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프레져는 서둘러 노르티움 시청으로 향했다. 노르티움 내에서 전화를 쓸 수 있는 곳은 시청과 경찰서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글랜포드의 전화는 비싼 통화료 대비 그리 안정적이지가 않았다. 교환원이 상대와 통화를 연결시켜 주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전화 대신 전서구를 선호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서면 보고라면 모를까, 즉답이 필요한 대화를 전서구로 주고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네 번째 공연이 열리는 도시인 도킨스의 호텔엔 전화가 있었고 알프레도가 미리 조치를 취해 둔 덕에 대기 없이 전화를 연결할 수 있었다.
─ 대표님!
전화기에 귀를 대자마자 로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극단 꼴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 정말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시간 없으니 용건만 말해. 하나도 빼먹지 말고 정확하게.”
─ 그게…….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이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던 로잘린과 릴리가 크게 다퉜다. 늘 그렇듯 먼저 시비를 건 쪽은 로잘린이었다. 보다 못한 안젤라가 릴리의 편을 들며 로잘린을 내쫓았고, 이에 분노한 로잘린은 휴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굳이 사표를 냈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지금 이런 기사가 나온 것이었다.
A 양이 누구일지, 범인은 보나마나 뻔했다.
“내 손에 잘리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군.”
스스로 극단을 그만두는 것과 잘리는 것은 달랐다. 전자의 경우엔 다른 무용단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후자는 불가능했다.
다름 아닌 헌티드하우스에서 불명예스럽게 쫓겨난 이를 받아 줄 팀이 있을 리 만무했다.
로잘린은 불명예스럽게 퇴출될 바에 극단과 척을 지는 것을 택한 것이었다.
“단원들 사이가 이 지경이 될 동안 나에게 보고 한 번 올리지 않고 뭐한 거지?”
─ …….
로겐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그라고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순회공연을 시작하기 전에 단원들에게 알려 줬다면, 하다못해 프레져가 단원들의 의사 한 번이라도 물어봤다면 일이 이 지경까지 커지진 않았을 테니까.
다만 책임을 운운하는 것보단 문제를 해결하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곳의 상황은 어때?”
─ 기자들부터 시작해 안젤라의 팬들까지……. 해명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도킨스 극장 앞에 잔뜩 모여 있습니다.
“수도의 오페라 하우스는?”
─ 거기도 이곳과 별반 다르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2왕자께서 이 상황을 아주 관심 있게 지켜보겠다는 말까지 하셔서…….
“제길!”
수화기를 쥔 프레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제럴드가 끼면 일이 더욱 복잡해질 게 분명했다.
“일단 여론부터 잠재운다. 수도엔 내가 연락해 둘 테니 너는 이 뒤에 열릴 공연에만 집중해. 로잘린의 공석은 메웠나?”
─ 올리비아가 대신하기로 했습니다.
“절대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마. 양심 고백이고 불화고, 우리에겐 일어난 적 없는 일이니까. 알겠나?”
─ …네. 잘 수습해 보겠습니다.
로겐의 한숨 같은 대답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전화실에서 나오니 시청의 직원들이 프레져 쪽을 기웃거리다 후다닥 자리에 앉는 게 보였다.
프레져는 그 시선을 못 본 체하며 건물 밖으로 나섰다.
“알프레도, 수도의 신문사 중 노르티움에 지부를 두고 있는 곳이 몇 군데나 되지? 바로 기사를 뽑을 수 있을 만큼 크고 빠른 곳 말이야.”
프레져의 물음에 알프레도가 눈알을 굴렸다. 생각을 마친 그는 프레져에게 마차 문을 열어 주며 대답했다.
“맥타인 사를 제외하면… 데이즈 사와 브렉보드 사 두 곳입니다. 데이즈 사는 인쇄 전신기를 가지고 있어서 왕국 전역에 보도되는 속도가 가장 빠를 겁니다.”
“그럼 지금 당장 데이즈 사에 연락을 넣어. 그쪽을 통해 해명문을 발표하겠다고.”
프레져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대답했다. 두뇌 회전과 두통은 비례하는 건지, 머리가 빠르게 돌아갈수록 관자놀이에 통증이 일었다.
어떤 일을 먼저 처리해야 할지 착착 정리가 될 동안 캐롤라인에 대한 걱정은 저 아래로 밀려났다.
“젠장, 급한 불을 끄는 대로 돌아가려 했는데.”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마음이 복잡했다.
어느새 그녀에 대한 걱정은 너무도 멀리 밀려 버려 작고 아득하게 보였다.
그 위로 새로운 걱정거리가 차곡차곡 쌓여 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되었을 때, 프레져는 마차를 출발시켰다.
“괜찮겠지.”
추측이 아닌 소원을 조용히 뇌까리며.
* * *
관공서가 밀집해 있는 수도의 한 거리.
챙이 넓은 모자를 쓴 한 여자가 건물 안으로 빠르게 걸어 들어갔다. 스카프를 둘둘 말아 얼굴의 절반을 가린 여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로잘린이었다.
건물 3층으로 들어서자 정장을 갖춰 입은 직원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녀를 맞이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인터뷰실로 들어갔다.
“로잘린 행스 양?”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가 로잘린을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대를 알아본 로잘린 역시 시야를 가리던 모자를 벗어 던졌다.
“게든 파커 기자님 맞으시죠?”
그는 글랜포드의 유명 신문사 중 하나인 맥타인 신문의 문화부 기자였다.
헌티드하우스의 불화에 대해 고백하겠다는 로잘린의 연락에 급히 자리를 만든 것이었다.
단원들의 불화는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으나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잘린의 양심 고백은 맥타인 사에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왕정을 유지하고 있는 글랜포드라도 신문사마다 성향의 차이는 존재했다. 개중에서도 맥타인 사는 유독 자극적인 보도를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충격적인 헤드라인과 정치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칼럼, 귀족들의 스캔들을 고발하는 기사까지. 왕국의 이슈는 모두 맥타인 사에서 만들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비윤리적이라는 비난이 끊이지 않았으나 매출은 야유에 비례해서 상승했다.
뭐든 막장은 재밌는 법이고 그게 사실에 입각한 내용이라면 더욱 흥미진진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었다.
로잘린이 맥타인 사를 선택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기사는 익명으로 나가는 거 맞죠?”
“네, 제보자의 신원은 확실히 보호해 드리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금만 더 깊게 생각했다면 정체가 금방 탄로 날 것임을 알 수 있을 텐데. 아쉽게도 현재의 로잘린에겐 깊은 사고를 할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프레져가 자신을 해고하기 전에 선수를 쳐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할 뿐이었다.
“헌티드하우스의 수석 무용수 자리를 박차고 나오셨다고요.”
“맞아요. 독선적인 대표부터 틈만 나면 으르렁거리는 단원들까지……. 도저히 같이 일을 할 수가 없었어요.”
로잘린은 한숨을 푹 쉬고는 눈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그녀는 극단에서 자신이 받았던 부당함에 대해 줄줄이 토로하기 시작했다.
단원들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 투어를 기획한 프레져, 이 사실을 신문으로 알게 된 단원들, 한 달 동안 소화해야 되는 살인적인 일정.
시작이 어려웠지 한번 입을 떼기 시작하니 술술 말이 쏟아져 나왔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주먹부터 드는 단원도 있다니까요.”
“폭력을 행사했다는 겁니까?”
게든 파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호기심 가득한 눈을 보자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욕구가 샘솟았다. 제 입맛에 맞게 이야기를 각색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릴리가 소매를 걷어붙였던 건 사실이잖아?’
마치 자신을 때리기라도 할 기세로.
생각을 마친 로잘린은 가련하게 뺨을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적인 폭력은 없었지만… 주먹을 휘두르며 위협을 하긴 했어요. 대표님을 비판했다는 이유로요.”
로잘린의 화려한 입담 아래 평민 출신 단원들은 프레져에게 뒷돈을 받고 편을 드는 무뢰배로 둔갑했다.
그 뒷돈이 장학금과 헌티드 가문의 지원이라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는 않았다. 어찌 됐든 헌티드 가문의 돈은 프레져의 돈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극단의 실세는 안젤라 골드에요. 그 사람 말 한마디면 다들 꿈쩍도 못 한다니까요.”
릴리의 편을 들었을 뿐인 안젤라는 패악을 일삼는 두 얼굴의 슈퍼스타가 되었다.
“허어, 이게 사실이라면 헌티드 백작은 정말 악마나 다름없는 인간이군요.”
눈을 빛내며 묻는 상대를 보며 로잘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프레져의 굳은 얼굴을 떠올리자 뒤늦게 자신이 뱉은 말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래도 극단에서 불명예스럽게 퇴출되는 것보다는 나아.’
로잘린은 허벅지 위에 올려 둔 손을 세게 말아 쥐었다.
헌티드하우스의 수석 무용수라는 점은 두고두고 회자될 가문의 자랑이었다. 그리고 명예로운 것을 싫어하는 귀족은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중앙 귀족들과 친분을 맺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평민과 다툰 것도 모자라 안젤라의 눈 밖에 나 이번 공연에서 퇴출당한 게 알려진다면 큰일이었다.
이보다 더 큰일은 따로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대표가 자신을 해고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대표나 안젤라에게 용서를 빌면 해결될 수도 있겠지만, 그 두 사람에겐 절대로! 굽신거리고 싶지 않아.’
그 오만한 인간들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니. 로잘린의 체면이 좀처럼 용납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이 안젤라의 뒷담화를 하고 다녔던 게 당사자의 귀에 들어갔다. 이젠 무슨 짓을 해도 안젤라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을 터였다.
‘차라리 선수를 치는 게 낫지.’
그래서 사직서를 냈다. 해고된 게 아니니 헌티드하우스만큼 좋은 곳은 아니어도 괜찮은 무용단을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용기 내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 극단의 수석 무용수 자리까지 그만두고 저희를 찾아온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사실 로잘린이 이곳을 찾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헌티드하우스에서 보다 더 큰 명예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헌티드 백작의 노예로 살 수는 없으니까요. 부조리는 타파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이 질문을 위해 며칠을 준비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자 기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글랜포드 사람들이 ‘노예’라는 단어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보기 드문 귀족이시군요.”
“…칭찬인가요?”
“영웅이라는 뜻입니다.”
“어머, 과찬이세요.”
겸양을 떨었지만 올라가는 입꼬리는 숨겨지지 않았다.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수확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로잘린의 눈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