표님!”
문밖에서 프레져를 찾는 소리가 그의 말과 맞물렸다. 알프레도는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실례하겠다는 말과 함께 문을 열었다.
“환자가 있는 곳이야. 무례하게 이게 무슨 짓이지?”
프레져의 살기등등한 눈동자가 알프레도를 향했다. 그러나 알프레도는 물러서지 않고 입을 열었다.
“대표님, 출발하셔야 합니다.”
이미 프레져가 얘기한 시간보다 한참이 지나 있었다. 한시가 급한데, 그가 언제 병실에서 나올지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가 있어.”
“기차 시간에 맞추려면 지금 출발해야 합니다!”
“나가란 말 안 들리나?”
“막차입니다! 이걸 놓치면 내일 출발하는 수밖에 없는데…!”
프레져를 재촉하던 알프레도의 시선이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캐롤라인에게 향했다.
대표를 보내 달라 호소하려던 그는 캐롤라인을 보곤 저도 모르게 흠칫하고 말았다. 캐롤라인의 안색이 너무도 창백하기 때문이었다.
생기를 찾아볼 수 없는 얼굴에서 알프레도는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다. 저 정도면 처치불능한 큰 병에 걸린 게 확실해 보였다.
“마님, 송구하지만 양해 부탁드립니다. 늦으면 안 되는 일이라…….”
그럼에도 재촉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헌티드하우스 경영진임과 동시에 헌티드 백작가의 가신이었다. 헌티드의 이름 아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떠나야 옳았다.
설령 그게 캐롤라인에겐 잔인한 일일지라도.
“알겠어요.”
“캐롤!”
“감사합니다!”
허락은 흔쾌히 나왔다. 캐롤라인의 대답에 두 남자의 입에서 각기 다른 반응이 터져 나왔다.
“급한 일이라잖아요. 괜히 부하 직원들 괴롭히지 말고 얼른 출발해요.”
“당신을 두고 가라고?”
“그게 뭐가 대수라고요. 이제껏 안 그랬던 것도 아니고.”
그 말에 프레져의 입이 조가비처럼 다물렸다.
어깨를 으쓱이는 캐롤라인에게선 이전처럼 동요하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애초에 당신이 어딜 가서 뭘 하든 내가 신경 쓸 바가 아니잖아요. 그러니 나한테 일일이 보고하지 마요.”
캐롤라인은 제 감정을 감췄다. 프레져가 자신을 살필 수 없도록 몇 겹이고 벽을 쳤다.
“당신의 일 얘기 하나도 안 궁금해.”
“…….”
“머리 아파요. 이만 쉬고 싶은데 나가 줄래요?”
그 말에 알프레도는 깊게 머리를 숙인 뒤 문을 열었다. 얼른 나가자는 신호였으나 프레져는 발에 못이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당신 말대로 당신이 없는 게 치료에 훨씬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결국 한 마디를 덧붙이고 나서야 프레져는 걸음을 뗐다.
“…다녀올 테니 몸조리 잘해.”
던지듯 뱉은 말을 마지막으로 프레져는 병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자 꼿꼿하게 힘을 주고 있던 몸이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캐롤라인은 천장을 보고 누워 허공을 부유하는 먼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체념했다고 해서 힘들지 않은 건 아니구나. 이리 가슴이 아픈 건 몸이 약해졌기 때문이겠지.
캐롤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당신은 아파 본 적이 없으니 모르겠지.”
캐롤라인은 이미 닫힌 문에 대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는 당신처럼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 * *
프레져는 덜컹이는 기차에서 캐롤라인의 말을 곱씹었다.
‘당신은 아파 본 적 없으니 모르겠지.’
내가 정말 아팠던 적이 없나, 아픈 것과 지금 이 상황이 대체 무슨 연관인 걸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그는 아주 먼 어린 시절의 기억까지 파고들어 갔다. 그리고 무언가를 떠올리는 데 성공했다.
지독한 감기에 걸려 침대에만 누워 있던 어느 날을.
유모가 항상 옆에 있었고 주치의가 수시로 들어와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집안의 모든 사용인들이 어린 프레져를 걱정했다.
몸이 점차 나아지는데도 가슴은 낫지 않았다. 의사는 내일이면 괜찮을 거라 말했지만 프레져는 여전히 아팠다.
달빛조차 들지 않는 밤이면 어린 프레져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어째서 울었는지, 뭐가 그리 아팠는지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그저 몸이 아프니 정신까지 약해진 것이려니 결론짓고 말았다.
그 감정의 정체는 서러움이었다.
정신이 약해진 게 아니라, 인간이라면 응당 느껴야 할 설움이고 슬픔이었다.
외로운 자가 온기를 찾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니.
그러나 프레져는 아직까지도 알지 못했다.
어린 자신을 울게 만들었던 감정의 정체가 대체 뭔지.
* * *
프레져가 남부의 림홀로 향할 때도 기사는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뻔한 기사들 중 새로운 게 있다면 그 ‘양심 고백’이라는 것이 여러 개 추가되었다는 점이었다.
「단원들의 잇따른 폭로! 헌티드하우스, 이대로 괜찮은가?」
“하하하!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지!”
그 기사를 보며 낄낄 웃음을 터트리는 이가 있었다. 글랜포드의 2왕자이자 국왕의 사생아, 제럴드 험프리였다.
“그렇게 고고한 척하더니.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연일 터지는 폭로 기사에 제럴드는 누구보다 즐거워했다. 일명 ‘물타기 현상’을 만든 사람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었다.
“제럴드 님, 헌티드하우스의 단원 중 하나가 에폭시 사에 연락을 해 왔답니다.”
“그래그래. 최대한 빠른 시일 내 약속을 잡아라. 그래야 보도가 빨라질 테니.”
로잘린의 양심 고백이야말로 프레져를 무너뜨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래서 제럴드는 헌티드하우스 단원 몇 명을 매수해 추가 폭로를 유도했다.
‘보상은 섭섭하지 않게 하겠다고 전해. 이후에 발생할 소송이나 손해배상 역시 우리가 전부 해결하겠다고. 그러면 금방 넘어올 거야.’
제럴드의 작전은 제법 효과가 있었다. 내내 눈치만 살피던 단원 중 두 명이 접선을 시도해 왔다.
폭로의 시발점인 맥타인 사와 손을 잡으면 좋겠지만, 맥타인 사와 왕실은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 왕실에서 일어나는 온갖 스캔들을 폭로하는 신문사가 바로 맥타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럴드는 왕실과 친하면서도 제게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신문사에 협조를 구했다.
자신의 이종사촌이 고위 임원직을 꿰차고 있는 에폭시 사가 그 주인공이었다.
에폭시 사로선 차기 왕세자 후보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나쁠 것이 없었다. 게다가 이는 맥타인 사에 쏠린 대중의 관심을 뺏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그렇게 왕실과 언론은 흔쾌히 손을 잡았다.
“이번에 연락한 이는 맡은 직책이 뭐지?”
“저번과 마찬가지로 무용수입니다.”
보좌관의 대답에 제럴드의 표정이 언짢아졌다.
“왜 폭로하겠다는 사람이 죄다 무용수밖에 없어? 가수나 연주자 같은 놈들이 있어야 공신력을 얻지.”
“가수는 워낙 소수라 제보자가 특정될 가능성이 높아서 그럴 겁니다.”
“그럼 다른 놈들은? 연주자도 그렇고 무대 장치 만드는 놈들도 그렇고. 왜 가만히 있는 거야?”
“그쪽엔 헌티드 가의 지원을 받은 자들이 많아 그런 것 같습니다. 장비나 소품을 만드는 이들 역시 대부분이 평민이고요.”
음악에 조예가 깊은 헌티드 가문은 오래전부터 가난한 음악가들을 지원해 왔다.
지원을 받은 이들은 헌티드 가에 보답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실력을 키워 왕국에서 내로라하는 천재 연주자가 되었다.
그들은 당연한 수순으로 헌티드하우스를 찾았고, 극단의 대표인 프레져로서는 왕국 최고의 실력을 가진 이들을 내칠 이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