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51)화 (51/156)

#51

캐롤라인은 끝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에 삼켜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슬며시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그러자 익숙한 물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캐롤라인의 손에 들려 있는 건 글랜포드 근대 문학에 획을 그었다는 한 시인의 책이었다. 가장자리 끝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었던 책이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이 책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근대 문학이라면, 특히 시라면 지긋지긋했다. 그럼에도 책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였다.

“헌티드 부인, 이 구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콕 집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캐롤라인은 주변을 살폈다. 시 낭송회의 회장인 마리타 부인과 함께 유리온실 안의 모든 여인들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터진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는 아이야, 손이 시렵지 않느냐.’라는 구절 말이에요.”

캐롤라인은 그제야 이 모임의 정체가 매주 월요일마다 있던 시 낭송 모임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이번엔 자신의 발표 차례인 모양이었다.

“음, 그게…….”

애초에 주머니가 터진 옷을 왜 입고 다니는지 알 수 없었다.

나였으면 꿰매서 입고 나왔을 텐데. 주머니에 든 물건이 빠지면 안 되잖아.

하지만 그렇게 말했다간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게 분명했다. 그래서 캐롤라인은 귀부인이라면 으레 할 법한 대답을 내놓았다.

“옷 한 벌 사지 못한 어린아이를 보며 안타까워하는 화자의 마음이 잘…….”

“푸흡!”

캐롤라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딘가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 웃음을 시작으로 자리에 모인 이들이 깔깔거리며 캐롤라인을 비웃기 시작했다.

마리타 부인이 손뼉을 두 번 쳐 주위를 조용히 시켰다.

“작가는 아이를 보며 깨달음을 얻고 있지요. 아이는 제가 가진 것을 남에게 나눠 주기 위해 스스로 주머니에 구멍을 낸 거니까요.”

“아…….”

“제대로 읽은 게 맞나요? 아무래도 헌티드 부인은 공부를 다시 해야겠네요.”

다시 깔깔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부끄러웠으나 참을 만했다. 이들은 자신이 정답을 말해도 똑같이 비웃었을 테니까.

틀린 말을 하면 평민 출신이라 배움이 짧다고, 맞는 말은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서 괴롭혔다. 낄 자리를 못 알아본다며 뒷담화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정작 먼저 초대한 건 저들이면서 무슨 불만이 이리 많은지 캐롤라인은 알 수 없었다.

공간은 빠르게 바뀌었다. 승마장, 티 파티, 꽃꽂이 모임…….

수많은 장소에 가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으나 그녀를 무시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캐롤라인은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저 완벽한 프레져 헌티드에게 어울리는 사람은 못 되더라도 그에게 폐가 되고 싶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살았다.

다시금 고개를 들었을 땐 식탁 앞이었다.

프레져는 서류를 넘기며 성의 없이 빵 조각을 집어 먹고 있었다.

“여보.”

“…….”

“여보, 많이 바빠요?”

한 번에 듣지 못하는 프레져를 위해 캐롤라인은 두 번이나 그를 불렀다. 그마저도 못 들은 눈치여서 손등으로 식탁을 똑똑 두드리기까지 했다.

‘일찍 돌아오면 나들이를 가자고 해야지. 바쁘다고 하면 올 때까지 안 자고 기다려야겠다.’

즐거운 마음으로 프레져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으나 그의 입에선 그녀가 예상했던 어떠한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언짢은 표정을 한 채 식탁을 짚은 캐롤라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

“네?”

“식탁 두드리는 거, 예의가 아니라 배웠을 텐데.”

“아…….”

캐롤라인은 황급히 식탁 위에 올린 손을 거뒀다. 귀족답지 않은 행동이 프레져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었다.

“클라비스 부인이 안 가르쳐 줬나?”

“아니에요! 가르쳐 줬어요. 그냥 당신이 내 목소릴 못 들은 것 같길래…….”

클라비스 부인은 프레져가 캐롤라인에게 붙여준 가정 교사였다. 이외에도 승마 선생, 역사 선생, 춤 선생 등 수많은 가정 교사들이 그 뒤에 주렁주렁 붙어 있었다.

전부 캐롤라인을 완벽한 백작 부인으로 만들기 위한 과정이었다.

“품위를 지켜. 나는 내 아내가 무시당하는 걸 원치 않아.”

“…완벽한 헌티드를 위해서요?”

우물쭈물 묻는 캐롤라인에 프레져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우선순위가 틀렸어. 이건 헌티드 이전에 당신을 위한 일이기도 해.”

그는 늘 그녀를 위한 일이라 말했지만 캐롤라인은 정말 이게 자신을 위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캐롤라인이 보기에 프레져는 자신을 하나부터 열까지 재조립하고 싶은 것 같았다.

로우밸리의 촌뜨기를 버리고 수도의 귀부인이라는 새로운 부품을 끼우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내가 그렇게 부끄러운 걸까?’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감히 입 밖으로 뱉을 수는 없었다. 스스로가 보기에도 캐롤라인 헌티드는 부족했다. 자세도, 말투도, 교양도 고상함과 거리가 멀었으니 프레져가 부끄러워하는 건 당연했다.

“알겠어요.”

결국 캐롤라인은 웃었다. 이렇게 웃으면 프레져는 몇 번이고 넘어가 주곤 했으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가 봐야겠어.”

벽시계를 확인한 프레져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재킷을 걸쳐 입다 무언가 떠오른 듯 캐롤라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아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 할 말이 있어 보였는데.”

“별거 아니었어요. 늦었을 텐데 얼른 가 봐요. 괜찮으니까.”

또 습관처럼 괜찮다는 말이었다.

“그럼 다녀오지.”

그의 눈동자가 캐롤라인에게 머물렀던 시간은 찰나였다.

프레져는 배웅할 틈도 없이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캐롤라인은 우두커니 앉아 프레져가 앉아 있던 자리를 눈에 담았다. 그가 있던 자리엔 흔한 빵 부스러기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게 캐롤라인을 더욱 미치게 했다.

* * *

캐롤라인이 쓰러진 지 사흘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그녀는 눈 한번을 뜨지 못했다.

“왜 못 일어나는 겁니까? 분명 안정을 찾았다고 했잖습니까.”

“지금으로선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저 환자가 깨어나길 기다리는 게 유일한 방법이에요.”

벌써 몇 번째 채근하는 건지 모를 에릭을 향해 홉킨스 박사가 말했다. 그도 이 상황이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응급실에 찾아왔을 때 캐롤라인의 심장은 비정상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제대로 흐르지 못한 피가 역류하고 있던 것이었다,

게다가 스트레스로 인한 고열과 경련까지. 용케 정신을 붙잡고 있던 게 대단할 정도였다.

“이리 아픈 사람을 가까스로 진정시켜 놨는데 어찌 금방 깨어나겠습니까.”

홉킨스 옆에 서 있던 클리브가 에릭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지금 하고 있는 치료 외에 다른 방법은 없겠죠?”

“미안하지만… 네. 기계가 이상 신호를 보낼 때마다 약물을 투여하는 게 전부입니다.”

클리브가 대답을 마침과 동시에 벽 한 켠에 서 있는 기계가 커다란 소음을 내며 돌아갔다. 이외에도 그레타에서 들여온 신기한 외양의 기계들이 캐롤라인의 옆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걸 보고 있는 저도 고문인데, 겪는 사람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짐작도 안 가는군요.”

에릭이 기계가 표시하는 줄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레타가 세계 최고의 의술을 자랑한다 한들 한계는 언제나 존재했다. 심장을 검사하는 기계는 아주 느리고 시끄럽게 돌아갔고, 전자 진단법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위는 한정적이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가슴을 가를 수도 없으니 그저 막막할 뿐이었다.

“에릭도 일단은 쉬세요. 보호자가 무리하면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홉킨스와 클리브는 며칠 새 눈에 띄게 야윈 캐롤라인을 바라보다 병실을 나섰다.

그들의 뒤를 따라오는 의료진의 표정도 착잡하긴 마찬가지였다. 의사로 살며 수많은 병과 죽음을 목격했지만 이를 지켜보는 건 언제나 힘들고 괴로웠다.

“어? 저분은…….”

그때 간호사 하나가 복도 끝을 가리키며 말했다. 큰 키에 다부진 체격,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남자는 프레져 헌티드 백작이었다.

의료진을 발견한 프레져가 조금 더 속도를 높였다. 그러곤 예의 정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의식은 돌아왔습니까?”

홉킨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안 그래도 수척한 프레져의 얼굴에 그림자가 생겼다. 눈동자도 총기가 없이 흐렸다.

그러나 프레져를 보는 클리브의 눈에 그를 향한 안타까움이나 동정은 없었다. 그저 캐롤라인을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방치한 저 남자가 싫었다.

프레져가 탐탁지 않은 건 홉킨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대로 프레져를 지나쳐 가려다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학생을 훈계하는 듯한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캐롤라인 헌티드 씨의 남편이라지요.”

“……네.”

“환자가 저리 아프다는 걸 여태까지 몰랐습니까?”

입을 벌렸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는 말 한마디를 뱉기가 너무도 힘들었다.

“아내가 말해 주지 않-.”

“환자가 말하지 않아서 몰랐다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싸늘하게 말을 끊는 클리브의 태도에 그의 뒤편에 선 의료진들이 눈동자를 굴렸다. 두 사람이 책망하고 있는 저 사내가 그 유명한 헌티드 백작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요 몇 달간 매일같이 신문에 등장하던 얼굴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병색이 저리 짙은데, 같이 사는 사람이 그것조차 알아보지 못한답니까?”

“…….”

“눈이 가지 않을 수가 없는 몰골인 것을.”

쯔쯧, 혀를 찬 홉킨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프레져를 지나쳐 갔다.

힐끔힐끔 프레져를 곁눈질하던 간호사들은 서둘러 홉킨스를 따라갔다.

“하…….”

복도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프레져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으며 신음했다.

제가 보고 들은 것이 모두 거짓이길 바랐다. 이 역시 자신을 농락하려는 캐롤라인의 수작이기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기도했다.

그러나 아내는 좀처럼 눈을 뜨지 않았다.

이따금 굉음을 내며 돌아가는 기계들만이 이게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사실을 인지시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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