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베카는 모아가 슈와 잘 놀고 있는지 흘끗 확인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패트릭이 동북부 국경 지대에 있는 땅을 샀는데 거기서 마광석이 나왔어요.”
“마광석이요?”
캐롤라인과 엘라의 눈이 아까보다 더욱 커졌다. 마광석은 약 200년 전에 씨가 말랐다 알려진 자원이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이를 가공할 수 있는 기술자도 사라진 지금에 와서 마광석은 그저 예쁜 돌에 불과했다.
‘그래서 표정이 어두웠구나.’
베카의 마음을 이해한 캐롤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돌덩이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던 중에 카프지트에 마도공학자들이 남아 있다는 이야길 들었나 봐요.”
카프지트는 과거 마도공학으로 이름을 떨쳤던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마도공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없을 텐데…….”
엘라가 베카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광석이 고갈됐으니 이에 관련한 기술이 쇠퇴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나도 그런 줄 알았죠. 근데 카프지트에 아직도 마도공학의 맥을 잇는 기술자들이 소수 남아 있나 봐요. 그 사람들 손에 들어가면 뭐라도 되겠거니 하고 간 거죠.”
베카는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결 좋은 생머리가 정전기에 의해 솟아올랐다.
“나도 도통 모르겠어요. 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가만히 있으면 엉덩이에 종기라도 나는 건가.”
“아빠는 탐험가를 했어야 해.”
언제부터 이야기를 듣고 있던 건지 모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엄마 생각도 그래.”
“힘 내, 엄마. 모아가 있잖아.”
모아가 베카의 등을 다독였다. 어른과 아이가 바뀐 듯한 풍경에 캐롤라인과 엘라는 작게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대단해요. 그런 결단력과 추진력이 있다는 게.”
“추진력은 무슨. 철이 없는 거죠.”
“그래도요. 전 절대 하지 못할 일이거든요.”
캐롤라인이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늘 주저하는 인생을 살아온 그녀에게 패트릭은 정말로 멋있어 보였다.
‘패트릭의 반의 반절만 닮았더라도 좀 더 재미있는 삶을 살았을 텐데.’
여러모로 부러우면서도 후회가 됐다.
“언니, 나 쿠키.”
그때 슈가 엘라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엘라는 가방 깊숙한 곳을 한참이나 뒤적거린 후에야 종이에 싸인 쿠키를 꺼낼 수 있었다. 짐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엘라는 가방에 뭘 그렇게 많이 들고 다녀요?”
“시험 기간이 얼마 안 남아서요.”
엘라가 꺼내 뒀던 물건을 다시 가방에 담으며 말했다.
“되도록 수업에 빠지지 않으려고 했는데 별수 있나요. 책이라도 가지고 다니면서 봐야죠.”
엘라의 꿈은 의사였다. 이를 위해 아카데미에서 고등교육까지 받고 있는 것이었다.
“슈를 믿고 맡길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좋을 텐데.”
모아와 쿠키를 나눠 먹고 있는 슈를 본 엘라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캐롤라인은 문득 아이들을 돌볼 시설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이디나가 떠올랐다.
“그러게요. 아직 학교에 갈 나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몸이 좋은 것도 아니니 마음 편히 맡기지도 못하고…….”
이는 비단 이디나만의 걱정이 아닌 듯했다. 듣자 하니 베카를 비롯한 많은 보호자들이 비슷한 고민을 하는 모양이었다.
캐롤라인은 머릿속에 뒤엉킨 갖가지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만약에 그 문제점을 개선한 시설이 있다면 사용할 거예요?”
“당연하죠. 물론 애는 내가 데리고 있는 게 맘 편하긴 하지만, 항상 옆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저는 무조건 맡길 거예요. 우리 슈한테 미안하긴 하지만 저도 제 일은 하고 살아야죠.”
소중한 사람들이 원하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 본인이 정한 일엔 확신을 갖고 달려드는 패트릭까지.
생각이 정리되자 무언가가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 잡을 수 있는 용기가 조금 생겼다.
“제가 한번 알아볼게요. 병원 내부나 근처에 그런 시설을 만들 수 있는지요.”
아직 확실치 않은 것을 입 밖으로 낼 용기는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그 시설을 만들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정말요? 그래 주면 고맙죠!”
“캐롤라인은 애도 없는데 우리 때문에…, 혹시라도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요.”
그러나 베카와 엘라는 그것만으로도 기뻐했다. 그 모습이 약해진 마음에 힘을 불어넣어 줘서 캐롤라인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 * *
알프레도는 약속한 시간이 되기가 무섭게 프레져를 찾아왔다.
“대표님, 결정하셨습니까?”
“병원으로 가지.”
프레져가 무심하게 내놓은 대답에 알프레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네? 그럼 남부 공연은 어쩌시려고…….”
“갈 테니 호들갑 떨지 마. 떠나기 전에 한 번 보고 가려는 것뿐이니까.”
“그, 그러셨군요.”
알프레도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떠올랐다.
캐롤라인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지는 꽤 되었지만 프레져는 아직도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기사를 수습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이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마님께서도 이해해 주실 겁니다. 너그러운 분이시니까요.”
과연 그 너그러움이 이번에도 유효할까.
프레져는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자신이 싫어 거짓말을 하고 도망친 여자였다.
게다가 어디가 아픈지는 죽어도 알려 주지 않고.
애정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눈으로 자신을 봤다. 아네모네를 닮은 눈에 언뜻 비치는 감정은 증오를 닮아 있기도 했다.
그래서 프레져는 망설였다.
알프레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닌데 어째서인지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표님, 노르티움은 일을 해결한 후에 돌아와도 늦지 않습니다.”
마차에 오르는 발이 굼뜬 걸 목격한 알프레도가 말을 덧붙였다.
“……아픈 사람을 두고 가는 게 정말 맞는 일인지 모르겠군.”
프레져로서는 드물게 머뭇거리는 모습이었다.
한시가 급하긴 했지만 프레져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기에 알프레도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해도… 대표님께서 마님을 위해 해 드릴 수 있는 건 없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최선이란 거 아시지 않습니까.”
그걸 모르지 않아서 짜증이 나는 것이었다.
알프레도는 마차 문에 손을 얹은 채 석상처럼 서 있는 프레져를 향해 다시 한번 말했다.
“대표님은 헌티드하우스의 책임자인 동시에 한 가문의 주인이십니다.”
신중하지 않으면 모든 게 무너질 겁니다.
꼭 그리 말하는 것만 같아서 프레져는 눈을 꾹 감았다.
‘완벽한 헌티드 백작이 되어라.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널 무시하겠지. 가치 없는 아이를 사랑해 줄 사람은 없다.’
엄한 얼굴로 말하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귓가에 울렸다.
‘중요한 일을 판단하는 건 머리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을 그르칠 생각이냐? 너나 네 어미나 똑같구나.’
개인적인 감정은 완벽한 헌티드 백작이 되는 것을 방해한다. 그리고 완벽하지 않은 자신을 믿어 줄 사람은 없다.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유일한 여자가 이를 증명하지 않았나.
어쩌면 캐롤라인이 자신을 떠난 이유 역시 제가 부족해서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걷잡을 수 없이 불안해졌다. 마차 문을 잡은 손에 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캐롤라인을 돌아오게 만들려면 내가 더 완벽해지는 수밖에 없나.’
하지만 여기서 더 어떻게.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몰아쳐 프레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한결 진정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마차 뒤쪽을 바라봤다. 짐꾼들이 마차 짐칸에 짐을 한가득 싣고 있었다. 순식간에 일을 해치우는 걸 보니 마음이 많이 급하긴 한 모양이었다.
“…출발하지.”
캐롤라인은 한 명, 헌티드하우스는 수백 명. 부부의 역사는 2년이지만, 헌티드하우스의 역사는 300년.
‘헌티드하우스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
프레져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차에 올라탔다.
이성적인 헌티드 백작이라면 머저리 같은 생각을 해선 안 됐다.
사랑하는 척해 달라든지, 치아가 기억나지 않는다든지, 그런 말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것 같은.
* * *
머지않아 마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병실을 지키고 있던 마샤는 의외로 순순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스테파니였다면 단번에 거절했겠지만 마샤는 아니었다. 프레져가 캐롤라인의 곁을 지켰던 걸 보며 마음이 약해진 모양이었다.
“왜 왔어요?”
“몸은 어때?”
대답 대신 질문이 나왔다. 캐롤라인은 프레져의 시선을 외면한 채 입을 열었다.
“보이는 대로예요.”
프레져는 캐롤라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었다. 사람이 일주일 만에 살이 이렇게 빠질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캐롤라인은 야위어 있었다.
“보이는 대로라면 상태가 꽤 심각한 것 같은데.”
“…오래 쓰러져 있었잖아요. 그동안 먹은 게 없어서 그래요.”
그 시선을 느낀 캐롤라인이 해명하듯 말했다. 턱을 치켜드는 것과는 달리 손은 이불 속에 집어넣은 채였다. 주사 자국이 선명한 손을 가리기 위함이었다.
“병원을 꽤 오래전부터 드나들었던 것 같던데.”
“또 뒤를 조사했나 봐요?”
가시 돋친 목소리에 프레져의 입이 다물렸다.
기분을 나쁘게 하려고 꺼낸 말이 아닌데. 어디가 아픈지, 언제부터 아팠는지, 치료하면 나아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물으려 한 건데.
“뭐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에요. 그래도 기분 나쁜 건 어쩔 수 없네요.”
캐롤라인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몸이 아파서일까. 평소보다 기분이 엉망이었다. 프레져가 뱉은 말은 한껏 쇠약해진 그녀의 신경줄을 자꾸 건드렸다.
저리 냉소적인 표정을 한 캐롤라인은 처음이라 프레져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어떻게 해야 그녀의 화를 가라앉힐 수 있을까. 프레져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에릭 포스터를 데리고 다닌 건 그자가 의과 대학을 다녔기 때문이겠지.”
프레져를 응시하는 보랏빛 눈이 한차례 일렁였다.
“내가… 오해를 한 듯하군.”
프레져가 의심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는 찰나, 캐롤라인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진위 여부를 가리는 게 중요한가요? 이미 모든 게 진흙탕이 되어버렸는데.”
책임을 전가하는 듯한 말투에 프레져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애써 삼키며 입을 열었다.
“이 사달이 난 데엔 당신 책임이 크다는 생각은 안 해? 애초에 나를 속이고 떠나지 않았더라면 이 지경까진 안 됐어.”
캐롤라인의 동그란 눈동자가 번쩍였다. 프레져는 그제야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이 분노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를 만회하려 했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