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가 떠난 뒤에 남겨진 것 (44)화 (44/156)

#44

무엇이 그렇게 서럽고 억울한지 말을 하면 될 것을.

그녀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편한 대로 생각하고 오해해요. 늘 그래 왔던 것처럼.’

그런 주제에 왜 무언가 알아주길 바라는 것처럼 자신을 보는지.

“좀 더 조사할까요?”

“일단은 지켜보기만 해.”

처음엔 에릭을 찾으면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감히 제 아내를 탐낸 것도 모자라 헌티드의 명예에 먹칠까지 하려 했는데. 그런 놈을 어찌 살려 둔단 말인가.

그러나 프레져는 이 이상 감시하는 게 의미가 없을 것임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감시를 거두지 않은 건 순전히 캐롤라인 때문이었다. 도망친 이유도, 어디가 아픈지도, 조용히 관찰하다 보면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

“입원 사유에 대해서는 알아낸 게 있나?”

“죄송하지만 거기까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빌이 아까보다 더 작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평민 고아 출신인 그에게 프레져는 너무도 어려운 상대였다.

“병원엔 꽤 자주 방문하신 것 같긴 했습니다. 그곳의 간호사들과 제법 친해 보이시더군요.”

“자주?”

프레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에 손에 있던 만년필은 어느새 뚜껑이 닫힌 채 케이스 안에 들어가 있었다.

“노르티움 종합 병원에서 꾸준히 치료를 받아 오신 모양입니다.”

캐롤라인이 이리 큰 병원에 자주 갈 일이 뭐가 있을까. 예전부터 아픈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는데.

프레져의 머리에 갖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녀가 숨기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강한 직감이 프레져의 촉을 두드렸다.

“클리브 헤이오스는?”

“전공은 소아외과로 따로 진료실이 있는 건 아니더군요. 보아하니 소수의 환자를 대상으로만 특별한 치료를 진행하고 있다 합니다.”

“소아외과?”

“네. 현대 의학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치료법을 개발하는 프로젝트라 합니다. 그래서 그레타에서 온 의사들은 환자를 진찰하는 게 아닌, 병에 대한 새로운 치료법을 연구하는 것을 주 업무로 삼고 있고요.”

“새로운 치료법이라…….”

프레져가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소아외과 의사가 어째서 캐롤라인의 병실에 있던 걸까. 게다가 환자 진료와는 관련도 없는 사람이.

‘게다가 캐롤라인의 상태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어 보였지.’

프레져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사실 그도 클리브라는 선택지를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안면이 있으니 잘 구슬리면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클리브를 찾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그가 탐탁지 않았기 때문에.

부드럽게 휘어진 눈꼬리에 맑은 빛을 띤 하늘색 눈동자까지. 마냥 유순해 보인다 생각했던 얼굴은 프레져를 마주할 때만 날카로워졌다.

프레져는 그런 표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 허여멀건 낯에 떠오른 감정은 선연한 적개심이었다.

불쾌하진 않았다. 그런 시선을 받아 본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적이 많은 프레져로서는 익숙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의 심기를 건든 것은 그다음에 일어난 행동이었다.

잔뜩 날이 서 있던 클리브의 얼굴은 캐롤라인을 향할 때만 풀어졌다. 눈꼬리를 사르르 접어 웃는 것이 제법 요사스럽기까지 했다.

‘의도적으로 나를 배제하기까지 하고.’

클리브는 프레져가 대화에 끼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캐롤라인에게 말을 걸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을 정도로.

“에릭이 아니면 클리브라는 건가.”

피식, 또 웃음이 나왔다.

믿음이며 신뢰며, 온갖 감성적인 말로 잡아떼더니. 정작 의심 가는 행동만 골라 하고 있는 건 캐롤라인 본인이 아닌가.

“클리브 헤이오스 앞으로 곧 찾아가겠다고 연통을 넣어. 아주 정중하게.”

프레져는 클리브와 에릭의 정보가 적힌 종이를 뒤집으며 말했다.

캐롤라인의 말이 진실일까 거짓일까. 그것은 머지않아 알게 될 터였다.

* * *

캐롤라인은 한동안 받지 못했던 치료를 몰아 받으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와 동시에 대체 어딜 갔었냐는 임상 치료실 아이들의 투정도 받아 줘야 했다. 느리게 흘러갈 줄 알았던 시간은 금방 흘러 이디나가 노르티움에 오는 날이 되었다.

“어때? 나 건강해 보여?”

캐롤라인이 블러셔를 덧바른 얼굴은 마샤에게 들이밀며 물었다.

“그럼요. 아랫집에 핀 꽃보다 생기 넘쳐요.”

마샤가 캐롤라인의 연갈색 머리에 핀을 꽂으며 대답했다. 이에 캐롤라인의 입매가 매끄럽게 호선을 그렸다.

“마샤는 뭘 물어보든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을 해 주잖아.”

“에이, 아니에요. 저 거짓말 못하는 거 아시잖아요.”

오랜만에 화장을 한 캐롤라인은 실로 화사하고 아름다웠다. 입과 볼에는 평소엔 찾아볼 수 없는 생기가 넘쳐흘렀고 분을 바른 피부는 매끄러웠다.

캐롤라인은 원체 고운 얼굴이긴 하지만 화장이 병색을 가려 주니 그 미모가 더욱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어머니께는 예쁜 모습만 보여 드리고 싶어. 잘 보이진 않으시겠지만…….”

눈이 안 보이는 사람을 맞이하는 것치곤 꾸밈이 조금 과했다. 그러나 캐롤라인은 이렇게 해서라도 이디나에게 제가 건강하다는 것을, 멀쩡히 잘 지낸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그리고 이게 어머니랑 함께하는 마지막 데이트가 될지도 모르니까.’

매 순간 좋은 기억만을 가져가고 싶었다.

“마님, 이제 곧 마차가 도착할 겁니다.”

에릭의 목소리가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그는 벌써 건물 밖으로 나가 있었다. 인심 좋은 로렌과 아크만 역시 에릭과 함께 마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캐롤라인은 크림색 코트를 걸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 밖으로 나가 기다리자 멀리서 말발굽이 다그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머지않아 마차 한 대가 힐롱 부부의 꽃집 앞에 멈춰 섰다.

“엄마!”

“캐롤?”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리던 이디나가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손엔 지팡이가 쥐어져 있었다. 아직 지팡이에 적응하지 못했는지 바닥을 쿵쿵 찧는 모양새가 어색해 보였다.

편지에 적힌 것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 보였다.

캐롤라인은 새어 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삼키며 이디나에게 다가갔다.

“맞아요. 저 캐롤이에요.”

“우리 딸!”

이디나가 허공을 향해 팔을 벌렸다. 캐롤라인은 제게 와 닿지 못하는 그녀의 팔을 보다 냉큼 이디나에게 안겼다. 숨을 크게 들이쉬자 비누 냄새와 가죽 냄새가 섞인, 이디나 특유의 포근한 향이 났다.

“우리 딸, 나 좀 봐 봐. 얼굴 좀 보자.”

이디나가 캐롤라인을 품에서 떼어놓으며 말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걸 감추려 부단히 하는 말에 캐롤라인은 모른 척 얼굴을 내밀어 주었다. 이디나의 거친 손이 캐롤라인의 이마와 콧대를 서서히 훑었다.

“이마도 그렇고 콧대도 그렇고. 정말 우리 캐롤이 맞구나.”

이디나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게도 그녀의 눈동자엔 초점이 없었다. 손마디마다 굳은살이 박인 이디나의 손은 매우 거칠었다. 평생을 신발을 만드는 데 바쳤기 때문이었다.

눈이 안 보이면 손의 감각이라도 예민해야 할 텐데, 이디나는 그것조차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캐롤라인은 입술을 꽉 깨물어 겨우 울음을 참았다. 그런 모녀를 보는 에릭의 얼굴이 착잡했다.

“잠을 못 잤니? 얼굴이 왜 이렇게 푸석푸석해.”

이디나가 캐롤라인의 뺨을 더듬으며 말했다.

“입술도 다 튼 것 같은데. 밥은 잘 챙겨 먹는 거야?”

화장을 하긴 했지만 병색을 완벽하게 가릴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이디나의 손끝이 부르튼 입술과 각질이 일어난 턱을 맴돌았다.

“걱정 마세요. 잘 자고 잘 먹고 있으니까요.”

이디나는 느리게 손을 내렸다. 몇 번이나 손을 움직여 캐롤라인의 턱선과 목선을, 그리고 코트 밑으로 드러난 손목을 잡았다.

“흠, 살이 오른 걸 보니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구나.”

“…….”

두꺼워진 제 팔목을 내려다보는 캐롤라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사실 이건 살이 찐 게 아니라 부은 거였다.

약의 부작용은 장기적으로 캐롤라인을 괴롭혔고, 그로 인해 옷을 전부 새로 맞춰야 할 정도로 몸이 부어 버렸다.

그래도 얼굴 쪽은 사정이 나았다.

밤에는 다리에 쥐가 나 잠에서 깰 때가 많았고 아침이면 신발이 들어가지 않기도 했다.

‘차라리 다행이야.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이잖아.’

서럽거나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이디나를 안심시킬 수 있다면야 이렇게 착각하도록 내버려 두는 편이 나았다.

“아닌가?”

이디나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캐롤라인의 손목을 잡았다 놓길 반복했다.

“살이라고 하기엔 조금 단단한데. 손도 많이 차고.”

“…….”

“혹시 부은 거니? 어디 불편한 거야?”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목이 메서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이토록 쉽게 알 수 있는 걸, 또 프레져만 모른다.

“캐롤라인이 얼마나 잘 먹고 잘 웃는데요. 그건 제가, 제가 보증할테니 걱정 마셔요.”

나서서 말을 돌린 사람은 로렌이었다. 이에 이디나의 고개가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돌아갔다.

“누구……?”

“캐롤라인의 아랫집에 사는 로렌이라고 한답니다. 따님과 함께 꽃도 다듬고 과일도 까먹으면서 즐겁게 지내고 있어요.”

싱긋 웃으며 대답한 로렌이 아크만의 허리를 쿡 찔렀다. 그러자 아크만이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로렌의 남편인 아크만 힐롱이라고 합니다. 캐롤라인 덕에 즐거운 노년을 보내고 있지요.”

“어머.”

반가운 소리에 이디나의 얼굴이 화악 밝아졌다. 세 사람은 통성명을 한 뒤 살갑게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캐롤라인이 입 모양으로 고맙다 전하자 로렌이 눈을 찡긋거렸다.

“밖에서 이러지 말고 얼른 들어가요. 날이 추워요.”

“그래요. 못다 한 수다는 나중에 나눠도 괜찮으니까요.”

캐롤라인은 힐롱 부부와 인사를 끝낸 이디나를 집으로 이끌었다. 계단을 딛는 걸음은 거북이처럼 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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