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왜 그렇게 말해요. 무섭게.”
“나중을 말하는 거야. 먼저 간 네 아버지를 두고 하는 이야기기도 하고.”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뜨게 될 거라 말하면 이디나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캐롤라인은 조금 두려워졌다.
“제뉴라가 살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뭐가 급하다고 그리 빨리 갔는지.”
캐롤라인의 아버지인 제뉴라는 딸의 결혼을 석 달 앞두고 세상을 떴다. 사인은 심장 마비라고 모두가 알고 있었으나 진실은 다를 것임을 캐롤라인은 알고 있었다.
캐롤라인은 몇 번이나 입을 달싹이다 천천히 목소리를 내었다.
“아빠 말이에요. 원래도 심장이 안 좋았어요?”
“심장? 글쎄…….”
캐롤라인은 골똘히 생각하는 이디나의 얼굴을 말없이 응시했다. 이불을 쥔 손에 조금씩 땀이 배기 시작했다.
“병원을 제대로 가 본 적이 없으니 그건 모르겠구나. 하지만 가슴이 아프다고 했던 적은 없었어.”
“……그렇군요.”
대답하는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다행히 이디나는 제뉴라 생각에 빠져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체력이 워낙 저질이긴 했지. 조금만 뛰어도 숨을 할딱거리고. 아, 연애 적에는 날 볼 때마다 심장이 저릿저릿하다고 하더구나. 아무래도 내가 그 인간 심장에 영향을 준 모양이야.”
웃으라고 한 말인데 캐롤라인은 차마 웃을 수 없었다. 심장이 저릿하다는 말이 장난이 아닌 진담으로 들려서.
“그 대가로 내가 평생을 업고 다니지 않았니. 얼굴만 꽃총각인 줄 알았는데, 체력은 들판의 풀보다 연약할 줄 누가 알았겠어.”
캐롤라인은 이디나의 등에 매달려 있는 제뉴라를 상상했다. 그러자 푸흐, 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아예 약골은 아니었어. 낮에는 골골거리던 사람이 밤만 되면 어찌나 사나워지는지, 아주 흉흉하게….”
“엄마!”
“어휴, 깜짝아. 귀청 떨어지겠다.”
어린애들 장난과는 차원이 다른 중년의 회상에 캐롤라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진짜 딸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이디나는 중얼거리는 캐롤라인을 보며 한참을 웃었다. 어찌나 웃었는지 웃음을 그쳤을 땐 눈가에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그래도 캐롤라인, 사랑받고 있어서 다행이다.”
이디나가 캐롤라인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잠투정을 할 때면 늘 해 주던 것이었다.
“너무 대단한 가문에 시집가 마음고생하는 건 아닌가 했는데. 이리 잘 지내는 걸 보니 다행이야.”
“……그렇죠?”
“응. 사랑하는 사람이랑 행복하게 사는 걸 보면 죽은 네 아빠도 기뻐할 거야.”
뒷말엔 끝까지 대답하지 못했다. 뜨거운 돌을 삼킨 것처럼 목이 뻑뻑하고 아팠다.
이디나는 캐롤라인이 제뉴라 생각을 하고 있다 믿는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남들 눈엔 자신이 제법 행복해 보인다는 허탈함, 거짓말을 했다는 죄책감. 자신의 행복만을 바라는 이디나에게 미안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가슴 위에 큰 바위가 앉아 있는 것처럼 답답했다.
그게 아니라고, 나는 사랑받지 못했다고, 결혼 생활 내내 불행했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캐롤, 자니?”
이디나와 제뉴라는 무척이나 금슬이 좋았다. 부모 같은 사랑을 해 보고 싶었다. 그런데 자신이 했던 것은 처절한 짝사랑이었다. 이 지긋지긋한 사랑을 끝냈을 때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건 죽음이었다.
연기로나마 이디나를 안심시켜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가여웠다.
“많이 피곤했나 보구나.”
조심조심 귀밑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왜 이리 다정한지. 제 구역을 범람하는 눈물을 도저히 막을 길이 없었다.
“앞으로도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한다.”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는 손길이 다정했다. 캐롤라인은 이를 꽉 깨물고 울음을 참았다.
“잘 자렴, 우리 아기. 좋은 꿈 꾸고.”
캐롤라인은 소리 없는 울음을 삼키며 몸을 웅크렸다. 눈물로 흥건해진 베갯잇이 축축했다. 입을 벌리면 용암보다 뜨거운 울음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캐롤라인은 어느새 잠든 이디나의 등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새근새근, 일정한 박자에 맞춰 등이 오르내렸다.
‘먼저 가서 미안해요. 속여서 미안해요.’
품에 닿은 이디나의 등은 더없이 왜소해 더욱 눈물이 났다.
“미안해요…….”
그날 캐롤라인은 아버지가 나오는 꿈을 꿨다. 아버지의 등에 업혀 오솔길을 산책하던, 다정하고 따듯한 꿈을.
* * *
다음 날 오전, 캐롤라인은 이디나와 함께 안과 진료실로 향했다. 퉁퉁 부은 눈은 마샤의 도움을 받아 화장으로 감춘 채였다.
“한번 잘못된 시신경을 되돌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 지금으로선 눈의 압력을 낮추는 것이 최선의 치료입니다.”
“그렇군요.”
의연한 대답과는 달리 이디나는 눈에 띄게 실망한 기색이었다.
“혹시 진행 중인 임상 실험은 없나요? 아직 시작하지 않은 실험도 좋아요.”
“죄송하지만 안과엔 예정된 실험이 없습니다.”
좌절하는 모녀를 보며 의사는 어렵사리 입을 뗐다.
“계획이 생기면 적혀 있는 주소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지금 투약 중인 안약보다 좋은 신약이 나왔으니 그걸로 바꿔 처방해 드리고요.”
“네. 감사합니다.”
시신경은 뭐고 안압은 또 뭘까. 인간의 몸은 어째서 이리 어려운 것일까.
캐롤라인은 거리에 서 있는 가로수가 차라리 부러울 지경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제 눈을 빼 이디나에게 주고 싶었다. 어차피 자신은 몇 달 뒤에 죽을 사람이니.
“캐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
“아, 그냥요.”
정신 차려 보니 어느새 임상 치료실 앞이었다. 희망을 찾고자 하는 본능이 캐롤라인을 이곳으로 이끈 모양이었다.
‘내가 임상 실험에 참여 중인 걸 밝혀선 안 되니까.’
몸을 돌리려는 찰나, 벌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캐롤!”
양갈래로 묶은 머리에 리본을 단 모아였다.
“목소리가 들려서 나왔는데 역시 캐롤이었어!”
모아가 캐롤라인의 품에 와락 안겼다.
캐롤라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오늘은 임상 실험이 없는 날인데. 어째서 모아가 여기에 있는 것일까. 열린 문 너머에는 모아 외에도 열 명 정도의 아이가 더 있었다.
난데없이 들려온 어린 목소리에 이디나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모아의 정수리가 있는 위치였다.
“누구니?”
“모아예요. 다섯 살이고요.”
캐롤라인에게 물은 것이었으나 답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이디나가 미간을 모은 채 얼굴을 가까이 하자 모아가 손가락 다섯 개를 펴 이디나에게 보여 줬다.
“이거 보세요. 다섯 개예요.”
“하하, 그래? 내가 눈이 잘 안 보여서…….”
이디나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처음 본 아이에게 앞이 안 보인다는 걸 설명하기 곤란한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겁도 많고 모르는 것도 많으니.
모아는 캐롤라인과 이디나, 그녀의 손에 들린 지팡이를 차례로 보다가 이디나의 손바닥 가까이에 제 두 손을 뻗었다.
“안 보이면 만져 보세요. 이렇게 다섯 개예요.”
“정말이네.”
이디나가 모아의 고사리 같은 손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주름진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스쳤다.
“그런데 아줌마는 누구세요?”
모아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이디나를 응시하자 캐롤라인이 대신 입을 열었다.
“모아, 이분은 내 어머니셔.”
“어머니?”
“응. 모아한테도 부모님이 있듯이 나한테도 엄마가 있거든.”
“와, 캐롤한테도 엄마가 있을 줄은 몰랐어!”
악의 따윈 없는 순수한 질문이었으나 타격감은 상당했다.
이디나는 이 상황이 즐거운지 쿡쿡 웃기만 했다. 캐롤라인은 이디나의 눈치를 살피다 모아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러곤 모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모아,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을까?”
“뭔데?”
“우리 엄마한테 내가 아프다는 거 비밀로 해 줄래? 여기서 치료받고 있다는 것도.”
“왜애?”
모아가 검지를 입술에 댄 채 고개를 갸우뚱했다.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음, 그건 나중에 말해 줄게.”
“그래! 난 캐롤한테는 뭐든 다 해 줄 수 있어!”
모아가 꺄르륵 웃었다. 그 소음에 치료실 밖으로 사람이 나왔다. 익숙한 밀금발은 클리브의 것이었다.
“캐롤라인?”
“뭐?”
“진짜 캐롤이야?”
클리브는 말하고 나서도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질주 본능을 가진 아이들을 막기엔 늦어 있었다.
캐롤라인과 이디나는 치료실 안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클리브의 설명을 들어 보니 오늘은 8세 이하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임상 실험이 있는 모양이었다. 인원이 적은 이유가 있었다.
모아와 클리브가 신신당부를 했는지 아이들은 이디나의 앞에서 심장병의 첫 글자조차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모녀를 향한 반짝이는 눈빛만큼은 거두지 않은 채였다.
“헉, 캐롤도 엄마가 있단 말야?”
“캐롤의 엄마면 할머니여야 되는 거 아니야?”
“신기해! 엄마가 있을 줄 몰랐어!”
“얘들아, 이게 무슨 무례니.”
순수하지만 강도 높은 탄사가 오갔다.
캐롤라인은 관자놀이에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보호자들 역시 열심히 말려 봤지만 큰 소용은 없었다. 짧은 쉬는 시간은 소란스러웠다.
“떠들썩하니 재밌구나.”
다행히 이디나는 이 상황을 꽤 즐거워하는 눈치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새로운 질문이 캐롤라인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근데 이 아이들은 어떻게 알게 된 거니? 여긴 또 어디고.”
“여, 여기는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임상 실험을 하는 곳이에요. 의사 선생님이랑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서 종종 들렀거든요. 임상 실험이라는 거에 관심이 있기도 하고, 또…….”
주절주절 핑계가 이어졌다. 마음이 불편했으나 캐롤라인은 이게 완전한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으로 스스로를 위안했다.
클리브와 친분이 있는 것도, 임상 실험에 관심이 있는 것도 모두 사실이었으니.
“그럼 오늘 이곳에 들른 건… 나 때문이겠구나.”
다행히 이디나는 의심하지 않는 듯했다. 딸이 임상 실험에 관심을 보이는 게 자신 때문이라 생각했는지 미안한 표정을 짓기까지 했다.
이에 캐롤라인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거짓말을 했을 때보다 입이 썼다.
캐롤라인은 이렇게 된 김에 클리브에게 이디나를 위한 임상 실험을 개설해 줄 수 있는지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레타의 의사들이 진행하는 임상 실험의 총책임자는 클리브였으니.
“아줌마는 이름이 모에요?”
“이디나란다.”
“이디나, 우리랑 같이 그림놀이 해요!”
“얘들아, 어른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부르면 어떡하니.”
이디나도 아이들과 노느라 정신이 없어 보여 다행이었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폭발하는 인기는 유전인 모양이었다.
캐롤라인은 마침 제 옆으로 온 클리브에게 이디나가 받을 수 있는 실험이 있는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