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임상 실험은 그레타의 의사들이 주관하는 게 맞긴 하지만… 안과 의사는 이번 협진에 따라오지 않아서요.”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캐롤라인의 얼굴엔 실망스러움이 떠올랐다. 당황한 에릭은 황급히 말을 덧붙이며 캐롤라인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선생님. 제가 무리한 부탁을 해서 괜히 난감하게 했네요.”
애써 웃는 얼굴에 클리브는 가슴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사포로 심장 표면을 문지르는 느낌이었다.
“어차피 12월이 되면 그레타에 가야 합니다. 연말 보고를 해야 하기도 하지만 찾아오는 새해엔 프로젝트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갈 건지 논의하고, 필요한 지원을 받기 위해서죠. 충분한 토의를 거친다면 협조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요?”
캐롤라인의 얼굴이 화악 밝아졌다. 순간 클리브는 아차 했다. 제가 그녀에게 너무 큰 기대를 심어 줬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의사 특유의 무심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물론 현존하는 의학으론 시신경을 복구할 수 없다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과도한 희망은 때론 고문이 되는 법이었다. 의사로서의 사명은 객관적인 사실과 함께 환자가 고통스럽지 않을 만큼의 희망을 처방하는 것이었다.
“네.”
쓰리게 웃는 캐롤라인을 보며 클리브는 자괴감과 무력감에 빠졌다.
신은 어째서 캐롤라인에게만 이렇게 가혹한지, 의사인 자신은 할 수 있는 게 왜 이렇게 없는지.
클리브는 명치가 갑갑하고 어깨가 무거웠다. 빈민가로 의료 봉사를 다니며 제법 무뎌졌다 생각했는데, 이런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는 환자는 실로 오랜만이라 더욱 그랬다.
‘여기서 헌티드 백작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더 심란해하겠지.’
심성이 여린 사람이니 본인이 미안해하며 사과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클리브는 그녀가 비참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애들아, 이제 자리에 앉자. 쉬는 시간 끝났어.”
그래서 그는 애써 밝은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캐롤라인은 이디나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이디나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창문을 살짝 열고 들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상심한 마음을 달래 주기 위해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할 즈음, 이디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많은 아이들이 다 아프단 말이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캐롤라인은 이디나가 뜻하는 게 실험실의 아이들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이디나가 손등에 붙여 준 스티커를 만지작거리고 있기도 했다. 흰 강아지 모양 스티커는 슈가 이디나에게 붙여 준 것이었다.
“한참 밖에서 뛰어놀아야 할 아이들이 어쩌다가…….”
콩알만 한 아이들이 불치병을 앓고 있다는 게 마음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이에 캐롤라인은 코끝이 시려 오는 것을 느꼈다.
제 부모님은 항상 이랬다. 배부르게 먹을 바엔 아픈 이에게 하나를 더 주고 싶어 했다. 이는 캐롤라인이 부모님을 사랑하는 수백 가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듣자 하니 걔들은 학교도 못 가고 제대로 놀지도 못한다면서?”
“어리기도 하고 학교에 갔다가 발작을 일으킬지도 모르니까요.”
“애들이 노는 걸 참 좋아하던데. 그 아이들을 돌봐 줄 수 있는 시설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디나가 손등에 붙은 스티커를 계속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한결같이 다정한 제 어머니의 등을 쓸어내리며 캐롤라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도 한번 생각해 볼게요.”
* * *
열흘 간의 짧은 만남이 끝나고 이디나가 로우밸리에 돌아가는 날이 되었다.
그새 정이 들었는지, 스테파니가 이디나를 꼭 껴안고 있었다. 평소라면 자고 있을 에릭 역시 피곤한 몸을 일으켜 이디나를 배웅하러 나왔다. 로렌과 아크만도 함께였다.
“엄마,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 돼요?”
“애런이 혼자 있잖아. 걔는 야무진 구석이 없어서 안 돼. 내가 가서 확인해 봐야지.”
애런에게 맡기고 온 구둣방이 어지간히 걱정인 모양이었다. 애런이 가주가 된 지 3년이 됐음에도 이디나는 그를 영 못 미더워했다.
“애런이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도 아니고.”
“어머, 넌 아닌 줄 아니?”
“엄마!”
이디나가 쿡쿡 웃었다. 눈꼬리에 예쁘게 진 주름이 그녀가 얼마나 많이 웃으며 살았는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또 올게.”
“…….”
“아님 네가 한가할 때 내려와도 되고.”
캐롤라인은 대답할 수 없었다. 과연 자신이 다음번을 기약해도 되는 것일까. 그때까지 살아 있는 게 가능할까. 수많은 생각이 캐롤라인을 덮쳤다.
“얘가 엄마 말에 대꾸도 안 해 주고.”
“……알겠어요.”
겨우 나온 목소리가 엉망이었다. 웃으며 배웅하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는데. 결국 또 눈가가 뜨거워졌다.
“아이고, 다 큰 줄 알았는데 아직 멀었구나. 어린애 취급 말라더니.”
이디나가 캐롤라인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러곤 그녀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닦았다.
캐롤라인은 마지막으로 이디나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이게 마지막일 테니 어머니의 얼굴을 충분히 봐야 하는데. 눈치 없게 흐르는 눈물이 시야를 방해했다.
“엄마,”
“으응?”
“사랑해요.”
캐롤라인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이디나를 끌어안았다.
“많이 보고 싶을 거예요.”
“누가 보면 영영 못 보는 줄 알겠다. 그만 울어.”
그 장면을 지켜보는 이들의 얼굴에도 눈물이 흘렀다. 아크만은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돌렸다. 웃고 있는 사람은 이디나뿐이었다.
“잘 지내야 해요. 알겠죠?”
“그래. 우리 딸 눈물 그치게 만들려면 잘 지내야겠다.”
이디나는 캐롤라인의 등을 토닥인 후 몸을 뗐다. 그녀는 에릭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마차에 올랐다.
“다들 나중에 다시 봐요. 우리 캐롤 좀 부탁할게요.”
“네. 편지할게요.”
로렌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마차 문이 닫혔다. 이윽고 마차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거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이디나는 창문 밖으로 손을 빼 계속 흔들고 있었다.
“미안해요…….”
캐롤라인의 혼잣말은 마차가 일으킨 바람에 의해 공중으로 흩어졌다. 차가운 바람에 눈물 젖은 볼이 얼어붙는 게 느껴졌다.
* * *
“쟤가 왜 저렇게 울까…….”
이디나는 창틀에 턱을 올린 채 중얼거렸다. 캐롤은 눈물이 그리 많지 않은 아이라 그런지 더욱 마음이 쓰였다. 제가 모르는 사이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잠시 멈췄다 가겠습니다.”
출발한 지 한 시간이 조금 넘었을까, 마부가 좌석과 연결된 문을 열고 외쳤다. 이디나가 무어라 묻기도 전에 마차가 멈췄다. 그러곤 문이 열렸다.
“어머님, 프레져 헌티드입니다.”
귀에 익은 목소리에 이디나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디나는 프레져의 얼굴을 향해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으려다 멈칫했다. 헌티드 백작의 얼굴에 함부로 손댈 수는 없었다.
“괜찮으시다면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어서 앉아요.”
곧 커다란 인영이 눈앞에 드리움과 동시에 맞은편에 누군가 앉는 소리가 났다.
이디나는 보이지 않는 눈에 힘을 줬다.
“배웅은 꼭 해 드리고 싶어 왔습니다. 노르티움에 계시는 동안 챙겨 드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합니다.”
일이 바쁜 것은 고사하더라도, 장모에게 예의를 다하지 않는 건 귀족으로서 도리가 아니었다. 제 품위에 스스로 흠집을 냈다는 생각에 프레져는 조금 부끄럽기까지 했다.
“아니에요. 바쁜 거 다 아는데. 이렇게 찾아와 준 것만으로도 감동이에요, 나는.”
주절주절, 이디나의 잡담이 이어졌다. 프레져는 ‘오.’, ‘네’, ‘그렇군요.’와 같은 단어로 이디나의 말에 반응했다.
프레져는 이렇게 이디나를 관찰하다 보면 캐롤라인에게 애정을 받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스테파니가 호수 공원 옆에 있는 식당에도 데려다줬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말이 많은 것이 이유일까. 캐롤라인의 애정은 저리 요란법석한 것에서 오나. 수많은 물음이 프레져의 머리를 차지했다.
프레져는 캐롤라인을 가족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캐롤라인은 자신의 아내임과 동시에 헌티드의 일원이기 때문이었다.
결혼식을 올렸고 가문의 어른들에게 허락을 받았으며, 서류를 통해 법적으로 하나가 되었다.
프레져에게 가족이란 그런 것이었다. 좋든 싫든 각종 절차와 의식을 통해 결합하였다면 그게 가족이었다. 그의 부모가 그랬고 그의 친척들이 그랬다. 그렇게 학습해 왔다.
프레져는 캐롤라인에게 그의 가족이라면 응당 누려야 할 명예와 품위를 선물했다. 어머니 레이벨라의 수십 배에 달하는 재산을 캐롤라인의 앞으로 돌리기까지 했다.
방계 혈족들의 반대가 있었으나 상관없었다. 그는 헌티드의 가주로서 아내와의 유대를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유대와 행복이 깨지지 않게끔. 부모의 발자국을 따라 걷지 않게끔.
그렇게 캐롤라인과 가족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에게 가족이란 법과 서류, 재산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닌 듯했다.
그래서 프레져는 알고 싶었다. 자신은 안 되고 다른 이들은 가능한 그 ‘가족’이라는 게 뭔지, 그녀의 애정은 대체 어떤 이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인지를.
“배웅하면서 얼마나 울던지. 누가 보면 내가 자길 버리는 줄 알 뻔했다니까요.”
가족이라는 것은 헤어질 때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눈물은 슬플 때 흘리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헤어지는 게 슬퍼야 한다는 뜻인데.
프레져는 다른 이와의 이별이 슬펐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 있긴 했군.’
데클렌이 마차 사고를 당했을 땐 조금 슬펐던 것 같기도 했다.
레이벨라가 세상을 뜬 건 십 년도 더 된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확실한 건 울긴 했다는 거다.
자신이 슬펐던 건 이별이 아닌 사별을 했을 때뿐이었다.
“잘 보이지도 않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눈에 밟히던지. 꼭 다시는 못 볼 사람처럼…….”
프레져는 자연히 캐롤라인의 죽음을 떠올렸다.
캐롤라인이 죽으면 슬플까? 당연히 참을 수 없이 슬플 것 같은데. 죽음 앞에 슬퍼해야 가족이라면 자신은 캐롤라인의 가족인 것이 맞았다.
하지만 단순한 이별로는 슬프지 않을 것 같다. 당장 지금까지의 상황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캐롤라인이 사라졌다는 것에 분노하기 바빴으니.
“달래 주느라 물어보질 못했는데, 혹시 캐롤라인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죠?”
이디나의 질문에 프레져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멈췄다.
고개를 들자 캐롤라인과 같은 색채를 지닌, 그러나 그녀보다는 조금 더 탁한 보랏빛 눈동자가 일렁이는 게 보였다.
“그렇게 잘 우는 애가 아니거든요. 혹시 말 못 할 사정이 있나 해서.”
프레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캐롤라인과 마주한 것은 올해 여름 이후 처음이었다. 프레져는 그동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