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몸이 조금 부은 거 같던데 아프거나 하진 않겠죠?”
붓기는커녕, 자신을 떠나 살만해졌는지 살이 쪘다고 생각했다.
“……환절기라 허약해진 것 같긴 하더군요. 잘 챙겨 먹고 쉬면 다시 건강해질 겁니다.”
무어라 확언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프레져가 이디나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캐롤라인의 상태를 몰라도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문득 핏기 없는 얼굴로 침상에 누워 있던 캐롤라인이 떠올랐다. 더불어 병실 침대에 앉아 자신을 노려보던 모습도. 그녀가 건강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만 어디가 아픈지 알 수 없었다. 진료 기록도 숨기고, 어디가 아픈지를 도통 알려 주지를 않으니.
“역시 썩 튼튼하진 않은 모양이군요. 그러면서 어미가 온다고 검사고 임상 실험이고 다 알아보다니.”
“임상 실험이요?”
“네. 난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는데 어찌나 잘 알고 있던지…….”
임상 실험이라는 것은 프레져처럼 모든 분야에 박식한 이도 잘 알지 못하는 개념이었다. 글랜포드에서는 실행된 바가 없는 분야이기에 더욱 그랬다.
그런데 캐롤라인은 이디나가 노르티움에 오기 한참 전부터 임상 실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심지어 노르티움 병원에서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도.
‘마치 처음부터 관심이 있던 것처럼.’
“알아서 신경 써 주시긴 하겠지만, 그래도 잘 챙겨 주세요. 부탁드릴게요.”
프레져는 문득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플라이크로 여행을 간 캐롤라인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 그녀가 보타베르트의 역무원을 매수해 거짓 정보를 흘렸을 때 이와 같은 느낌을 받았었는데.
“백작님?”
그럴 리가 없는데 자꾸만 불안했다. 어딘가 칙칙한 안색도, 오래된 제도를 쓰면서까지 제 병환을 숨기는 모습도, 병원에 자주 방문한 모양이라 전하던 빌의 말도. 생각해 보면 그리 숨길 필요가 없는 건데.
“백작님,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프레져가 가라앉은 표정을 지었으나 이디나는 보지 못했다. 눈이 안 좋은 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 *
“괜찮으세요?”
마샤의 물음에도 캐롤라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한바탕 울고 난 이후로 생긴 미열은 저녁이 되니 펄펄 끓는 수준이 되어 있었다.
“마차를 불렀네. 조금만 기다려!”
1층에서 아크만이 소리쳤다. 해질녘부터 내린 갑작스런 소나기 탓에 마차도 잘 잡히지 않았다. 여러모로 이디나가 일찍 가 버린 게 다행일 지경이었다.
“마님, 곧 있으면 마차가 옵니다. 힘드시겠지만 조금만 버텨 주세요. 제발요.”
에릭이 캐롤라인의 입에 물을 흘려 넣으며 말했다. 스테파니는 캐롤라인에게 겉옷 껴입혔고 마샤는 캐롤라인의 몸을 흠뻑 적신 땀을 닦느라 정신이 없었다.
“비가 안 오면 업고라도 갈 텐데…….”
머지않아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에릭은 캐롤라인의 몸을 일으켜 제 등에 업었다. 스테파니와 마샤는 제 몸이 젖는 줄도 모르고 캐롤라인에게 우산을 씌웠다.
“흡, 헉!”
“마님!”
병원에 갈 수 있다는 안도도 잠시, 캐롤라인이 컥컥거리며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열로 달뜬 얼굴이 파랗게 질려 가기 시작했다.
“젠장, 빨리 출발하지 않고 뭐 하나! 빨리!”
아크만의 호통에 멍하니 있던 마부가 허둥지둥 고삐를 쥐었다. 목숨이 위중한 손님을 태울 줄은 몰라 당황한 눈치였다.
이윽고 마차가 사방에 흙탕물을 튀기며 달리기 시작했다. 말의 엉덩이에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물방울이 튄 자리는 살얼음이 끼기 시작했다.
비로소 가을의 끝이었다.
* * *
비는 짧았으나 거세게 내렸다. 노르티움 옆 도시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프레져는 꼼짝없이 발이 묶였다. 그가 있던 곳은 길이 잘 포장되어 있지 않아 마차 바퀴가 빠졌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캐롤라인에 대한 생각으로 인해 회의에 집중하지 못했다. 일이 끝나는 대로 그녀를 찾아가려던 찰나에 비가 내리는 것도 모자라 바퀴까지 빠지다니.
프레져는 땅이 굳는 즉시 다른 마차를 빌려 타고 캐롤라인이 있는 곳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힐롱 부부의 꽃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저녁이었다. 꽃집은 닫혀 있었고 캐롤라인이 사는 건물 2층은 불이 꺼져 있었다. 되는 일이 없었다.
“자는 건가.”
저녁때가 조금 지났을 뿐이지 아직 잘 시간은 아니었다. 아직 불이 켜진 가게가 있기도 했다. 이 시간에 네 명이서 단체로 외출을 했을 확률은 더욱 없었다.
평소였다면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갔을 터였다. 어쨌든 연락 없이 찾아온 건 자신이었으니.
그러나 어째서인지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마차 바퀴가 빠진 것부터 불이 꺼져 있는 것까지. 오늘 일어났던 운수 없는 일들이 프레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불현듯 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일어난다는 어떤 속담이 떠올랐다.
프레져는 미신을 믿진 않았으나 자신의 감은 믿는 편이었다. 사업을 하는 이상 감에 의지해야 할 경우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럴 때마다 프레져의 감은 놀랍도록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리고 지금, 동물처럼 예민한 그의 감이 몸 곳곳에서 외치고 있었다. 끔찍할 정도로 두려운 일이 필시 일어날 것이라고.
빗물에 파리하게 젖어 갔던 얼굴, 힘없이 쓰러졌던 몸, 과할 정도로 그녀를 보호하던 하녀들, 알싸한 소독약 냄새, 입원, 그리고 임상 실험.
“에릭 포스터…….”
그자가 의대를 중퇴했다는 사실이 이제야 떠올랐다. 그걸 생각하자 온몸의 피가 빠져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야.”
프레져는 중얼거리며 건물 우측에 있는 출입문으로 향했다. 2층으로 오를 계단이 있을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어.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길 쉴 틈 없이 반복했다. 행인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프레져는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이게 무슨 소란이요?”
뒤에서 들려온 호통에 문을 두드리던 프레져의 손이 우뚝 멎었다. 프레져는 기계처럼 뻣뻣하게 몸을 돌려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응시했다.
“대체 누군데 남의 집에서 난동을 부리냔 말이요!”
중년의 남자는 화가 나 있었다. 그의 옆에 서 있는 여자는 어깨에 숄을 두른 채 겁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차림새를 보니 이 건물에서 사는 사람들 같았다.
프레져는 다리를 질질 끌듯 걸어 남자 앞에 섰다. 그러자 남자가 부인으로 보이는 여자를 제 뒤에 감췄다.
“여기 2층에, 어디 갔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요?”
“캐롤라인을 만나러 왔는데…… 불이 꺼져 있습니다. 외출한 겁니까?”
제발 그렇다고 대답해 주길 바라며 프레져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나 남자, 아크만의 입에서 나온 말은 프레져의 실낱같은 희망을 산산이 부수는 것이었다.
“캐롤라인은 병원에 실려 갔소.”
* * *
응급 환자의 등장에 병원은 한바탕 소란스러워졌다. 실려 온 이가 외상 환자가 아닌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정형외과도, 소아과도 아닌 흉부외과를 필요로 하는 환자라니.
의료진의 호출에 연구실에 있던 홉킨스 박사는 허겁지겁 응급실로 내려왔다. 학회 준비로 인해 퇴근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맥박이랑 호흡은?”
“숨을 못 쉬길래 응급 처치를 하긴 했는데, 여전히 빠르고 불규칙합니다. 마비 증세는 없어 보이는데……!”
“헤이오스랑 갤리거 박사는?”
“헤이오스 선생님은 아까 퇴근….”
“당장 데려와! 쫓아가서 잡아 오기라도 해!”
의료진 몇 명이 붙어 경련을 일으키는 캐롤라인의 몸에 진정제를 투여했다. 움직이지 못하게 팔을 누르는 이도 있었고 다른 곳에서 의료 장비를 가지고 오는 이들도 있었다. 퇴근하려다 말고 달려온 사람도 있었다.
“이 장비 다룰 줄 아는 분 있습니까?”
“약물은 이게 한계치입니다. 더 넣으면 위험해요!”
“지금 당장은 할 수 있는 방법이……!”
다급한 목소리가 응급실을 오갔다. 찢어진 상처는 꿰매면 되고 부러진 뼈는 다시 붙길 기다리면 된다지만 심장은 아니었다.
현재의 의술로서는 캐롤라인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보호자분들은 밖으로 나가 계세요.”
간호사가 세 사람을 응급실 밖으로 이끌었다. 심각한 대화가 들릴 때면 얼굴이 창백해지는 세 사람을 위한 배려였다.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
마샤가 발을 동동 구르며 중얼거렸다. 스테파니는 이미 눈물범벅이 된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건 에릭 역시 마찬가지였다. 의자 위에 축 늘어져 있는 그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었다.
세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입을 열 엄두가 나지 않아서였다. 입을 열었다간 겁에 질린 목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여기서… 뭣들 하고 있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침묵을 깨는 목소리는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스테파니는 무릎 사이에 묻어 둔 얼굴을 들어 올렸다.
“백작…님?”
프레져는 넝마 같은 몰골을 한 채 울고 있는 세 사람을 차례로 훑었다.
캐롤라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뭐 하고 있냐 물었다.”
그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도 대답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프레져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응급실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애써 모른 척하며 에릭에게 다가갔다.
“캐롤라인은 어디 있지?”
“…….”
“어디 있냐고 묻잖아!”
“흐윽.”
스테파니가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캐롤라인, 단 네 음절을 말했을 뿐인데… 눈물이 참을 수 없이 솟구쳤다.
“흡, 흐으, 흐어어엉!”
결국 스테파니는 아이처럼 바닥을 치며 울기 시작했다. 서럽게 우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프레져는 그런 스테파니를 보며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흐윽, 흡…….”
“어떻게 사람이 한순간에…….”
“비켜 주세요! 지나가야 합니다!”
뒷말은 간호사의 호통에 의해 뭉개졌다. 프레져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뒤를 돌았다. 들것 위에는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색을 한 여자가 누워 있었다. 옆에 붙어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아 여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얼굴, 얼굴을…….”
“비키라니까요!”
의사가 홀린 듯 다가오는 프레져를 밀친 채 뛰어갔다. 그러나 프레져는 바닥에 넘어진 채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처음 보는 물건을 몸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이는 자신의 부인, 캐롤라인 헌티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