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데이즈 사를 통해 헌티드하우스의 대표, 프레져 헌티드 백작의 입장 표명문이 발표되는 덴 이틀이 채 걸리지 않았다.
걱정을 끼쳐 죄송하다는 사과로 시작된 글은 주인을 닮아 젠틀하고 일목요연했다.
순회공연이 대표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시행된 일은 맞으나, 단원들 사이의 불화 및 폭력, 안젤라의 군림, 파벌 형성은 모두 거짓이라는 내용이었다. 특히 단원들을 노예처럼 부렸다는 부분을 완강히 부정했다.
단원들이 지원받은 것은 예술 장학금뿐이며 뇌물이나 청탁은 물론, 극단 내에 주먹다짐 같은 것은 절대 없었다고 주장했다.
수도의 임원진 역시 프레져와 같은 의사를 표명했다. 더불어 허위 사실을 유포한 A 양에 대해 강경히 대응하겠다는 내용도 함께였다.
그러나 한번 돌아선 여론을 되돌리긴 어려웠다. 신문에선 연일 두 얼굴의 백작이라는 기사가 쏟아져 나왔고 수많은 사람들이 프레져와 임원진을 질타했다.
무엇보다 ‘노예’라는 자극적인 단어에서 오는 반감이 상당했다. 약 100년 전 노예제 폐지를 시행했던 왕, 알토 험프리가 유년 시절 노예상에 팔려갈 뻔 했던 역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 웃긴 점이 있다면 이런 난리통 속에서도 취소 표는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네 번째 공연이 열리는 곳인 도킨스 오페라 하우스엔 평소보다 많은 인파가 모여들었고, 오히려 암표 값이 더욱 치솟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이어졌다.
이는 프레져가 공연을 취소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대표님, 정말 공연을 강행할 생각이십니까?”
“어차피 남은 공연은 하나야.”
동부의 도킨스에서 공연이 열렸던 게 어제였다. 이제 남은 공연은 약 일주일 후에 림홀에서 열릴 남부 공연뿐이었다.
“공연을 취소하는 게 더 우스워. 우리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니까.”
프레져는 흔들리지 않았다. 단지 머리가 조금 아팠을 뿐.
잘못한 게 없는데 고개 숙일 필요는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당당하고 꼿꼿하게 목을 세워야 했다.
“로잘린의 위치는? 파악됐나?”
“네. 현재 행스 자작저에서 칩거 중인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그런 간 큰 짓을 벌여 놓고 태연히 돌아다닐 수 있을 리가 없지.”
프레져의 얼굴에 조소가 떠올랐다.
“신변 보호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다니.”
맥타인 사는 정의보다는 이익을 쫓는 기업이었다. 그런 기업이 로잘린의 개인정보가 드러날 수 있는 부분을 삭제해 줄 리가 없었다.
독자들이 원하는 자극적인 내용은 제보자가 ‘수석 무용수’ 출신이라는 신분을 밝힐 때 공신력을 얻게 되므로.
“굳이 신원을 공개하지 않아도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누구 짓인지 알 텐데요.”
알프레도는 로잘린의 어리석음에 애도를 표했다. 그녀는 조만간 천문학적인 금액의 소송에 걸릴 테니.
그러나 지금은 로잘린 걱정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공연을 그대로 진행하실 거면 대표님께서 남부로 가시는 게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알프레도가 프레져의 눈치를 살피며 첨언했다.
투어를 시작할 당시 프레져는 5개의 지역 모든 공연에 직접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혔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끝까지 지켜지지 않았다. 이디나의 건강을 이유로 노르티움 이후의 모든 공연에 모두 불참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그러려니 넘어갔던 사람들도 기사가 나오기 시작하자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장모가 아프다는 것은 핑계고 사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대부분이었다. 직접 얼굴을 공개하고 사과하라는 이들도 적잖이 있었다.
들끓는 여론을 잠재울 가장 좋은 방법은 프레져가 직접 공식 석상에 얼굴을 비추는 것일 터였다.
“그건 안 돼.”
프레져는 알프레도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어, 어째서입니까?!”
거절을 생각지도 못했던 알프레도는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
“눈을 떴다는 소식만 들었지 아직 캐롤라인을 제대로 만나 보지도 못했어. 난 공연장에 갈 게 아니라 병원에 남아 아내의 곁을 지켜야 해.”
이번에 만나면 그녀가 예전부터 그렇게 원했던, 진득한 대화라는 것을 해볼 생각이었다.
대체 어디가 아픈 거냐고. 이를 숨기는 이유는 무엇이며 어째서 자신을 속이고 도망쳤냐고. 어째서 손바닥 뒤집듯 애정을 버려 버리냐고.
묻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았다. 무엇보다 저리 창백한 사람을 두고 떠날 수 없었다.
“다시 돌아오면 되지 않습니까! 마님께서도 당분간 노르티움에 계실 듯하니 금방 다녀오면 될 겁니다.”
“여기서 림홀까지 왕복으로 열흘이 넘게 걸린다. 그때까지 아내를 홀로 내버려 두라는 거냐?”
북부와 남부. 왕국의 양극단. 배를 타고 간대도 열흘 내에 돌아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마님이 어째서 혼자입니까. 곁에 보필할 시종들이 셋이나 있던데요.”
“시종과 남편이 같나?”
맞는 말이었으나 프레져에게만큼은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지금껏 캐롤라인을 시종들에게만 맡긴 채 잘 살아왔으면서.
그러나 알프레도는 이를 입 밖으로 뱉진 않았다. 대신 큼큼, 헛기침을 한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마님께 필요한 사람은 간병인입니다. 대표님께선 간호 같은 것 한 번 해 보신 적 없고요.”
“…….”
“마님을 간호할 사람은 많지만 헌티드하우스의 대표는 이 세상에 한 분뿐입니다.”
알프레도의 흔들림 없는 시선이 프레져를 향했다. 프레져가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자 알프레도는 회심의 한마디를 덧붙였다.
“각자 잘하는 일을 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람에게는 신분이 있고 그에 맞춰 해야 할 일이 있다.
또한 위치에 따라 개인의 역량과 중요도도 다르다.
사람을 돌보는 데 전혀 재주가 없는 사람은 기업을 이끄는 데에서 천부적인 능력을 발휘하곤 한다. 마치 프레져처럼.
이쪽에 있어 봤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다른 곳에 가서 영향을 행사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지 않은가?
뼛속까지 귀족이자 사업가인 알프레도의 생각은 그랬고 그건 프레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이런 말을 꺼낸 것이었다.
“마님은 기다려 주시겠지만 관객은 기다려 주지 않을 겁니다.”
“…잠깐 나가 있어. 생각이 정리되면 부를 테니.”
평범한 이에겐 절대 먹히지 않을 설득이 프레져에게는 통했다.
알프레도는 직전보다 조금 가벼워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 내로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
문이 닫힘과 동시에 프레져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침상 위에 죽은 듯 누워 있던 캐롤라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 같은 사람한테는 말할 필요도 없다 말하던 가느다란 목소리도.
“내가 없는 편이 당신한텐 더 나으려나…….”
당신은 나를 싫어하니까. 그래서 이 먼 곳까지 도망쳤으니까.
형태를 알 수 없는 마음들이 프레져를 무겁게 짓눌렀다.
* * *
“캐롤! 괜찮아?”
또랑또랑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상대가 보이지 않아 캐롤라인은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려야 했다. 어른 골반쯤에도 오지 않는 자그마한 여자아이 둘이 나란히 서 있었다.
모아와 슈였다.
아이들의 뒤를 따라 모아의 어머니인 베카와 슈의 언니인 엘라가 들어왔다. 엘라는 아카데미 재학생으로, 일로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종종 슈를 돌보곤 했다.
“캐롤, 아직도 많이 아파?”
“아니. 이제는 괜찮아.”
“다행이다.”
모아가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침대 위로 올라갔다.
“모아, 오늘은 캐롤라인한테 안기면 안 돼.”
“나도 알고 있거든! 조심하고 있다고.”
노파심에 말하는 베카를 향해 모아가 새침하게 소리쳤다. 살이 비정상적으로 빠진 캐롤라인의 모습은 어린아이들이 보기에도 연약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캐롤, 이거 받아.”
모아가 병아리 모양 배낭에서 꼬질꼬질한 헝겊 뭉치 하나를 꺼내 건넸다.
“이게 뭐야?”
“아픔이 인형이야. 캐롤의 아픔을 전부 다 가져가라고 만들었어!”
손바닥만 한 크기의 노란 헝겊 위엔 단추 두 개와 색색의 털실이 달려 있었다. 얼마나 심혈을 다해 만들었는지가 느껴졌다.
“고마워, 모아. 항상 가지고 다닐게.”
솜털이 보송보송한 뺨을 쓰다듬자 아이가 이를 드러내며 배시시 웃었다.
“슈도 잘 지냈어?”
“흐윽, 캐롤라인…….”
들어올 때부터 입술을 내밀고 있던 슈는 말을 걸기가 무섭게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는 모아보다 두 살이 많았음에도 유독 눈물이 많았다.
“슈, 뚝 하고 이리 와.”
캐롤라인이 제 옆자리를 팡팡 두드리자 슈는 후다닥 캐롤라인의 옆에 가 앉았다. 캐롤라인은 손수건을 꺼내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된 아이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캐롤이 울지 말라잖아. 얼른 뚝 해.”
“흑, 응.”
어느새 캐롤라인의 왼편을 차지하고 앉은 모아가 제법 의젓하게 말했다.
캐롤라인은 양옆에 앉은 아이들의 머리통을 살살 쓰다듬으며 두 보호자들의 눈치를 살폈다. 혹여 제가 헌티드 백작 부인이라는 것을 알아챈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었다.
“캐롤라인,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애들이 보채서 오긴 했는데. 우리 때문에 못 쉬는 건 아닌가 걱정이네요.”
평소와 같은 걸 보니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괜찮아요. 아직 기운을 덜 차려서 그렇지 많이 괜찮아졌어요.”
“정말이죠?”
엘라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물었다. 캐롤라인은 새삼 자신이 괜찮다는 말을 얼마나 입에 달고 살았으면 사람들이 이런 표정을 지을까 싶었다.
“그럼요. 정말 괜찮아요.”
“많이 힘들거나 안 좋아지면 말해요. 바로 비켜 줄 테니까요.”
베카가 침대 옆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엘라 역시 베카를 따라 앉았다.
“퇴원은 언제래요?”
“음, 당분간은 어려울 것 같아요.”
캐롤라인은 긴장했던 가슴을 몰래 쓸어내렸다.
‘아직 임상 치료실까진 퍼지지 않은 모양이야.’
내가 헌티드 백작 부인이라는 사실이.
재잘재잘. 여느 때와 다름없는 소담한 대화가 오갔다. 자신의 작은 평화가 이곳에서만은 지켜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캐롤라인은 안심이 됐다.
동시에 불안하기도 했다. 이 평화가 영원할 수 없을 거란 걸 알기에. 게다가 이 착한 사람들에게 제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에 옅은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엄마! 목말 태워 줘!”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지루했는지 모아가 자리에서 번쩍 일어나 두 팔을 벌렸다.
“엄마 힘이 없어서 그런 거 못 해. 아빠 오면 해 달라고 하자.”
“힝.”
단호한 대답에 모아가 오리처럼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고 보니 패트릭이 안 보이네요.”
어쩐지 조용하더라니. 맨날 모아에게 구박을 받던 서글서글한 얼굴의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이는 사업차 카프지트로 떠났어요.”
“카프지트요?”
“튜바로사 왕국 알죠? 그 안에 있는 작은 공국이에요.”
베카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채 대답했다. 표정을 보니 무언가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 기억나요. 카프지트라면 얼마 전에 독립 문제로 시끄러웠던 곳이죠?”
엘라가 말을 보태자 캐롤라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카프지트라면 몇 해 전부터 신문에서 익히 봤던 이름이었다.
튜바로사는 글랜포드 서쪽에 위치한 왕국으로, 과거의 체제가 유독 많이 남아 있는 나라 중 하나였다. 그 구식 제도 중 하나가 바로 공국이었다.
여느 공국이 그렇듯 카프지트 역시 그들만의 독립적인 행정 체계를 갖고 있었고, 저들만의 결속력으로 뭉친 공국인들은 튜바로사에서 완전히 독립하길 원했다.
“그런데 거기엔 무슨 일이 있어서요? 글랜포드는 아직 카프지트와 이렇다 할 교역이 없을 텐데.”
엘라의 물음에 베카가 한숨을 푹 쉬며 입을 뗐다.
“그 이렇다 할 교역을 만들러 간 거예요. 그 인간이.”
“네?”
캐롤라인과 엘라의 눈이 동시에 커다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