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액자는 처음부터 이 사진을 위해 준비된 것처럼 빈틈없이 딱 맞았다.
“엄마 보고 싶을 때마다 봐야지.”
아마 이 사진이 있으면 세상을 뜰 때 외롭진 않을 것이다.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을 상상하면서 편안히 잠들 수 있겠지.
캐롤라인은 액자 테두리를 만지작거리며 유언장에 쓸 내용을 생각했다. 생각해 보니 이디나와 애런에겐 따로 편지를 남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주 정성껏, 길게 써서.
“저 왔어요! 오렌지가 맛있어 보이길래 사 왔는데. 안 드시는 분 없죠?”
요란하게 등장한 스테파니에 캐롤라인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러곤 이디나를 부축해 거실로 나갔다.
스테파니가 합류하자 집은 더욱 복작복작해졌다. 이디나가 온 뒤의 분위기는 항상 이랬다.
아침엔 캐롤라인이 요리를, 저녁엔 이디나가 버섯을 넣은 크림 스튜를 끓이는 정겨운 장면이 자주 연출됐다. 버터와 크림은 심질환 환자에게 좋지 않았지만, 에릭도 이디나가 있을 때만큼은 모르는 척해 주었다.
“캐롤, 늘 느끼는 거지만 넌 주방 근처엔 얼씬도 하면 안 돼.”
이디나가 스테파니가 만든 도미구이를 접시에 덜며 말했다.
“누가 사과를 소금에 절일 생각을 해.”
“…남부에선 생선을 그런 식으로 절여 먹잖아요.”
“그건 생선이고. 너는 스테파니가 옆에 있어 주는 거에 감사하면서 살아라. 아니었으면 넌 평생 진흙으로 쿠키나 구워 먹으며 살 테니까.”
이디나의 신랄한 말에 캐롤라인이 입을 삐죽였다. 그러면서도 반박은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기에. 캐롤라인의 파괴적인 요리 실력 덕에 식탁 위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큼, 그건 그렇고 엄마, 내일 병원 가는 날인 거 알죠?”
캐롤라인이 큼큼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이디나가 노르티움에 온 지도 벌써 나흘째, 캐롤라인은 어머니를 대신해 병원 안과에 미리 예약을 해 놨다. 그녀의 눈을 살릴 방법을 찾기 위함이었다.
“바로 집에 돌아오진 못할 거예요. 하루 이틀 정도 입원할 수도 있고요.”
“그래.”
이디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기대한 눈치는 아니었다.
‘나도 옛날엔 저렇게 보였을까?’
캐롤라인은 이미 체념한 듯한 이디나의 얼굴을 보며 가슴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에게서 과거의 자신이 겹쳐 보여 더욱 마음이 쓰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달라.’
자신처럼 죽어 버리고 말 운명이 아니었다. 그녀에겐 아직 살 날이 많았다.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지는 못해도 손상된 신체 일부는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엄마, 안 좋은 생각은 하지 말아요.”
캐롤라인은 이디나의 손을 감싸 쥐며 희망의 말을 건넸다.
“반드시 좋아질 거예요. 꼭이요.”
제 주위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 * *
다음 날 오전, 캐롤라인은 이디나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소리만 클 뿐이지 무서운 건 아니에요. 긴장 푸세요.”
캐롤라인이 이디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긴장했는지 그녀의 손끝이 서늘했다.
“그럼 받고 오마.”
이디나가 검사실 안으로 들어간 걸 확인한 캐롤라인은 서둘러 겉옷을 챙겨 입었다.
“어머니 좀 부탁할게. 금방 돌아올 거야.”
“천천히 오셔도 돼요. 제가 잘 말씀드릴게요.”
“고마워, 마샤.”
마샤에게 이디나를 맡긴 캐롤라인은 서둘러 병원을 나섰다. 그녀의 행선지는 노르티움에서 가장 쾌적한 시설을 자랑하는 호텔이었다.
“오셨습니까.”
호텔로 로비로 들어서자마자 낯선 사내가 캐롤라인에게 알은체를 해왔다. 마치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거처럼.
“백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수염을 너저분하게 기른 사내의 정체는 휴고의 친우인 빌이었다.
“감시를 붙였군요.”
캐롤라인의 얼굴에 불쾌함이 떠올랐다. 예상하긴 했지만 제 행적이 실시간으로 보고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기분 나쁜 일이었다.
“…올라가시죠.”
캐롤라인은 빌과 함께 승강기에 탔다. 승강기는 느리게 움직여 스위트룸이 있는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스위트룸이 있는 층이라 그런지 복도부터 인테리어가 화려했다. 일정한 간격마다 고가의 장식품이 진열되어 있었고 바닥엔 세탁하기 어려운 재질의 카펫이 깔려 있었다. 투명한 유리 장식장 안에는 코끼리의 상아나 버팔로의 뿔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 호화로움의 끝에는 프레져의 방이 있었다. 무려 한 층의 절반을 차지하는, 넓디넓은 스위트룸이.
캐롤라인은 문 앞으로 걸어가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손잡이를 잡았다. 따로 잠가 두지 않았는지 문은 아주 수월하게 열렸다.
예상했듯 스위트룸은 매우 넓었다. 방 안으로 한참을 걸어 들어가고 나서야 캐롤라인은 겨우 프레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캐롤라인을 등진 채 통유리창 앞에 서 있었다. 분명 기척을 느꼈을 텐데 여전히 시선을 창문 밖에 고정하고 있었다.
“…왜 문을 열어 뒀어요? 낯선 사람이 들어오면 어쩌려고.”
그 침묵과 무시가 싫어 캐롤라인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는 프레져와 괜한 기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어서 빨리 용건을 끝내고 돌아가 쉬고 싶었으니까.
“여긴 북부 최상급 호텔이야. 그렇게 보안에 취약할 리 없지. 귀빈이 묵고 있는 스위트룸이라면 더욱.”
“…….”
말하는 게 여전히 재수가 없었다.
“올 사람이 없기도 하고.”
몸을 돌려 자신을 보는 프레져에 캐롤라인은 머리를 채운 상념을 지워 냈다. 한시가 바쁜 와중에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사치였다.
“당신 부하들이 말해서 알겠지만, 며칠 전에 어머니가 오셨어요. 지금은 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가셨고요.”
캐롤라인은 부러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계속 말하라는 듯 프레져가 고개를 까딱였다.
다음 말은 조금 용기가 필요한 말이라 캐롤라인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어머니가…… 당신을 보고 싶어 해요.”
말하기 어려워 말허리가 늘어졌다. 죽어도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남자에게 제 발로 돌아온 것도 모자라 부탁까지 해야 한다는 게 너무 싫었지만 지금으로선 선택지가 없었다.
“많이 바라지 않을게요. 얼굴 한 번만 보여 줘요.”
곧 세상의 모든 빛을 잃을 이디나를 위해서라면 이깟 자존심쯤이야 버릴 수 있었다.
캐롤라인은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바닥만 쳐다봤다. 머지않아 머리 위로 비웃음이 쏟아지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입술을 깨문 이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들려오는 말은 없었다. 비아냥은커녕, 코웃음을 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캐롤라인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해를 등지고 있는 탓에 프레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캐롤라인은 왠지 그가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신기하네.”
“……뭐가요?”
“가족이라는 게.”
자존심까지 버려 가며 지키고 싶은 존재가 있다는 게.
프레져는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는 캐롤라인을 보며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프레져는 도대체 무엇이 캐롤라인을 저리 맹목적으로 만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에게 가족이란 황금으로 만든 왕관이었다.
아름답고 명예로우나 너무도 무거웠다. 무게를 견딜 힘이 없다면 목뼈가 부러지고 말 정도로.
프레져에게 가족이란 그런 존재였다.
그는 아버지에게 애정이라는 것을 받아 본 적 없었다. 데클렌은 프레져를 완벽한 헌티드로 만들기 위해 수도 없이 몰아붙였다.
어린 프레져는 아버지라는 단어를 들을 때면 폐부가 조이는 듯한 압박감까지 느끼곤 했다.
그나마 정을 줬던 어머니는 스스로의 손으로 밀어냈다. 가끔 다정했던 때를 추억해 보려 했지만 너무 까마득해 기억나지 않았다.
집안에선 늘 현악기처럼 높은 고성이 오갔다. 분노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아리아를 부를 때와는 달랐다. 그것은 밤의 요정이 우는 소리 같기도, 마왕이 절규하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 지긋지긋한 가족에게서 도망치고 싶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데클렌은 그에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며 성을 냈다. 어린 프레져는 적응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런데 캐롤라인은.
“당신이 무슨 뜻으로 그런 소릴 하는지 모르겠지만.”
프레져는 미간을 찡그리는 캐롤라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옅게 주름이 진 미간을 검지로 눌러 주고 싶었다.
“어머니와 애런은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에요. 그러니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건 당연해요.”
도대체 캐롤라인에게 가족이란 어떤 존재일까. 하다못해 보통의 가족들은 어떤 모습으로 사는 걸까.
프레져는 궁금했다.
“오늘 저녁에 찾아뵙도록 하지.”
이디나를 보면 알 수 있을까? 모녀가 평범하게 대화하는 걸 보면 저런 맹목적인 애정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 수 있을까?
그리고 이미 자신을 떠나 버린, 캐롤라인의 애정을 돌이킬 수 있을까?
“…….”
순순히 나온 대답에 캐롤라인은 입을 다물었다. 저 남자는 왜 이상한 곳에서만 이토록 순순한 것일까,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생각하지 말자. 용건을 마쳤으면 된 거야.’
캐롤라인은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할지 말지 고민하다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러곤 방을 가로질러 걸어가다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제게서 멀어지던 발을 보고 있던 프레져의 시선 역시 자연히 문 앞 이쪽을 보았다.
“부탁하는 김에 하나만 더 말할게요.”
그녀의 자그만 발을 응시하던 프레져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제비꽃을 닮은 연한 눈동자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어머니 앞에서는 좀, 다정하게 굴어 줘요.”
“…뭐?”
“나를 사랑하는 척해 달라는 말이에요.”
“…….”
“그 정도 연기는 해 줄 수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